2014년 8월 8일 금요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도미니코 사제는 1170년 스페인의 북부 카스티야 지방에서 총독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수도자가 되기를 열망한 그는 사제가 된 뒤에는 설교가로 활약하였다. 성인은 여러 수도회의 개혁에 동참하였고, 훗날 도미니코 수도회를 창설하였다. 1221년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려 선교 여행을 떠났다가, 큰 병에 걸려 선종하였으며, 1234년에 시성되었다.
☆☆☆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마태오 16,24-28)
"Whoever wishes to come after me
must deny himself,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말씀의 초대
나훔 예언자는 유다와 니네베에 내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한다. 하느님께서는 분노에 더디시나 벌하지 않으신 채 내버려 두시지는 않는다(제1독서).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려면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이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성인들의 초상은 뛰어난 화가들에게 매우 좋은 소재였습니다. 그들의 손에서 성인들의 모습을 담은 많은 걸작이 탄생하였고, 그 작품들에서 사람들은 인생과 신앙생활의 고비를 넘게 하는 위로와 통찰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의 도미니코회 수도자이자 화가였던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수도회의 창시자 도미니코 성인의 초상화가 그렇습니다. 그림에 나타난 겸손하고 청순한 도미니코 성인을 바라보면 혼란스러운 생각과 들끓던 마음이 어느새 부드럽게 가라앉고 다시 밝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피렌체의 도미니코회 산 마르코 성당에 있는 이 그림은 ‘모욕당하시는 그리스도’의 한 부분이며, 화가가 함께 사는 수도회 형제들의 묵상을 돕고자 그린 작품입니다. 주님의 수난을 깊이 묵상하는 성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평생 보여 준 투신과 가난과 겸손의 비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스페인 출신의 도미니코 성인이 평생 소명으로 삼은 것은 삶으로 ‘복음의 진리’를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주님의 진리만이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삶의 길을 비추어 준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도미니코 성인은 당시에 창궐하던 이단에게서 신자들을 보호하고자 주로 교육과 설교를 담당하는 도미니코 수도회를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말보다는 삶으로 증언하는 진리, 가난하고 진리에 목마른 이들에 대한 깊은 사랑만이 오류에 빠진 자들을 위한 치유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제가 되고자 학업에 전념한 젊은 시절 스페인에 지독한 기근이 들자 주저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을 돕고자 자신의 책을 팔면서 이렇게 반문하였습니다. “살아 있는 형제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 죽은 양피지로 만든 교과서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도미니코 성인을 기리는 오늘, 우리는 진리에 대한 열정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주님의 사람들이 이 시대의 교회에 더 많아지기를 주님께 청해야겠습니다.
☆☆☆
십자가는 본래 사형 도구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식민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주동자들을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고통은 길고 과정은 끔찍했기에 무척 위협적이었습니다. 반란자 대부분이 독립군이었기에 구경꾼도 많았습니다. 처형 장소도 따로 있었습니다. 사형이 확정되면 죄수들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말로 ‘골골타’입니다. 번역하면 ‘해골 터’이지요(마르 15,22 참조). 신약 성경이 그리스 말로 기록되면서 ‘골골타’는 ‘골고타’로 번역됩니다. 소리 나는 대로 옮긴 것입니다. 라틴 말로는 ‘갈바리아’라고 합니다. 오늘날 이곳에는 커다란 성당이 세워져 있는데 프란치스코 수도회(작은 형제회)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십자가는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한 십자가가 희생과 봉사의 상징으로 바뀐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오늘 복음 말씀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는지요? 삶에 ‘아픔을 주는 고통’입니다. 자신의 성격일 수도 있고 직업일 수도 있습니다. 건강이나 가족 관계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없애 달라고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힘’을 주십사고 기도해야 합니다.
☆☆☆
불가에서는 생로병사 모두가 ‘고’(苦)라고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고통이 많이 따릅니다.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십자가보다 자신의 것이 더 크고 무겁게 여겨집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듯, 다른 사람의 십자가는 작고 가벼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각자가 질 수 있는 크기의 십자가를 주신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당신께서도 친히 십자가를 지셨듯이,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을 보여 주셨듯이, 고통의 십자가는 인간에게 주어질 영광을 위한 신비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기꺼이 주님을 따릅시다.
옛날 궁중에는 광대가 있어서 왕을 웃겨 즐겁게 해드리는 일을 맡고 있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광대는 매일 어떻게 하면 왕을 웃길 수 있는가 하는 것만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광대의 역할 중에 하나가 왕이 잘못했을 때 그 잘못을 책망하는 풍자놀이로써 왕의 잘못을 뉘우치게도 했다고 하지요. 그러기에 광대는 어떤 때에는 영리한 말을 하다가도, 또 어떤 때에는 아주 멍청한 짓을 해서 왕을 웃기곤 했지요.
어느 날 광대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하는지 왕은 그에게 지팡이 하나를 건네주면서 `너보다 더 멍청한 사람이 있으면 주라’고 했습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그 왕이 임종을 맞게 되었지요. 왕의 가족과 친척 그리고 신하들이 모였고 왕은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긴 여행을 떠난다.’는 고별의 말을 힘들게 합니다. 바로 이 순간 광대가 불쑥 앞으로 튀어나와 `폐하, 한 가지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다른 나라를 방문하실 때는 반드시 사신을 먼저 보내셔서 준비를 하게 하셨는데 이번 여행에도 준비를 하셨는지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왕은 다른 여행에는 많은 준비를 하였으나 이번 여행에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지요. 그러자 광대는 곧바로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팡이를 받으셔야겠습니다. 저는 저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을 이제야 발견했네요.’
광대의 이 말이 우리들 모두에게 깊이 와 닿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항상 준비의 중요성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준비인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준비에 대해서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 바로 우리들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해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바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이 세상의 법칙만으로는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십자가를 지고 최선을 다해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 모습은 과연 하늘나라에 자신 있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혹시 광대로부터 지팡이를 받으며 “저는 저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을 이제야 발견했네요.”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에 최선을 다합시다.
넋두리
-홍성남 신부-
자기가 겪고 있는 삶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을 하소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하소연을 듣다 보면 짜증이 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들으면서 상대방이 얼마나 힘들까 하고 공감하기보다 반대로 왜 이렇게 살아가나 하고 짜증이 나곤 하지요. 이처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감정, 짜증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듣는 사람의 자세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말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어서입니다. 즉 스스로 변화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넋두리만 늘어 놓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피곤한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가 응석받이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저 징징거리기만 해도 부모가 다 알아서 해주었기 때문에 성장해서도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넋두리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런 이들에겐 주위의 불행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둘러보라고 마음 아픈 이야기도 필요하다면 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 십자가가 될지라도 오늘 주님이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서 당신 뒤를 따르라 하신 것처럼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 이정석 신부-
얼마 전 포콜라레 모임에서 개최하는 ‘하루 마리아 뽈리’에서 한 어린이가 수줍은 목소리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저는 제 동생을 업고 가다가 무서운 개를 만났습니다. 무서운 개에게 물릴까 봐 무거운 제 동생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었지만 동생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동생을 업은 채 도망쳤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의 길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제자의 복음적 정의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따라나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입시를 위해 독서실이나 도서관에서 ‘열공’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걷던 팔레스티나의 척박한 땅과 소박한 밥상머리, 폭풍우 치는 갈릴래아 호수와 벌판이 그들의 학원이었습니다. 입시가 목적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라면 ‘참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가족과 소유를 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분이 제자들이 선택한 새로운 삶의 이유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들의 새로운 삶에 어떤 전망을 제시한 것일까요? 예수님이 삶의 이유인 사람들 앞에 놓인 미래의 청사진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삶에 대해 무엇이라고 가르치셨기에 제자들이 그분께 모든 것을 걸었을까요? 그 대답을 복음서 안에서 찾아보니 ‘박해와 죽음’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마태 5,11; 10,18.39; 16,25).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은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두 눈으로 보게 합니다. 예수님의 길은 골고타의 십자가에서 끝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뵌 제자들은 그분의 길이 무엇이었는지 그제야 깨닫게 됩니다. 이제 선생님이 가신 그 길을 제자들이 걷게 됩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2코린 4,8-12) 예수님 때문에 차마 동생을 버리지 못하고 허둥지둥 달아났던 그 어린이는 그렇게 예수님의 길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오늘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자기 십자가를 지자 -김홍태 신부-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들으신 바와 같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가르치신다. 그런데 이 말씀은 어제 복음에서 들으신 대로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이 가시려고 하는 수난의 길에 대하여 “주님 그래서는 안 됩니다”(마태 16,22)하고 행동에 뒤이어 나온 말씀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즉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만 챙기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마태 16,23) 그런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오직 주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주님의 뜻, 주님이 보시기에 옳다고 판단되면 그 십자가가 심지어 목숨을 버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왜 꼭 그래야만 하는가? 다들 자신의 유익만 우선적으로 챙기려고 하는 세상, 앞에서는 국가를 위하고 자신이야말로 가장 깨끗한 척 하면서 뒤로는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이런 혼탁한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는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어떤 사람이 서인도 제도를 여행하고 있을 때였다. 기선 갑판에서 한 아이가 개를 데리고 놀고 있었다. 공을 던지면 개가 그 공을 물어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공을 잘못 던져 공은 바다로 굴러 떨어졌고, 개도 공을 따라 바다로 뛰어든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얼른 선장에게 달려가 배를 돌이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선장은 이를 거절했다. 개 한 마리 때문에 커다란 배의 항로를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가 물 속에 뛰어들었다. 그제서야 선장도 할 수 없이 배를 돌이켰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왜 목숨을 버리는 일이라 하더라도 십자가를 져야하는 지에 대한 물음에 힌트를 제공해 준다. 겨우 개 한 마리가 빠진 일이, 아버지가 십자가를 짐으로써 이제는 사람이 빠진 일로 의미와 사건의 중요도가 증대되었으며, 이는 결국 거대한 기선의 항로까지 변경시키는 결과로 연결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 후에도 이 세상에 여전히 구원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도, 우리 일상의 온갖 부조리함을 겨우 개 한 마리 빠진 일 정도로 하찮게 여기고 아무도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타인을 위하고 세상을 위하는 십자가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겪어야 하는 일상의 십자가는 너무나 많다고. 예수님께 있어서 십자가는 돌아가실 때 짊어지셨던 그 십자가 단 한 번 뿐이셨지만, 우리는 늘 삶의 무게로 고민해야 하고 남 몰래 울어야 하며,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어디 하소연할 데조차 없어 가슴만 치며 살아가야 하는 등 우리가 겪는 십자가는 셀 수도 없이 많다고. 그렇게 거의 매일 쏟아져 들어오는 십자가들을 어떻게 한결같이 짊어지고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면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 한 번 뿐이었는가? 아니면 예수님도 우리 이상으로 많은 일상의 십자가들과 맞닥뜨리면서도 그것들을 짊어지고 한결같이 하느님의 뒤를 따르셨는지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성서는 예수께서도 얼마나 많은 십자가와 만나셨는지를 잘 보도해 주고 있다:
- 예수님도 그 부모들과 함께 나자렛 벽촌에서 궁핍하게 생활하셨지만 한결같이 성부의 뜻에 따라 사셨으며(마태 2,23), 광야에서 기도하실 때 세 번이나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이를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셨으며(마태 4,1-11),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이사야 예언자가 53,4절에서 말한 대로 “그분은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으며, 지금의 우리야 따뜻한 집이라도 있지만 당시의 예수께서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 8,20)고 말씀하실 정도로 가난의 십자가를 받아들이셨으며, 군중들의 몰이해(마르 5,17)와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시기와 모함(마태 9,11와 루가 5,30)이라는 십자가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위해 받아들이셨다.
- 더더구나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에게 배반을 당하고(마태 26,21), 베드로마저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실(마태 26,69-75)은 당신을 참으로 힘들고 슬프게 한 십자가였을 것이다.
- 그리고 최종적으로 십자가상 죽음의 길을 앞두고도 게세마니에서 연거푸 세 번이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라고 기도하셨던 그 기도는 예수님이 얼마나 한결같이 당신 생애의 모든 십자가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짊어지셨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예수님의 일생은 곧 십자가의 연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거부하지 않고 한결같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짊어지셨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사신 예수님이셨기에 “나는 부활이다”(요한 11,25)라고 말씀하신바와 같이 당신의 삶이 생전에 이미 부활의 삶이 될 수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크리스챤은 그런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뒤따르는 사람들이다...................◆
새벽을 열며
며칠 전, 어떤 형제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형제님께서는 제가 신부라는 사실을 몰랐지요. 제 나이를 물어본 뒤, 이렇게 다시 묻더군요.
“그럼 아이들은 몇 명이나 있나요?”
저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렇게 물어요.
“그럼 결혼은 하셨죠?”
저는 당연히 “결혼 안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분은 이상한 사람이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계속해서 말씀해주십니다.
“아저씨, 결혼은 해도 손해, 안 해도 손해라고 합니다. 기왕 손해 보는 것이면, 남들 다 하는 결혼을 해보는 것이 더 낫지 않겠어요?”
그러면서 저를 계속해서 설득하는 것이었어요. 결혼에 대해서만 계속 말씀하시는 이 형제님의 말을 이제 그만 들으려고 이렇게 말했지요.
“사실 저는 가톨릭 신부입니다. 따라서 저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자 이 분께서는 눈이 커지면서 저를 위아래로 쳐다보시는 것이었어요. 그러면서 아주 신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아니, 정말로 결혼을 하지 않아요? 아저씨는... 아니 신부님이라고 했지요? 그럼 신부님께서는 여자 생각나지 않아요? 독신을 지킨다고 했지만, 그래도 밤에는 몰래 그렇고 그런 곳에 다니시죠? 제가 비밀 지킬 테니까 저한테만 살짝 말해 봐요.”
아무튼 이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재미있기도 했지만, 독신을 지키면서 산다는 것이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는 것일까 라는 의문점을 갖게 되더군요. 아마 가톨릭 신자들은 신부가 독신으로 산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리를 받았고, 신부님은 항상 독신의 삶을 보여주셨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교리를 전혀 받은 적이 없고, 신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 점을 생각하다보니 어쩌면 우리들과 하느님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느님을 알려고 전혀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그래서 성서를 읽지도 않고 기도생활도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우리들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나옵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오자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런데 성서를 읽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이 사실을 알 수 있을까요? 아마 이런 생활을 할 생각은 전혀 시도도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서는 나만 미워한다고 화만 내고 있을 것입니다.
신부의 생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저를 설득시키는 그 형제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나중에는 약간의 짜증까지 생기더군요. 그런데 전혀 주님의 뜻을 간직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보면서 주님께서는 얼마나 짜증이 나실까요?
이제는 주님을 좀 이해하려고 노력 좀 해보자고요.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성서 읽기를 통해서…….
오늘의 독서와 복음 말씀을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어 봅시다.
빠다킹신부
사제직과 십자가
-서현승 신부-
적어도 신학생 시절엔 십자가를 지고 열심히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노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름대로 포기한 것도 많았고, 그래서 하느님께 변명할 말도 많았습니다. 몇 년 전, 어느 선배 신부님과 대화를 하다가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속으로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랬습니다. “나는 성인이 되고 싶습니다.” 분명 신학생 시절엔 나도 그랬었는데, 왜 그 말이 그렇게도 낯설게 들렸을까요? 시간이 지나고, 그동안의 노력들이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면서부터 서서히 포기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선배 신부님의 그 말씀을 듣던 무렵엔 성인이 되는 일은 아예 꿈도 꾸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그분의 순수한 열정에 대한 부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사제직을 지망한 이유가 바로 이 일을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신자들이 그런 노력을 포기하고 있을 때, 체념하지 않도록 용기를 불어 넣어주어야 할 사람이 사제가 아니던가? 그렇습니다. 나약한 자신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내 삶이 아무리 부끄러워도 신자들이 거룩함을 향해 정진하도록 권고하는 일이야말로, 사제로서 오늘 내가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일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김흥주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녀야 할 기본적인 삶의 자세를 분명하게 정해주시는 말씀이다. 성덕은 다른 데 있지 않고 바로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버려야 하고,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버리지 못하거나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외면하고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성덕의 길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싶다면 결코 십자가 없는 그분을 찾지 마시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뜻보다는 먼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자세를 뜻한다. 곧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먼저 찾고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이웃 형제에 대한 실제적인 사랑의 행위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결국 모든 삶의 원칙과 중심을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 두어야 하며, 나 자신보다는 하느님과 이웃 형제에 대한 사랑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다른 이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리고 비우는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십자가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희생이며 사랑의 기본 원리다. 자신을 버리고 비우는 십자가 없이는 자신은 물론 가정과 이웃 형제가 참 기쁨과 행복을 체험할 수 없다. 이렇게 하느님과 이웃 형제를 위해 자신을 비우는 십자가는 자신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 형제 모두를 살리는 길이 된다. 자신을 버릴 때 모두가 함께 사는 구원이 시작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려는 열망에서 기꺼이 자기를 버리고 극기와 희생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 나섰던, 그리고 계속적인 자아 포기의 극기와 작은 희생 중에서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기쁘고 명랑하게 생활했던 아기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을 찾지 않을 때부터 제가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박호준 신부 -
죽기 전에 자기나라에 오는 것을 볼 수 있을까? “지금 이 자리에 죽기 전에 자기나라에 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조만간에 재림 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생각하기도 했었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2000년이 지나도록 재림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짓을 말씀하셨을까? 저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 대답은 재림에 대한 언급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오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을 때 얻게 되는 예수님과의 일치....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 속에 주어지는 일치.... 그것이 죽기 전에 내나라 내 마음속과 삶 속에 그분이 오심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었습니다.
나의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잃을 때 얻게 되는 나라... 예수님과의 일치... 에 대해 묵상하다가 저에게 던져 지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나의 목숨... 나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것이 나에게 있을 까? 였습니다.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것... 저에겐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건 신앙입니다. 그리고 사제직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사제직은... 사랑 없이도 할 수 있고, 지킬 수 있습니다. 사랑이 빠진 상태에서도 성사를 집행 할 수 있고,,, 사랑이 빠진 상태에서도 엄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신앙이 사제직이 사랑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지만... 말도 안 되게도 사랑 없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사제직이란 보편적 의미의 신앙이나 교리적 사제직이 아니라 나 개인의 것 ...나의 이상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저에게 너의 이상을 버릴 수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너의 생명과 바꿀 수 있는 너의 사제직, 신앙을... 너의 욕망,,, 너의 이상을 버릴 때 살 것이며,,, 너의 이상을 나의 뜻보다 앞세울 때 죽을 것이다. 라는 말씀으로 말입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실천한 다는 것.... 그분의 말씀은 늘 이렇게 제 근원부터 흔들어 놓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고개 숙여 말씀드립니다. 아직도 멀었군요...
하느님께서 정하신 일이겠지만... 죽기 전에 그분께서 저의 나라에 오시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도 제 마음대로 생각한 제 이상일까요... 여하튼 매일의 말씀이 그냥 흘러가지 않고 제 삶과 신앙을 깊이 흔드는 것을 볼 때 희망이 있습니다. 가슴은 아프지만...
참 나(True Self: 眞我)를 사는 길
-이수철신부-
아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내 한 목숨일겁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종교는 사람 숫자만큼 많다는 인도의 성자 간디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한분이신 그리스도를 따르지만
사람마다 그 따르는 길은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느 미국인 가족을 초대하여 안내했던 분의 말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그 미국인들은 한국을 좋아하지만 부러워하는 기색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좋아해도 부러워하거나 질투하지 않는 자세,
얼마나 자연스럽고 자유로워 보이는 지요?
자기 삶에 대한 긍지와 내적 확신이 이런 자세를 가능하게 합니다. 같은 그리스도를 따르지만 그 길은 다 다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생명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이 길만이 자기실현의 유일한 길입니다.
거짓 나(False Self)를 버리고
나에게 주어진 운명의 십자가를, 책임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주님을 따름이 목숨을 얻는 길이자 참 내(True Self)가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록 참 내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참 자아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길을 잃어
자기를 잃고 환상에 싸여 거짓 나를 살고 있는지요?
참 나의 상실보다 큰 불행은 없습니다. 참 나를 살 때 진정한 자기실현을 통한 참 행복이요 참 기쁨입니다.
과연 이런 참 나의 충만함을 체험해 본 적이 있는지요?
“불행하도다. 피의 성읍!
온통 거짓뿐이고 노획물로 가득한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다.”
나훔 예언자,
당시의 초강대국인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 대한 불행선언입니다.
바로 니네베가 상징하는 바,
자기를 잃고
허영과 교만, 탐욕의 노예 되어 살아가는 육적인간을 상징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진리의 길은 오직 하나 그리스도뿐입니다. 타인의 삶이나 길을 부러워할 것 없이,
오늘도 거짓 나를 버리고
내 주어진 책임과 운명의 십자가를 잘 지고
주님을 충실히 따라 갈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오늘 우리의 앞길을 환히 밝혀 줍니다.
아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강영구신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그대에게
당신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예수님 시대에 십자가는 잔혹하고 수치스러운 처형 도구였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수치스러운 처형도구였던 십자가가 성당과 예배당을 알리고 장식하는 상징물로, 개인에게는 몸을 치장하는 장신구(裝身具)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십자가를 장식용 상징물이나 장신구쯤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낭패로군요.
사도 바울로는 십자가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에페소 2,16) 바오로의 가르침에 따르면 십자가는 하늘과 땅이 만나고, 너와 내가 만나는 용서와 화해, 평화와 구원의 자리입니다. 그렇지만 십자가는 환희와 기쁨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으로 다가오기에 예수님처럼 하늘의 뜻(天命)을 따르고자 자기를 비우고 버리는 사람이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기쁘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과 십자가를 피하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십자가 짓눌려 망해버리는 사람이 그들입니다. 눈이 열린 사람은 십자가 뒤에 있는 생명과 구원을 보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만 봅니다.
당신의 오늘도 기쁘게 십자가를 지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고생하시는 분들>
-양승국신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권고를 묵상하면서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저는 십자가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 다양한 방식으로 다가온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지니고 살아가는 갖은 결핍들, 결점들, 뜻하지 않았던 사고, 생각만 해도 가슴 미어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사별, 열악한 상황, 가난, 병고, 스트레스, 위기, 관계 안에서 오는 갈등 등.
? 지속적이며, 인간 삶의 한 부분이다. ‘이제 큰 십자가 하나 잘 극복했다’고 안심하는 순간, 어느새 또 다른 십자가가 찾아온다. 삶의 매 순간, 모든 국면에서 수시로 찾아오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 잘만 이해하고 극복하면 인생의 보약이다. 때로 십자가의 무게가 너무 크다 못해 끔찍할 때도 있다. 그러나 십자가가 주는 의미를 잘 깨닫고 끝까지 잘 견뎠을 때 찾아오는 기쁨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영적성장의 가장 큰 도구이다. 우리 인생이 한 걸음 크게 나아가기 위해 가장 좋은 특효약이다.
그래서 결국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할 모습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각의 긍정화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부정적인 시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도록 하면 좋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시각은 불필요한 십자가를 양산할 뿐입니다. 십자가, 그 자체가 주는 괴로움에 집착하기보다는 십자가가 뜻하는 의미, 해결방안, 기능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십자가는 인생의 한 부분임을 명심하십시오. 십자가는 분명 우리 인생의 한 부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의미한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 없는 인생을 기대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기대일 뿐입니다. 십자가 없기를 바란다는 것은 밥을 먹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 십자가가 좀 가벼워졌을 때 이웃들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십자가로 인해 너무나 힘들고 괴로워한다면 그 십자가를 나누어지려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내시는 하느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십자가가 너무도 힘겨울 때 마다 십자가를 보내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살리시려고 또 구원하시려고 노심초사하시며 애쓰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관계에서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신과 맺은 계약을 깨뜨리고 배신하며 언제나 옆길로 새는 불충실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십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 백성을 당신께로 돌아서게 하시려는 한 방편으로 십자가를 보내십니다.
십자가를 보내시는 하느님의 마음 한 가운데는 우리 인간들을 향한 그분의 열렬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그 사랑의 표현으로 십자가를 보내십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십자가는 우리 죄인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십자가는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가장 강도가 센 애정표현입니다.
오늘 등에 얹힌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고생하시는 분들, 주님께서 주시는 아래의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겪는 시련은 모두 인간이 감당해낼 수 있는 시련들입니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1 고린 10, 12-13).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1 고린 1,18; 23).
† 예수 추종의 길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다루었던 '베드로의 고백'과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에 이어 '예수 추종의 길'과 '종말의 시기에 관한 단절어'가 이어집니다. 특히 '예수 추종의 길'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을 따르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인데, 제자가 스승을 따르는 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있으나 스승을 가장 잘 따르는 방법은 스승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가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을 통하여 주어진 베드로의 고민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수난의 길을 가셨고, 자기 목숨을 내어놓음으로써 오히려 목숨을 얻어 생명의 주인이 되셨듯이, 예수님의 제자도 똑같은 방법으로 스승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당장 자신을 버리고, 목숨을 내어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데, 왜냐하면 자아를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자아를 긍정하는 것이고, 목숨을 버리는 것은 목숨을 더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긍정과 사랑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론)과 모범(실천)에 질서 지워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요구를 글자그대로 따를 수도 있지만, 그 어느 것도 극단적인 방법은 옳지 않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존중하며, 자연과 생명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아무튼 예수께 대한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이 있은 후,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에게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고 십자가 추종에의 초대를 선포하십니다. 수난예고는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함께 공관복음 모두가 보도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의 도입부 역할을 하는데,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이 메시아이자 야훼의 종인 당신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내다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배척과 고난과 죽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다 이루어지면 반드시 부활이 그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함께 내다보고 계십니다. 부활을 향한 그 날까지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들을 위해 스승은 서서히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있는 것이며, 첫 번째 수난예고와 함께 예수께서는 제자들 또한 스승의 길을 그대로 따라오기를 원하시면서 추종의 기준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추종의 기준을 보면,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고,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자기 목숨을 살리려 하는 자는 오히려 잃고, 잃는 사람은 되려 얻는다는 것인데,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일방적인 자기비하나 겸손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 모든 '자기를 버림과 잃음'은 철저히 예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예수를 위하여, 그리고 예수 옆에 머물기 위해 자신의 명예와 삶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자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하는데, 그분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것은 하느님 때문에 내어놓는 것이며, 이는 곧 하느님께서 죽어갈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예수께서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명이 죽음을 이길 수 있도록 생명을 죽음에 부치시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오늘 스승이 제자들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닙니다. 스승이 앞으로 당해야 한다는 일도 그렇고, 그런 달갑지 않은 일을 대비하도록 제시하는 추종의 기준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통상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지지와 따름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는데, 이 경우 약속된 보상은 거의 달콤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때로는 목숨까지 내어놓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진데, 한가지 다른 것은 약속의 내용입니다. 즉, 예수라는 스승이 자기 제자들에게 약속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함께 죽자는 것입니다. 사실은 죽음 후에 주어질 부활이 함께 약속되었지만 아직 제자들이 부활을 깨닫기는 멀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생명이 죽음을 이기는 법칙을 말씀하시는데, 쉽게 말하면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는 법칙입니다.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 예수를 위하여 생명을 잃음으로써 얻는 것, 이는 게임과도 같은 것이며 하나의 내기와도 같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게임 같지만 이기면 온 세상을 얻는 것보다 더 소중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십자가의 추종에는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도 초대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마지막까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버릴 때, 진실로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며, 예수님만이 줄 수 있는 기쁨 안에 머무를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뒤를 따르려면>
-유광수 신부-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새로운 제안을 하신다. 이것은 하나의 제안이지 강요가 아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는 사람에게는" 제안이 아니라 강요이고 반드시 실천해야할 의무이다.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방법이고 길이다. 즉 "나를 따라야 한다."는 의무이지 "나를 따라도 좋다. 또는 나를 따르면 좋겠다."는 권고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의무요,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내 뒤를 따르려는 사람"이란 새로운 출애급을 하려는 사람이다. 즉 자기를 따르는 삶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제시하신 새로운 길을 걸으려는 사람이다. 나 중심으로 하는 삶에서 "예수"라는 분을 중심으로 하고 나는 다만 그분을 따라가는 삶으로 바꾸겠다는 사람이다. 나를 추종하는 삶에서 예수를 추종하는 삶으로, 나를 섬기는 삶에서 예수님을 섬기는 삶으로 살으려는 사람이다.
내 욕망을 채우는 삶에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선적으로 하는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겠다는 사람이다. 이제부터 내 인생에서 예수님을 마치 "낮에는 어김없이 구름기둥으로 앞길을 인도하여 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 길을 비추어 주시는 분"(느헤 9, 19)으로 섬기며 살겠다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 뒤를 따르는 사람"의 삶이란 새로운 출애급이다. 무슨 출애급인가? "나"에서 "예수님"이라는 낮선 곳으로의 출애급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사용했던 모든 생활 필수품들, 집, 일터를 버리고, 모세라는 새로운 지도자를 따라 하느님이 인도하시는 가나안 땅을 향해 갔듯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신앙인들은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새로운 모세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출애급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출애급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한 조건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이다.
그럼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급급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찾아다녔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이의 것을 앗아왔다. 그래서 다른 이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고,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언제나 어디에서나 자신을 내세워야 했고,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그렇게 하는 모든 행동들은 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우리 모두는 너 나 할 것 없이 다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다. 이런 모습은 본래의 나의 모습이 아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나의 욕망이 만들어낸 거짓 자아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 동안 참 자아로 살지 않고 거짓 자아로 살아왔다. 그래서 점점 더 하느님으로부터 또 참된 자기 모습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이렇게 하느님과 참된 자아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하는 욕망 즉 거짓 자아를 버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따르는 것이요, 거짓 자아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 동안 거짓자아인 자기 욕망을 좇아 살았기 때문에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계속해서 거짓 자아를 만들어 가는 나의 욕망은 이미 자기 자신과 동일시 되어버렸다. 즉 자기 신체의 일부분 또는 자기 신체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즉 자기 욕망을 실현시켜나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요, 삶의 의미가 되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일종의 죽음이다.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과 같이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무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은 매순간 자기의 거짓 욕망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은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취하라는 말이다. 이미 자기 자신이 노예가 되어 있는 거짓 욕망을 버린다는 것 자체는 이미 하나의 커다란 십자가이다.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는 반드시 지고 가야할 십자가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나의 십자가를 대신 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를 자기 혼자 지고 가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를 탈출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까지 홀로 가야했다면 아마 그들은 거의 대부분 에집트로 돌아갔던지 아니면 광야에서 배고파 죽고 목말라 죽고 외롭고 고통스러워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훼 하느님은 그들의 십자가를 그들에게 모두 지우지 않으시고 그들의 인도자 모세를 앞 장 서서 그들을 인도하게 하시고 "낮에는 어김없이 구름기둥으로 앞 길을 인도하여 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 길을 비추어 주셨다."(느헤 9,19)
이처럼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셨지만 그 십자가를 그들에게만 지게하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동반해주셨고 거들어 주셨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다. 나의 십자가이지만 나 혼자 그 십자가를 지고 가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 약하다는 것을 예수님도 잘 아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라."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동반해주시고 그들을 인도하셨던 것처럼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주님이 앞장 서 서 나를 인도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겠다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것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항상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점 점 더 이기주의가 된다. 점점 더 이기주의가 된다는 것은 점점 더 욕망이 커지고 따라서 거짓자아가 더 크게 자리잡아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자기 자신 안에 갇혀버리고 자기 목숨을 잃어버릴 것이다. 반면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거짓 자아를 버리고 반대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완전한 사랑의 행위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이요, 영원히 사는 길이다.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요한 13, 35. 15, 17)라고 말씀하신 대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랑의 삶을 사는 이는 이미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사는 것이다.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생명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따라서 선물을 선물로 남에게 베푸는 사람만이 또한 더 많은 선물을 받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
|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