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것은 가볍게 들어가서 깊게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림태주 에세이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를 오늘 새벽에 읽었다.
손안에 포옥 들어오는 책은
누워서 읽기에도
비스듬히 앉아서 읽기에도
서서 큰 소리로 읽어보는 것이 가능한 사이즈다. 그러라고 손안의 사이즈로 한 것일 것이다.
마치 시집을 읽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그러나 결국엔 마음의 중량을 늘리는 것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누워서 한동안 천정을 응시하며 '균열'에 대한 상념으로 젖어 든다.
글을 썼다 지웠다, 놓아두고 다시 쓰기를 여러차례 반복하게 된다.
이건 너무 무거워, 이건 너무 현학적이야, 이건 페친들 글 보며 느낀 감상문이니, 그럼 책 한 권 리뷰에 페친들 여러 사람이 동원되는 것이어서 서로에게 실례가 될지도 몰라.
사진을 찍어 본다.
지금은 바깥으로 나갈 수 없으니(새벽 1시 41분이다)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나무 다탁 위에 있는 茶반에 올려놓고 보니
환각적인 책 표지와 잘 어울리는 빛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사진은 준비되었고, 글은...
손이 가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데로 따라가보자.
'균열'이라는 문구가 자꾸 재생된다.
나는 조금 균열을 다르게 접근해 보았다.
균열이 생기면 그 무엇이든지 본래의 기능과 다른 그 무엇이 서서히 스며든다. 그 스며들어 간 것은 모두 아주 미세한 것들이며,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틈을 만들어 간다. 그런데 사람은 은연중에 그 미세한 균열을 직감한다고 여긴다. 무엇인가 이물질이 침투한 것이다. 그 이물질은 안에서 섞인다. 이유도 모르고 사람은 어떤 고통(육체적일 수도 있고 정신심리적일 수도 있다고 여긴다)을 느낀다. 섞임의 과정에서 오는 진통일 것이다. 이 진통이야말로 생산적인 진통으로 이어진다.
나는 그것을 림태주는 화학작용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 안에 균열이 생기지 않는다면 이물질의 침투도, 섞임도, 화학작용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균열이 없다면 사람은 어떻게 될까. 뇌의 주름은 균열 때문일까. 주름지는 과정들은 균열에 의한 어떤 이물질들의 침투에 의해 섞임의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일까 균열은 외상의 상처도 균열이지만, 사람에게 균열이란 말을 쓰는 것에 있어서는 정신심리적인 측면이 크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당연히 내면적이다.
림태주의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는 그 균열이 일으킨 화학작용의 관찰기록물 같기도 하다. 핀셋으로 집어낸 어느 순간의 이야기는 모두 변화가 일어나는 화학작용에 대한 무수한 자기 복제의 이야기라고 여겨졌다. 그러니까 림태주의 에세이는 모두 하나에서 무한히 번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도 말하고 있다.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가 자신처럼 갈맷빛으로 살아가라고 나를 이끌었다.' 나무 한 그루 크기까지는... 에세이 안에 다 들어 있다. 빼야 할 것을 다 빼야 한다고 했으니 나도 여기서 더 안 나가겠다.
그리고 한편으로 나는 자분자분하게 이어지는 생각들의 실타래가 자분자분하게 이어지고 있다고 여겼다. 한 계절의 변화는 모든 이들과 동시접속이다. 여기저기에서 접속 신호를 보낸다. 계절의 변화에서 우리는 그렇게 접속되어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화답한다. 동시대에서 같이 보고 느끼는 계절을 공유하며 함께 산다는 것은 어쩌면 그 자체로 소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았다. 이제 찬비가 내리고 가을이 철렁철렁 소리 내며 가까이에 와 있다. 우리는 이 가을을 또 같이 살아갈 것이다.
[제제의 말이 맞다. 사람은 꼭 총을 맞아야 죽는 게 아니다. 사랑이 멈추면 죽는다. 사랑은 마음의 화학작용이라서 발열반응이 일어나지 않으면 생성되지 않는다. 반응하고 결합하는 것이 사랑의 원리다. 애플민트와 라임이 만났을 때처럼 개별의 본질과 특성을 망가뜨리지 않고 서로를 허용하며 농도를 맞추면 된다. - 본문 '사랑의 화학' 에서 -]
#림태주_너의말이좋아서밑줄을그었다_웅진지식하우스
*2021/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