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6]<검정 고무신>-그때는 왜 그랬을까?
광양에서 꾀복쟁이 친구가 초등학교동창모임(두 달에 한번)에 참석하는 길, 우리집에 들렀다. 자갈마당에서 편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검정고무신을 신고 있는 나를 보고 킥킥 웃었다. 왜 웃냐?니까 대학시절 내 모습이 생각나서란다. 내 모습이 어땠길레? 나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기억하는 내 모습을 보라. 원치 않은 대학 1년(원광대 영어교육과 76학번)을 다니면서 일단 복장부터 별나게 하고 다녔다. 1학기는 완전 장발로, 2학기는 완전 배코(스님같은 빡빡머리)로, 위아래는 군복을 검정색으로 물들인 ‘스모루’(전주 남부시장에서 팔았는데, 가장 쌌다. 두 벌을 사 너무 더러우면 바꿔입었다)로, 게다가 검정고무신을 질질 끌고 다녔으니, 완전 미친 넘 행색이었다. 빡빡머리에는 어디에서 구했는지 공수부대들이 쓰는 검정 베레모까지 눌러썼겠다. 완전히 '오 마이 갓' 목불인견이었던 것을. 친구는 그 모습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앨범을 뒤지니 스모루 입고 산행한 사진이 딱 한 장 있었다. 친구는 ‘블랙 슈퍼 맨BSM’이라는 별명까지도 잊지 않고 있었다(이 별명은 1주일인가 35사단 입영훈련을 받으러 갈 때 같은 과 여학생이 ‘잘 마치고 오라’며 써준 쪽지글에서 유래됐다) .
그땐 왜 그랬을까? 긴급조치가 마구 발령되는 엄혹한 정국에 항거하는 체제 반항차원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거리의 철학자’ 흉내를 낸 것일까? 지금 생각해보니, 대학이고 뭐고 다 싫었다. 그냥 고향에서 아버지와 함께 농사나 짓고 싶었는데, 완강한 반대로 벽에 부딪쳐 ‘에이- 뙤똥하게(유별나게) 살아보자’는 마음의 발로였던 것같다. 아무튼 그 친구와는 인연이 깊다. 초등학교(국민핵교) 시절 억세게도 많이 싸웠다. 한번은 지푸라기 더미에 돌맹이를 숨겨 던지는 바람에 코피가 나는 바람에, 나는 일단 싸움에서 졌다. 할머니가 “연안김씨들은 독하니까, 다시는 그 친구와 놀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26살때 연애를 한 게 마침 연안김씨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아내가 당시의 나를 봤으면 기절초풍은 불문가지. 사귄다는 것은 어림반푼어치도 없었을 것이다. 흐흐. 친구 여동생을 자빠뜨리다니 나는 우멍한(속이 시커먼) 놈이 틀림없다. 나는 할머니가 당부한 세 가지를 살면서 하나도 지키지 못한 불효손자였다. 첫째, 연안 김씨와 놀지 말라고 했는데, 지금도 막역한 친구로 지내고 있다(좋은 친구). 둘째, 아내에게 팔베개를 해주지 말라고 했는데, 어쩌다 동침을 하면 여지없이 팔베개를 해준다(할머니가 이유를 알려주지 않아 나는 지금도 까닭을 모른다). 셋째, 개고기는 죽어도 먹지 말라 했는데(할머니는 마이산 탑사 50년 신자였다), 직장생활 하면서 어쩔 수 없이 10번도 더 먹었다(워낙 금기사항이어서 처음 먹은 다음날 무지막지한 설사를 했다).
아무튼, 나의 초·중·고·대학 시절의 내 모습이나 나와 얽힌 추억을 말해주는 친구가 많다는 것은 복받은 일임에 틀림없다. 그 친구들 덕분에 내 전반기 인생퍼즐이 지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내가 무협지를 수백 권 읽었다고 기억하는 친구도 있다). 그 친구의 집 근처 선술집 이름이 <검정 고무신>이어서 그 집을 지날 때마다 내 생각(나의 대학 1학년때의 모습)이 나 피식 웃는다고 했다. 언젠가 그 집에 함 같이 들러야겠다. 귀향한 지 5년, 나는 지금도 검정 고무신을 자주 신고 다닌다. 검정 고무신은 때도 잘 타지 않고, 무엇보다 참 편하다. 진짜 농사꾼에 맞춤한 신발이다. 읍내를 갈 때에도 검정 고무신을 그냥 신고 간다. 누가 뭐라할 사람은 1도 없다. 흰 고무신은 때를 너무 잘 타 싫다. 친구의 추억 덕분에 ‘검정 고무신’을 새삼 굽어다보면서 옛 생각에 살풋 잠겼다.
문제는 그때 왜 그렇게 다녔을까? 동냥아치도 아니면서, 그 이유를 지금도 모르겠다. 겨울 에는 더욱 가관인 것이 추우니까 군인들이 입는 야전잠바를 어디에서 구해 입고 다녔다. 그 주머니에 큼직한 사각 성냥통까지 다니니 친구들이 ‘개똥철학자가 따로 없다’며 웃어댔다. 미친 놈이라고 속으로 경멸한 친구들도 많았을 것이다. 당시는 <청자> 담배가 유행했는데, 사각 성냥통으로 불을 부치면 멋있게 느껴졌다. 더구나 장발로 다닐 때에도 머리를 1주일에 한번 감을까말까 했으니, 좋아하는 여학생도 없었지만, 혹시 있었다해도 넌덜이를 냈을 것이다. 이빨을 열흘에 한번이나 닦았을까? 아무튼, 그렇게 1년을 마치고 서울 편입학에 ‘성공’해 상경을 했다. 3년 동안은 ‘수왁한 촌놈’이어서 얌전한 모범생처럼 다녔다. 머리 깎는 것을 지독히 싫어해 어깨까지 길게 늘어지게 길렀으니, 이건 또 무슨 수작이었던가. 당시는 장발 단속이 심했을 때였다. 오죽했으면 <바보들의 행진>이란 영화에서 장발 단속에 쫓겨 도망다니는 대학생들을 그렸을까. 80년 졸업 후 군대 입대 하루 전 그 긴 머리를 삭발하는데 눈물이 났었다. 머리를 깎기 전 양복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용케 한 장이 남아 있다.
지(자기)가 무슨 철학자나 되는 듯, 스모루를 입고 머리를 다리 밑으로 넣고 땅을 향해 찍은 ‘거꾸로 사진’이 있었는데, 언젠가 너무 쪽팔린 것같아 찢어버린 기억도 있다. 하지만, 여름철에는 모시옷과 삼베바지를 입고 도사처럼 활보도 했다. 그 시절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나는 모른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애처로운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때가 아니었으면 언제 그렇게 ‘괴짜’로 살아볼 수 있었을까? 고향 친구 덕분에 20대 초반 나의 모습을 반추해본 오늘도 이렇게 흐르고 있다. 나는 밤늦게 먼 길을 운전해 가는 친구에게 마늘 30여통과 양파 몇 개 그리고 말린 새우 두 컵을 주었을 뿐이다. 운전 조심해 잘 가라! 또 곧 만나자. 좋은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