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진보
Power & Progress
필자는 ‘대런 아세모글루 Daron Acemoglu’는 MIT교수다, 25년간 <번영과 빈곤의 역사적 기원> 등 저서가 있다. ‘사이먼 존슨 Simon Jonson’은 IMF수석 경제학자 출신으로 뉴욕타임즈 등에 300편 이상을 글을 기고했다. <백악관이 불타다> 등의 저서가 있다.
“만약 공장의 기계가 갖는 잠재력이 현재의 공장 시스템이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방식과 결합된다면, 우리는 누그러지지 않은 잔혹함으로 전개되는 종류의 산업혁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 시기를 해를 입지 않고 지나가고자 한다면, 유행하는 이데올로기를 볼 게 아니라 사실관계를 봐야 한다.” -로버트 와너- 1949년 저서
진보란 무엇인가. 발달하는 테크놀로지 덕분에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멈출 수 없는 추세로 전진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불평등, 환경 오염, 극단주의 등등 문제도 많겠지만, 더욱더 나은 세상을 낳기 위한 산통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추동하는 힘은 멈추는 게 아니라고 한다. 멈추려는 시도는 현명하지 못하단 일인 것이다. 미래에 가치가 있을 만한 역량에 투자하는 식으로 우리의 자신을 바꾸는 편이 더 낫다. 하지만 우리 세계는 테크노-낙관주의에 빠져 있다. 모든 곳에서 사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힘껏 혁신하고 효과가 있는 것들을 알아내야 하며 거친 모서리를 나중에 다듬어서 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1791년 ‘제러미 벤담 Jeremy Bentham’이 ‘파놉티콘’이라는 감옥 설계 아이디어를 제시했을 때, 원형 건물 안에 중앙 감시탑을 두고 조명을 하면 간수는 노출되지 않고 모든 죄수는 간수가 자신을 시켜보고 있다고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아이디어는 감옥으로 제안되기 전에는 공장이었다. 공장에 감시를 도입한다는 말은 높은 임금을 주지 않고도 노동자를 더 열심히 일할 수 있게 만듦을 의미했다. 새로운 기계는 노동자를 단순한 부품으로 전락시켰다. 기술 진보가 학교, 공장, 감옥, 병원이 더 잘 돌게 해줄 것이다.
이 모든 낙관이 무색하게 1000년의 역사는 발명과 혁신이 “공유된 번영”과는 딴판인 결과를 불러온다.
•개선된 쟁기, 더 체계화된 윤작, 말의 사용 확대, 개량된 수차 등 중세 와 근세 초기에 나타난 기술의 발달은 인구의 90%를 차지하던 농민에 게 거의 아무런 이익을 가져주지 않았다.
•선박이 발전하고 대양의 교역이 시작되면서 유럽의 일부 사람은 막대한 부를 획득했다. 하지만 이 선박은 아프리카의 수백만 명을 노예로 납치 해 신대륙에 운송했고 끔찍한 영향력이 남아 억압적인 시스템을 불러왔 다.
•산업혁명 초기 막대한 부를 창출했지만, 노동자들의 소득은 100년 가까 이 증가하지 않았다. 노동 시간은 늘었고 공장 노동 여건과 인구가 밀 집한 도시의 생활 여건 모두가 가혹하게 악화되었다. 조면기로 면화 재 배 면적이 늘었고, 미국은 면화 수출국이 되었다. 이는 노예제의 가혹 함을 한층 더 강화했다.
•19세기 말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 Fritz Haber’가 발명한 질소비료 는 농업 산출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이 원리는 화학무기를 만들어졌고, 1차대전에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지난 몇십 년 사이 컴퓨터의 발 달은 소수의 거물이 지극히 부유해졌다. 그러는 동안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대부분의 미국인은 뒤로 밀려났고 많은 이들의 실질소득이 심지어 감소했다.
산업화로 이득을 본 것은 사실이다. 노동해야 굶주려 죽는 것을 피했던 과거보다는 우리는 제품과 서비스를 향상하게 시켜 훨씬 더 번영을 누리는 것은 사실이다. 과학 기술의 진보가 핵심이고 “공유된 번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도 기술의 진보를 토대로 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절대적이지는 않은 모든 질병이 그렇듯이, 독점과 소수의 자본이 집중되는 것 자체로 막대한 치료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란 본성상 사회적이고 말하기를 좋아해서, 자신이 가진 작은 지식을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기회만 있으면 자신의 지식 창고를 채우려 한다. 이것은 지식 확산에 도움이 되며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증진하게 시킨다. 따라서 대규모 작업장과 공장은 의회의 어떤 행동도 침묵시킬 수 없고 법원의 어떤 판사도 해산시킬 수 없는 일종의 정치 조직이다.
놀랍게도 250년 전 영국에서 지배적이던 너러티브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우리는 ‘제러미 벤담’, ‘애덤 스미스’, ‘에드먼드 버크‘시대보다 테크놀로지에 대해 더 엘리트주의적이고 맹목적으로 낙관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오늘날 굵직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진보의 이름으로” 생겨난 고통에 눈과 귀를 닫고 있다. 필자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진보가 자동적인 과정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란다. “진보”는 또다시 소수 기업가와 투자자만 부유하게 하고 있으며 나머지 사람 대부분은 역량과 권한을 박탈당하고 이득은 거의 얻지 못하고 있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새 비전이 생겨날 수 있으려면 사회 권력 기반이 달라져야 한다. 그러려면 통념에 맞설 수 있는 조직과 반론이 있어야 한다. 널리 펴진 비전에 도전하고 테크놀로지의 방향이 협소한 지배층의 통제를 벗어나게 하는 것은 19세기 영국이나 미국에서보다 오늘날이 더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결코 그때보다 덜 필요하지는 않다. 필자는 주장한다.
<타임>의 올해의 인물은 1927년 이후, 언제나 한 명이었고 주로 정치인이나 미국의 산업계 지도자 등이었다. 그런데 1960년 이후는 다양한 분야의 많은 인물을 이름에 올렸다. ’테크놀로지 technology‘는 “숙련된 장인”을 뜻하는 그리스어 ’테크네 tekhne‘와 ’말하다의 logia‘에서 비롯된 말이다. 기술적 실업의 우려는 늘 있었다. “노동의 사용을 절약하는 수단이 발견되는 속도가 노동의 새로운 사용처가 발견되는 속도를 능가함으로써 실업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도 설명한다. 이 두려움을 언급한 사람은 1821년 ’데이비드 리카도 David Ricardo‘가 ’케인스‘보다 먼저다.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불평등에 대해 갖는 함의는 숫자를 넘어선다. 좋은 일자리가 사라진 반면 컴퓨터 과학자, 엔지니어, 금융인 같은 소수 고학력 인구의 소득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우리는 두 계층이 분리된 이중 구조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경제적 수단 및 사회적 인정을 누리는 사람들의 삶이 대다수 노동자 삶과 분리되고 이 간극이 날마다 더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리카도‘와 ’케인스‘의 우려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제는 자명해 보인다. 필자는 주장한다.
초기 인류는 불의 도래로 차원이 다르게 변모했다. 맹수에 먹히던 인간이 불의 사용으로 먹이사슬 꼭대기 포식자가 된 것이다. 지난 1만 년 동안 있었던 모든 면에서, 불처럼 인간에 영향을 미쳤던 테크놀로지는 없다. 그런데 막상막하의 후보가 등장한다. 인공지능 AI다. “AI는 인류가 해 온 모든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저는 인공지능이 전기나 불보다도 더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한단다. AI 프로그래머들은 수천 개의 물체와 이미지를 인식할 수 있고, 100개가 넘는 언어 사이에 기본적인 번역을 제공할 수 있다. 암진단에도 도움을 준다. 경험 많은 금융 애널리스트보다 투자를 잘할 때도 있다. 변호사가 수천 개의 문서에서 진행 중인 사건과 관련된 판례를 찾아낼 수 있게 돕기도 한다.
진보의 방향은 사회가 어떤 비전을 따르는가에 좌우되며, 따라서 누가 승가가 되고 누가 패자가 되는지도 사회의 비전에 좌우된다. ’수에즈‘ 운하를 개통해 의기양양한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파나마 운하의 재앙을 받은 것은 상당한 오만과 결합한다. 그의 비전은 어떻게 그토록 지배적인 비전이 되었을까? 답은 사회적 권력이 특히 수만 명의 소액투자자를 설득할 수 있었던 힘에 있다. ’레셉스‘의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연줄, 수에즈 운하 건설의 놀라운 성공에 힘입어 어마어마한 신뢰를 획득할 수 있었다. 권력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암묵적 또는 명시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하나의 빵을 두 사람이 갖고 싶어할 때 누가 좌우하는 것이 권력이다. 물질적인 목적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테크놀로지의 미래와 관련해 누구의 비전이 우세해질 것이냐와 같이 비물질적인 것이 목적이 되기도 한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권력이란 결국 강압이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한 사회 내부에도 사회들 사이에서도 분쟁과 갈등은 언제나 존재했고 큰 침략과 정복이 드물지 않게 끼어드는 등 인간 역사에는 늘 폭력이 있었다. 평화로운 시기에도 머리 위에는 늘 전쟁과 폭력의 위협이 드리워 있었다. 폭도가 짓밟고 지나가는 상황에서 저 빵이 내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견해를 밝힐 기회를 얻기는 훨씬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가 주로 의지하는 권력은 설득의 권력이다. 어떤 대통령, 장군, 혹은 부족장이라도 강제로 군인들을 전쟁터에 밀어 넣을 수 있을 만큼의 강압적인 권력을 갖기는 어렵다. 명령 한 번으로 법을 바꿀 수 있는 지도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사람이 정치지도자에 복종하는 이유는 폭력에 눌려서가 아니라 사회적 제도, 규범, 믿음이 그 지도자의 권위와 지위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를 따르는 이유는 그를 따르기로 설득되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2024.11.15.
권력과 진보
대련 아세모글루. 사이먼 존슨 지음
김승진 옮김
생각의힘 간행
첫댓글 감사 합니다 ^^*
거촌님
관심과 댓글 감사합니다
큰 권력 앞에서 발전하는 진보에
세상이 많이도 변하는 것 같습니다.
잠시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시메온님
한결같은 관심과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