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2박 3일의 일정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남들은 좋다고 하는데 제게는 가식적인 것이라고 판단이 되니 마음의 어려움을 느낍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이것이 저의 부정성인지, 정직함인지 헷갈립니다.
저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짜여진 일정에서 벗어나 여유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오니 참 편안합니다.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제이십삼 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칠 년간 다스리며
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가고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노하사 늘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넘기셨더니
4.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그들이 학대받음을 보셨음이라
5. 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으나
6.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안에서 따라 행하며 또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더라
7.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여 타작 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보병 만 명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 두지 아니하였더라
8. 여호아하스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그의 업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9. 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요아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10. 유다의 왕 요아스의 제삼십칠 년에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육 년간 다스리며
11.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 행하였더라
12.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유다 왕 아마샤와 싸운 그의 업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3. 요아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여로보암이 그 자리에 앉으니라
(본문 주해)
북이스라엘 예후 왕조는 ‘예후-여호아하스-요아스-여로보암 2세’로서, 88년간 다스린다.
오늘 본문은 여호아하스와 요아스에 관한 내용이다.
1~2절 :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어 17년을 다스린다.
그런데 여호아하스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는 것이다.
그 악은 바로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간 것이었다.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의 죄가 무엇인가?
여로보암이 자기중심의 왕권을 다지기 위해 벧엘과 단에 제단을 쌓고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세우고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부르며 섬기게 한 것이다. 또 여로보암은 레위인이 아닌 일반 백성을 제사장으로 삼고, 7월 절기를 8월로 비슷하게 바꾸었다.
이른바 여로보암의 죄는 유사 신앙을 제정하여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봉쇄한 것이다. 백성들 편에서는 예루살렘까지 가는 번거로움이 사라지고 편리하게 신앙하였으나, 그것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죄가 되었다.
3~8절 : 이스라엘은 언약의 백성들이기에 이러한 죄를 지으면 여호와께서 심판하신다.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여호와께서 넘기시는데 ‘늘’ 넘기신다.
‘늘’ 넘기시는 이유는 그들이 ‘늘’ 여로보암의 죄를 짓기 때문이다.
아람 왕에 의해 이스라엘이 학대를 받으니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한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그들의 학대받음을 보시고 들으시어 구원하여 주신다.(이는 앗수르가 아람을 침략함으로 이루어진다.)
구원받아 평온을 되찾은 이들은 다시 여로보암의 죄로 돌아간다.
이는 ‘범죄-고난-부르짖음-구원’의 사사시대 신앙 구도와 일치한다.
유사 신앙을 폐하고 참 신앙을 찾는 본질의 회복이 없는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이어진다.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군대를 공격하여 타작마당의 먼지같이 만들었기 때문에, 여호아하스에게는 겨우 기마병 50명과 병거 10대와 보병 1만 명만 남게 된다.(7절)
적이 이들마저 진멸하지 않는 이유는 이렇게 남겨둠으로 조공을 받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기때문이었다.
9~13절 : 여호아하스가 죽자 그의 아들 요아스(여호아스, 남유다의 요아스와 동명이인임)가 왕이 되어 16년 간 다스린다.
그런데 요아스에 대한 평가도 역시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은 것’이었다.
요아스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한 모든 일, 또 그가 유다 왕 아마샤와 싸운 용맹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다.
요아스는 유다 왕 아마샤와 싸워 승리하였다.(14:7~16)
이 요아스가 죽고 나자 그 아들 여로보암(여로보암2세)이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나의 묵상)
오늘 소개된 두 왕-여호아하스와 요아스-에 대한 요점은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 두 왕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 거의 모든 왕이 여로보암의 길을 갔다.
뜻밖의 예외 인물로 죄악의 당사자요 원조인 여로보암이 낳은 아들 아비야가 있다. 아비야는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던 아이였는데 일찍 죽고 만다.(왕상14:1, 13)
그러나 그는 왕이 되기 전에 죽었으니,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이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간 것이다.
악한 왕에 대한 평가로 후렴처럼 따라다니는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았다.’ 하는 구절이 오늘 본문에도 세 번(2, 6, 11절)이나 반복된다.
여로보암의 죄는 거짓된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게 한 죄이다.
하나님을 부르기는 부르는데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금송아지)을 만들어 섬기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분명히 복음이라는 말도 하고, 예수님을 부르기는 하는데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말하는 것과 같다.
교회에 충성하면서 교회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활동하지만-하나님도 부르고, 예수님도 부르지만- 결국 자아확장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 여로보암의 죄인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드는 하나님을 스스로 만들어 섬기는 꼴이다.
나는 여로보암의 죄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조형물의 우상은 당연히 섬기지도 않고, 교회를 위해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행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음을 알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늘 여로보암의 죄의 유혹을 받고 산다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 열심을 낸다고는 하지만, 그 열심의 밑바탕에는 자아확장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음으로 교회 안에서도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했으니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욕망을 예수님 이름을 열심히 부르면서 얻으려고 한 것이었다.
여로보암이 백성들의 흩어짐을 막고, 자기를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바로 그 마음인 것이다.
근본적으로 나는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날 수 없는, 곤고한 자임을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내게 주님께서 찾아와 주셔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보여주신다.
내 피부가 되고, 살이 된 여로보암의 죄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대신 떠맡아 주신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주님의 십자가 보혈 아래에 있어야 안전하다.
수시로 여로보암이 나타나 보암직, 먹음직, 탐스러운 것으로 내게 내민다. 느낌표로 다가오는 솔깃한 것들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매일의 말씀을 통해 늘 말씀하여 주신다. 그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을 높이고 강화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신다.
그렇게 함으로 내 앞에 보란듯이 펼쳐진 여로보암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여로보암의 길을 떠나,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묵상 기도)
주님,
이스라엘 왕들이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았다’ 것을 참 지겹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음 앞에 서 보니
제가 바로 그 길을 열심히 달려갔던 이스라엘의 왕이요 백성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셨어도
상황만 해결되면 다시 고무줄처럼 죄악 된 자리로 돌아가는 이스라엘과 달리
복음이 들리게 귀를 열어 주시고
십자가를 볼 수 있게 눈을 열어 주심으로,
아예 저의 자리를 옮겨 심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여로보암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입니다.
성령님만 의지하오니
저를 주관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