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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실종 / 최영미
오전과 오후 사이
점심시간에만 자유로운 너는
사이 같은 시만 쓴다
변비 걸린 화장식처럼 되다 만 가락만 뽑는다
오전의 긴장과 기대, 오후로 건너뛰지 못해
저녁의 피곤과 반성, 아침으로 갈아타지 못해
불어터진 우동처럼 너의 분노와 좌절
어느새 그릇을 가득 채우고
넘칠 듯 폭발할 듯, 그러다 말 듯
눈치만 삼키다 술술, 오그라든다
말과 말 사이, 한가닥도 걸치지 못해
머리와 가슴 사이, 한계단 화해의 불 지피지 못해
미적지근,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국물만 남긴다
훌훌 먹히고 만다
싸워야지
낡은 수법으로 새롭게 길들이려는 손들에 맞서
싸워야지, 다짐해도
알량한 점심값 걱정을 하며 국수집 우동 앞에서
또 한번 살뜰이 오그라드는
오전과 오후 사이
폭삭,
주저앉는다
실종 / 한용국
누워 있는 남자의 입으로 공기가 밀려 들어간다 느릿느릿 기다려왔다는 듯이 열린 식도를 통과해 간다 곧 저 공기는 남자의 꼬리뼈에서 마지막 흔적을 밀어내리라 남겨질 한 줌의 질척함을 비둘기가 안다는 듯 고개 주억거리며 지나간다 십분 전 그는 마지막 담배를 피웠으리라 손끝이 다 타들어갈 때쯤 모든 회한과 환멸을 떨어뜨리고 수도승처럼 신문지 위에 누웠으리 그의 잠을 깨우던 굉음이 떠나가고 세상이 그를 정적 속으로 초대한 것이다 한때 그를 빛나게 했던 꿈의 이마는 꼬깃꼬깃 접혀 있다 어쩌면 저녁거리의 불빛들이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을까 하지만 모로 누워 웅크린 자세는 무언가 단단히 그러쥔 손아귀처럼 보이는데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안식을 단 한 번의 눈길로 스치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왜 이 소리 없는 잔혹 앞에서야 모든 궁극적인 질문은 보편성을 얻는가 공기가 지나간 그의 몸을 얼룩진 신문의 활자들이 더듬더듬 읽으며 덮어주고 있다
― 2003년 『문학사상』신인상 수상작
실종 / 이민하
광장의 벽에 부딪혀 새들은 추락했다.
목 잘린 새들이 광장을 덮었고
숨바꼭질하던 아이들이 갈기갈기
찢어진 날개 속에 실종됐다.
한복판에 서 있던
시계탑은 화석처럼 멈추었고
두 개의 칼이 시곗바늘처럼 꽂혀 있었다.
엄마들은 요리를 멈추고
구름은 산책을 멈추고
아이들의 행방을 찾아 나섰다.
허공에서 만나 칼을 뽑고
서로의 손가락을 꽂아 시계를 돌렸다.
바람의 보풀도 없이 어둠만 깔리는
검은 합창의 시간.
식탁과 침대가 거리의 전당포에 버려졌다.
압류된 목소리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불멸의 전염병이 되었다.
실종 / 신동혁
아침에 엎지른 꽃병이 언덕이 되었다 지금은 언덕 위로 눈이 내린다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 맨발이다 내게 길을 묻는다 너머에는 무엇이 있나요 신발가게가 있습니다 나는 뒤꿈치를 바느질하며 대답한다
오후에는 몇 개의 꽃병을 더 엎지른다 꽃은 없지만 언덕이 생겨 두근거리는 겨울 너희는 어쩜 이렇게 아름답니 창밖은 뒤꿈치처럼 빛나고 바늘을 쥐면 죽은 사람의 신발이 보인다 그것들을 안고 언덕을 올라가야지 언덕 위로 눈이 쌓이고
가끔은 안부전화가 걸려온다 나는 지금 맨발이라고 말한다 언덕 위에 서 있다고 이곳에 너무 많은 언덕이 생겼다고 언덕을 옮기는 게 좋겠어 언덕을 옮기는 게 좋겠어 맨발로 말한다 그곳에 꽃을 묻고 전화기를 묻고 어느 날부터 조금씩 얼굴을 묻어두고 온다고 말한다 매일 아침 신발을 팔아 꽃병을 산다고 고백한다 내가 부서진 언덕마다 눈사람이 서 있다
⸺계간 《문파》 2018년 겨울호
곤줄박이 수사일지 / 이혜순
도로 위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
신원미상의 죽음을 놓고 햇빛들만 모여 웅성거렸다
바퀴자국이 비껴간 자리
한 줌의 어둠이 고여 있었다
날개가 꺾여있는 걸로 보아 자살로 단정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타살로 볼 수도 없었다
높새바람이 주변 새둥지들을 일일이 수색해 봤지만
그럴 만한 알리바이는 없었다
플라타너스에 사는 까치 부부도
그날 밤 수상한 기척을 느끼거나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하루해가 다 가도록 죽은 새를 찾는 보호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실종신고도 접수되지 않았다
바람만 뻔질나게 현장을 들락거렸다
조사 결과 곤줄박이라는 판정이 내려졌지만
어떻게, 왜 이곳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도로와 맞닿은 야산 어딘가에서
혼자 둥지를 빠져나와 길을 잃고 헤매다
실족사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죽음은 아무것도 쉽게 보여주지 않았다
머리칼의 행방 / 한정원
슬픔을 가진 몸은 곤충이 되어
베개 밑에 숨어있다
긴 목을 빼고 밤새 기어 들어가
겨울잠을 자는 동물을 닮아간다
짚신벌레의 다리를 모두 잘라버리고
휘어진 허리, 꼬리를 들고 엎드려있는
머리칼은 무거워서 언제나 바닥으로 침잠한다
목을 감고 누워 있는 문 틈 사이의 기록들
검은 뼈와 검은 피로
수만 가닥의 실을 뽑아내고
천장에서 바닥까지 꿈틀꿈틀
장롱 뒤쪽에서 집의 내력을 발설하고 있다
단면을 자를 수 없는 머리칼
단면을 볼 수 없는 머리의 털
털의 시퍼런 날
아라비아의 마녀가 꿈꾸다 남기고 간
낙타의 속눈썹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며
머리 위의 풀밭을 키우는 벙커 같은 곳
어깨가 없었다면 머리칼은 어디에 안장을 놓고
첫발을 내디뎠을지
누구에게 다가가 달라붙는 가느다란 꽃잎이 되었을지
출렁이거나 찰랑이거나
물의 소리를 갖고 있는 머리칼의 파도
비의 숨결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의 비늘들
밤새 키가 자라서 발끝 해안까지 밀려가 닿는
허리 굽은 곤충의 사계절을 따라간다
밟히고 잘리고 구부러지고 비명을 지르는
햇볕 아래서 누렇게 타들어가는
슬픈 볏짚의 냄새
끝내 발화하지 못하고 목이 감긴 채
철사처럼 녹슬어가는
암회색 성체의 비밀문서를 감추고 있는 갈피들
—《현대시학》2016년 10월호
거미의 행방 / 김유석
내 방에 유령이 있다.
낡은 사진들과 도금이 벗겨진 벽시계 사이
미소 띤 젊은 날의 얼굴과 멈춘 시간이
비긋이 걸린 구석
상형문자처럼, 검은 실밥으로 뜬 저 표지(標識)는
형체를 드러내지 않고 존재의 느낌을 거느리는 것의 정체
유치하게 커튼을 흔든다거나
공연히 전등을 켰다 껐다 하는 시시한 자작극은 치워라
열려진 감옥인데 달아나지 못하는 기분일 뿐인
색 바랜 사진 속에
첫사랑처럼 하고 싶은 얼굴이 있다.
흔적이 묻는 발을 사진 밖으로 감추고
생각을 털어내듯 무늬처럼 웃는 젊음이
잠자는 시계를 바라보고 있다.
멈춰진 시간은 미소 끝에서 그가 출몰하는 시간
감정과 욕망과, 뻔한 것들로는
겨우 21그램의 무게*를 가진 그를 불러 낼 순 없지만
차갑고 푸르스름하게 또 한 해가 닫히는 밤, 문득
커다란 자루를 메고 세상 밖으로 나서는 수사(修士)를 본다.
오래 전 죽은 채로 나를 감시해 온 독재자
바늘이 돌고, 점점 빠르게
사진이 늙는다.
사몽(似夢)과 비몽(非夢) 사이
이상과 허영이 모처럼 내통하는 쭈글쭈글한 잠 속
여전히 슬근거리는 것이 있다.
거미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다.
———
* Duncan Macddougal 박사가 실험한 영혼의 무게
분홍색의 행방 / 박정남
작은 분홍색 알약을 먹는 가을 아침에
분홍색은 아프다
분홍색 하늘을 나는 나비들이 하나 둘
자개 껍질처럼 쪼개지며 날개를
파닥이고 있다
아득히 하늘에 떠 있다
가을에 분홍색은 구석으로 구석으로
몰리고 있다
대빗자루로 쓸어간 가을의
그 넓은 뜰에는 분홍 꽃잎 한 장
떨어져 있지 않다
쇠약해진 분홍색들이
병원에 가니 푸른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누워 있었다
행방 / 이영옥
어디에서 날아 왔는지
꽃잎 한 장이 방충망에 붙어 어깨를 떨고 있다
아무도 없는 여기서 한참이나 울었던 것 같다
저 슬픔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읽던 책 속으로 다시 시선을 내리는데
아까보다는 조금 더 위쪽으로 자리를 옮겨
눈물을 찍어대고 있다
꽃이 고운 제 빛깔을 거두며 어두워지려할 때
옆에서 아무도 다독여 준 이가 없었구나
이쪽 철망에 걸러진 삶이
저쪽 철망으로 몸을 끼워 보지만
세상은 빈틈없이 촘촘한 봄날이었다
시인 이솝씨의 행방 1 / 이홍섭
나무들이 허공 속으로 양팔을 쭉 뻗어올리자
후두둑 단추들이 떨어진다. 겨울이 들켜버리는
순간이다. 갑자기 양파 속처럼 눈이 시려온다
몸이 무거워진 것일까. 한 발을 떼어놓을 때마다
보도블록 한 장씩이 달라붙는다. 오래 전에 버린 질문처럼
안간힘을 다해 척척 달라붙는다
어쩌면 내 기억은 잘못 익은 유산균 음료 같은
것인지도 몰라. 그 속에 가느다란 빨대나 처박고 사는
나는 병든 짐승인지도 몰라. 빨대를 냅다 던져버리고 달아나면?
날아가는 새들의 발이 보인다. 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보도블록 한 장씩을 양발에 꿰차고 바람을
거슬러올라간다. 그들이 불끈불끈 솟아올랐음을
나는 안다. 그들은 어느 숲속에다 저들의 길을 내고 있는
것일까
여기저기서 나무들이 양팔을 뻗어올린다. 저들의
뿌리는 너무 깊게 박혀 있다. 벌받는 아이처럼
손을 올릴 때마다 후두둑 단추들이 떨어진다. 단추들을
주워들고 걷기 시작한다. 버릴 데가 없다
실종된 봄 외 1편 / 김영은
- 2009년 4월 월계동 텃밭 살인사건
텃밭에 몸통을 구겨 넣은 사내 발가벗은 몸이 토란잎 덮고 있었네 두 손이 허공을 말아 쥐고 있었네 잠귀 밝은 시어머니는 찜질방 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남편은 백구와 누렁이 짖는 소리 듣지 못했다하네
노란 줄 걸린 현장에 봄이 출입 금지 당했네 키 작은 시금치는 잠에 빠져 있었다고 도리질 하고 부추는 산바람에 실려 온 비명을 설핏 들었다하네 얼결에 잠이 깬 텃밭 묵비권을 행사했네 남자의 얼굴엔 피다만 개나리꽃 수북했네
성북역 CCTV에 앵벌이 하는 봄이 자주 찍혔다는데, 나이키가 그 봄을 짓밟았다 하네 옆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주검이 된 봄, 역한 냄새가 난다는 이유만으로 코뼈가 부러지고 장파열이 됐다네 집 나온 지 삼년이 되었다는 봄의 이름은 노숙자라네
수사관의 예감은 정확 했다네 토란 입 혀가 꼬이고 말이 얽힐 때 거짓을 탐지하다 의심 한 꼭지를 툭 땄다고 하네 범인은 십대, 철이 없는 잔인한 봄이었다네
그 남자 죽어서도 역한 냄새 떼어내지 못했다네
김영은 시인
다시올문학 발행인
도서출판 다시올 대표
실종 / 박해람
세상에, 세상에 이렇게 많은 틈이 있다니!
오로지 사라지는 곳은, 사라질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 뿐 이라고 믿어 왔는데
세상의 모든 틈에게
경배하는 날이 있을 줄이야
도대체 어느 쪽으로
발길의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
수없이 많은 곳을 기웃거리는 저,
마음들을 어떻게 불러모아야 하는지
어느새, 어느새에 숨어 있는지
바람에 날리는 전단지
전봇대에 붙어 자기 자신을 찾고 있는 내용들이라니
모든 흔적들에게 애원하는 날들이라니
목적지가 없는 실종이라니
실종이란 말속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또 얼마나 존재하는 것인지
그 어떤 교통편으로도
방문할 수 없는 地名이 있다니
마음에 눈 붙여 놓고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지명이라니
목숨 붙어 있는 이 끔찍한 죽음이라니.
계간(시와세계) 2005. 봄호
실종 / 김희준[1994. 9. 10 ~ 2020. 7. 24]
사과꽃이 폈습니다 예쁜 걸 보면 마음이 험해지는 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흰꽃을 두고 험하게 울고 있네요 지나치기엔 애틋하고 사랑이라기엔 서사가 없습니다 언제 이렇게 되었나요 나는 무엇도 되지 못했습니다 시시한 어른일까요 철물점 앞에는 늙은 개가 묶여있어요 개를 갈라보면 나사 몇 개가 내장에 박혀있을 거예요 개의 눈물선은 기름이 그려둔 예쁜 것입니다 남자가 철제선풍기를 안고 옵니다 자전거를 먼저 팔아야겠지만요 남자의 입술이 개의 고환과 비슷합니다 세상 소용없는 것입니다 험해지지도 않고요 그러나 놀랍습니다 울고 있어요 나, 매번 이유를 달리합니다 만약 흰꽃 떨어지는 사과나무라면 염세적인 식물이 되겠습니다 철물점에 묶어두겠어요 못을 삼키겠어요 사과를 미워하겠습니다 나비에게 매몰찬 말을 하겠어요 당신의 그늘을 망가뜨리겠어요 잎사귀를 끊어내겠어요 정오를 한곳에 쥐고 있겠어요 초를 불면서 썩은 사과꽃을 되뇌겠어요 우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바꾼 번호로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나는 홍서현이 아닙니다 4월은 내 생일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마음이 험해집니다 당신에게 떨어지는 꽃잎을 개연율 삼으면 안 될까요 유골을 어디서 찾아보는 것이 좋겠습니까 개가 혀를 내밀고 땅을 팝니다 발굴을 기다리는 홍서현이 되어봅니다
안전 안내문자 / 마경덕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찾아오는 낯선 이름들
한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을 찾아달라는 간절한 부탁이
난감하다
이름 나이 성별 키 몸무게 옷차림
실종된 날짜가 휴대폰에 뜬다
짝짝이 신발을 신고 기억을 벗어두고 나간
사람들은 집을 두고 어디에서 무엇을 할까
흘깃 보고 삭제되는 실종자들
짧은 연민이 다녀간 빈자리에 다시 날아와 자리를 잡는
넘치고 넘치는 사건들
검지손가락이 잠시 망설인다
어느 퇴직 형사는
범인들을 잡고 보니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집을 잃고 어둠 속을 떠돈다는 건
세상천지 외톨이가 맨손으로 칼날을 움켜쥐는 일
기억을 실종한 낙엽 한 장
철지난 얇은 옷을 입고 벌벌 떨며
망망대해를 표류 중이라고
물속 깊이 가라앉기 전 안전하게 집으로 보내달라고
부고보다 더 쓸쓸한 문자가 낯선 나에게 손을 내민다
『동행문학』 2022. 창간호
실종되다/ 고정현
삶을 강제하는 시간이
강한 바람 되어 나를 밀고
환경은 홍수에 잠겨
나를 허우적거리게 하는 동안
시상의 도로가 끊어지고
시심의 산허리가 붕괴되며
시어가 급류에 휩쓸려갔다
마음을 다독여 안정시켜
복구하고 회복하며
되찾아야 하는데
이미 상실된 것들이
원래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
다시 정비하고 정돈하여
새로움으로 다듬을 수밖에
내게 시간이 필요하다
행방불명行方不明 / 하순명
오 원 권 지폐가 집을 나서면 미아가 된단다
한국은행 발표에 의하면 은행을 떠난 돈이 돌아오는 확률은
천 원 권 ,만 원 권은 70퍼센트
오만 원 권은 30퍼센트도 귀가하지 않는단다
한때 후미진 산 아래 콩밭 깊이깊이
신사임당 여러 분이 대피 중이셨고
007가방 사과궤짝 속에
헤아릴 수 없는 신사임당이 은신 중이라고 한다
누구든지
신사임당을 바라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다
하지만 한 뼘도 안 되는 손때 절은 종잇장 위에서
묵포도도墨葡萄圖 곁에 가체를 틀어 올린
둥그런 얼굴은 고요하기만 하다
사계절 내내
오죽헌 뜰에서는 풀벌레가 날고 매와 난이 화선지 위에 몸을 푼다
그 시대
그림과 글씨와 글을 닦은
조신한 조선 여인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보도에
어찌된 일이냐고 찾아가 묻고 싶어진다
시집『산도』2015. 신세림출판사
물음의 행방 / 오성일
구멍난 양말의 그 땐 세상이 얼마나 궁금했던지
궁금한 발가락들은 양말 속에서 얼마나 쉬지 않고 꼬물거렸던지
그 꼬물거리는 분홍의 물음표들 얼마나 당돌했던지
진흙탕 속에선 또 그 발가락들 얼마나 신이 났던지
양말은 얼마나 흔쾌히 구멍을 열어 발가락 말문을 터주었던지
그, 물음이 붐비는 진흙탕은 얼마나 조마조마 살맛이 났던지
그랬던 아슬아슬한 흙맛, 살맛 지금 어디 있는지
내 발가락들은 어디쯤에서 꼬물거림을 멈추었는지
세상은 점점 더 진흙탕이 되었는데
발가락은 왜 더 이상 묻지 않는지, 말문을 닫고 사는지
구멍난 우리들의 양말은 어디 갔는지
시집 『사이와 간격』2017. 북인....
2022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인주 묻은 태양의 행방 / 김종태
뉴타운 소문을 태우고 마을버스가 들어왔다
미숫가루처럼 흙먼지만 내려놓고 폐교를 한 바퀴 돌더니
제비처럼 고샅길을 빠져나갔다
언젠가부터 절개지 묵정밭엔 어린 의혹들이 심겨지기 시작했다 깨진 항아리 속에 갇혀있던 뻐꾸기 소리에 둔덕 까마중 몇, 복부인 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귀고리를 흔든다 전과자인양 담장 안을 기웃거리던 햇살, 굴다리 밑으로 잠입하고 배 밭으로 달려간 그림자 하나가 이른 아침부터 풍선 불 듯 바람의 평수를 후후- 부풀린다
두부장수 확성기에 귀를 열던 도토리들 일제히 상수리나무를 버린다 선거벽보 어지럽게 붙어있는 축대 아래, 사방치기 놀이를 하던 아이들 오후가 오랜만에 찾아온 밀짚모자 주위로 몰려든다
뻥튀기 소리에 놀란 해바라기, 발밑에 검은 태양들을 투투둑- 파종하고 늦게 외출한 채송화는 발뒤꿈치를 높이 꺼내 분꽃의 망설임을 흔든다 태양이 시작되면 빨간 인주통이 열렸다 몇 평 봄이 처분되는 계약서 그 끝, 마을경로당에선 코스모스와 금잔화가 형광빛 포스트잇처럼 끝도 없이 유예되고 있었다
이장 집 옆 모과나무가 늙은 귀띔이라도 들은 걸까 오래된 우물 속에다 노란 주먹을 툭툭 박았다 내가 헐값에 처분했던 그 시절 변두리 네온사인과 외딴집에 세를 든 귀뚜라미의 지하 방엔 오래도록 해가 들지 않았다 지난밤 거처를 잃은 두견새와 갑작스레 약수터에서 쫓겨난 달빛은 창문 틈에 허리가 끼어 아침까지 웅웅거렸다
누가 분실한 것일까
공사 중인 안테나처럼 힘껏 꼬리를 세운 고양이 한 마리
방금 눌러 찍은 붉은 태양이 채 마르지도 않은 부동산 계약서를 입에 물고서
인적 드문 논밭을 검은 천 조각처럼 가로질러 어디론가 재빨리 구겨지고 있다
2019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경운기를 부검하다 / 임은주
그는 차디찬 쇳덩이로 돌아갔다
움직이지 못할 때의 무게는 더 큰 허공이다
돌발적인 사건을 끌고 온 아침의 얼굴이 퀭하다
피를 묻힌 장갑이 단서를 찾고 일순 열손가락이 긴장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망치와 드릴이 달려들어
서둘러 몸을 빠져나간 속도를 심문한다
평생 기름밥을 먹은 늙은 부검의 앞에 놓인 식은 몸을
날이 선 늦가을 바람과 졸음이 각을 뜨는 순간,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진흙탕과 좁은 논둑길이 나타난다
미궁을 건너온 사인(死因)에 집중한다
붉게 녹슨 등짝엔 논밭을 뒤집고 들판을 실어 나른
흔적이 보인다 심장충격기에도 반응이 없는 엔진
오랫동안 노동에 시달린 혹사의 흔적이 발견되고
탈, 탈, 탈, 더 털릴 들판도 없이 홀로 2만Km를 달려 온 바퀴엔
갈라진 뒤꿈치의 무늬가 찍혀있다
가만히 지나간 시간을 만지면
그 속에 갇힌 울음이 시커멓게 묻어나온다
소의 목에서 흘러나온 선지 같은 기름이 왈칵 쏟아진다
임종의 안쪽에는 어느새 검은 멍이 튼튼히 자리 잡았다
길이 간절할 때마다 울음이 작동되지 못하고 툴툴거린 흔적이다
죽어도 사흘 동안 귀는 열려 있다는 말을 꼭 움켜쥔
얼굴의 피멍이 희미한 눈빛부터 쓸어내렸다
이제 습골(拾骨)의 시간이다
정든 과수원 나무들이 마지막 악수를 청했는지
뼈마디마다 주저흔이 보인다고 기름 묻은 손이 넌지시 일러주었다.
수사 밖엔 수사가 있다 / 최치언
13블럭 유아살해사건도 발생했다 실로폰을 치면
맑은 비명이 튀어 올라오듯
아이는 후미진 공터, 그것도 폐타이어 속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수사는 진행되었다
많은 말들이 오고갔다, 결과에서 최초를 찾기란 어려웠다 말들은
최후의 만찬처럼 조용하면서도 웅장하게
거행되었다 그러나 식탁아래 그들의 발은 각자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것은 오직 말하지 않는 아이의 부모뿐이었다
시간은 빠른 속도로 아이의 죽음을 부패시켰다 수사는
죽은 아이를 위해 그 어떤 것도 해줄 수 없었다 단지 지독한 냄새 앞에
코를 적당히 삐뚤어 잡고 바바리코트 깃만 세울 뿐이었다
아이가 걸어간 하루동안의 흔적을 되밟아 올라갔다 그 흔적은
전날로부터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수사는 뒷걸음치고 있었다
뒤로 밟아간 길에는 짙은 안개와 여러 개의 강이 있었다 한 남자가
빠르게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개의 기원과 강의 이름을 몰랐으므로 그곳에 들어가 그 누군가를
미행하길 주저했다
그렇게 수사는 아이의 죽음의 현장과는 상관없는 곳에서
아이의 죽음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의 신발이 그 집 지붕 위에서
발견되었다
수사는 예측 가능한 성명서를 아이의 신발끈처럼 풀어놓기 시작했다
풀어진 신발 끈,
그러나 그것이 아이의 신발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자 아이의 부모는
모든 수사를 불신하기 시작하였다
이젠 수사는 살해된 아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 무수한 말들을 종합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되었다 말들의 가능성을 하나씩 지워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다 지우자 아주 또렷한 한 가지 말만 남았다
아이는 폐타이어 뒤에서 죽었다는 것이었다 수사는 흡족했다
그들은 공터에 모여 담배를 한 대씩 나누어 피며 잔뜩 찌푸린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첫째, 아이는 확실히 죽었다
둘째, 아이가 죽었으므로 유인한 증인은 사라졌다
셋째, 우리들의 수사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범인은 수사 밖에 있다
넷째, 수사 밖에 있는 것은 수사의 대상이 아니므로 유아살해 사건은 이것으로 종료한다
그들이 구둣발로 비벼 끈 노란 담뱃불이
수사가 종료된 뒤에도 그 동네에서 사라지지 않고 혼자 타고 있었다
안개와 강 건너 한 남자가 그들의 담뱃불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비벼껐다
내 말의 행방 / 조태일
나를 떠난 말들은
지금 어디에서 떠도는가. 헤매는가
슬픔과 노여움과 기쁨과 사랑으로
범벅이 된 채 제대로 앞도 못보며
생이별로 떠나던 말들은 지금
어디에서 누구와 만나고 있는가
폭풍과 만나고 있는가
국주림과 만나고 있는가.
해방과 노예와 만나고 있는가.
내 안에서 그토록 자유로웠던 외침이던 것이
어린이를 만나면 어린이가 되고
어른을 만나면 어른이 되고
폭풍과 만나면 폭풍이 되지만
어둠을 만나면 다투어 빛이 되던 영원이던
것이.
너는 다시 돌아와
내 가슴과 만나 울멍울명하며
이렇게 보채는가
이토록 흐리고 어두운 날에
(한국문학. 1979.11)
당신의 행방 / 서상민
당신을 찾으러 길을 나섰다
돌아올 것을 염두에 두지 못해
길을 잃었다
허기처럼 빛나는 이팝나무 꽃잎과
옷소매에 묻어온 수크령들과
눈 덮인 벤치에 앉아
잠시 울었다
당신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했고
나는 꼭 한마디 할 말이 남았지만
늘 처음과 끝의 중간쯤에 나는 서 있었고
돌아와
그곳에 두고 온 신발을 생각했다
(서상민 프로필)
계간 《문예바다》 등단(2018), 제22회 김포문학상 작품집 상 수상, 시집 『검은 모자에서 꺼낸 흰 나비처럼』(2022), 한국문인협회 김포지부 회원
나의 행방/임지은
나는 이 집에 없다
네가 꾸는 꿈속에서 빠져나왔다
이 거리에는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남자를 껴입은 사람에게 내가 누구죠?라고 묻자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다만 내가 나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한다 그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진 않는다
이 길은 나도 모르게 생겨나서
생긴지도 모르고 있다가 생겼네? 하며 걸어갔을 뿐이다
한 움큼씩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던 아이가 몇 시냐고 묻는다
나는 이제 행복해질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어렵게 느껴지진 않는다
이 길 끝엔 너의 집이 있고 벨을 누르면
너는 그게 눈꺼풀이라는 것도 모른 채 찢고 들어온다
꿈속에선 오늘 다녀온 곳의 냄새가 나고
너는 천천히 나를 뒤집어 벗는다
처음 보는 얼룩이 너의 집에 있다
너처럼 있다
묻어 있다
제42회 마로니에 전국 여성백일장
[장원] 지우개의 행방 / 김도언
나는 지우개를 잘 잃어버린다
마른세수를 한다, 나를 흔들어 깨우는 움직임
글자를 써 내려가는 동안 눈이 내렸다
일기장에 꾸며낸 하루가 가득하다
창밖이 온통 새하얬는데
굵어지는 눈보라 속에서 우리는 제 자리를 지켰다
자주 입는 외투에 보풀이 일었다
엉긴 시간을 손톱 끝으로 뜯어낼 때
입가에서 각질이 떨어져 나간다
인정하는 일에는 찌꺼기가 생겼다
나는 무뎌지는 것이 두렵다고 쓴다
이건 꾸며내지 않는 이야기
책상 위를 쓸어 담는다, 나를 내버리는 움직임
페이지 채로 찢어낼 수도 있었지
종이 끝을 팽팽하게 잡아당겼을 때
창밖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눈사태가 불빛 쪽으로 손짓하는 사람을 보았어
황급히 창문을 열자
창밖에는 따사로운 도시의 아침이
눈은 내린 적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나는 보풀 가득한 외투를 입고 집을 나선다
지난밤 무사했나요? 이웃에게 묻자
적당히 선선하고 평화로웠다는 대답들
정말 없던 일이었나요?
나는 지우개를 다 쓰기 전에 잃어버린다, 그러나
나는 목격한 눈사태에 대해
희미한 손짓에 대해
정확하게 진술하기 위해서
입속에서 혀를 굴리며
이미 쓰여진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길위에서 헌 지우개 하나를 줍는다
지우개는 단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