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회고적오수 중 제3수 (詠懷古跡五首之三) - 두보[당시삼백수]
고적에서 회포를 읊다 제3수
〈영회고적(詠懷古跡)〉5수는 고적(古跡)을 빌려 두보 자신의 회포를 읊은 것이다.
왕소군의 고향집이 있는 명비촌(明妃村)에서 그녀를 회상하며 지은 시이다. 북방 이민족에 대한 화해정책의 희생양으로 비극적 운명을 살다 간 왕소군의 일대기가 제3구부터 제8구까지 42자에 함축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녀가 남긴 ‘무덤’과 ‘환패’와 ‘노래’를 통하여, 부조리한 현실로 인해 황제를 모시지 못하고, 낯설고 머나먼 북쪽 흉노족에게 시집을 가서 끝내 귀환을 허락받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잠든 원한이 매우 선명하게 중첩되어 표현되어 있다. 두보가 회재불우(懷才不遇)한 자신의 처지를 기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이상은(李商隱), 왕안석(王安石) 등 수많은 시인들이 이 고사를 소재로 시를 지었고, 〈昭君出塞圖(명군출새도)〉라는 그림에는 왕소군이 오랑캐의 복장에 말을 타고 손으로 비파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전한다.
[通釋] 모든 산과 골짜기가 荊門(형문)으로 달려가는 곳에, 明妃(명비) 왕소군이 태어나서 자란 귀주의 한 마을이 지금도 남아 있다. 황궁에서 북녘 사막으로 이어진 길을 한번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못한 그녀는 사시사철 푸른 풀이 돋아 있는 무덤이 되어 지금 저 황혼을 바라보며 있을 것이다. 화공이 그린 못생긴 얼굴로 인하여 흉노로 보내어져 그곳에서 한을 품고 죽었지만, 죽어서도 한(漢)나라를 그리워하여 달 아래 혼이 되어 환패(環珮) 소리 짤랑이며 돌아왔다. 천년 전 왕소군이 비파를 타며 오랑캐 말로 부른 노래는 지금도 분명히 그녀의 원한을 말하고 있으리라.
역주
역주1> 荊門(형문) : 형문산을 지칭한다. 湖北省 宜都縣 서북쪽에 있다.
역주2> 明妃(명비) : 王昭君(왕소군)이라 칭해진 한(漢)나라 궁녀로서, 이름은 장(嬙)이며 소군(昭君)은 字이다. 진(晉)나라 문제(文帝) 사마소(司馬昭)의 이름을 휘(諱)하여 명군(明君)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明一統志(명일통지)≫의 ‘昭君村(명군촌)’에 대한 注(주)에 “貴州(귀주)의 동북쪽 40리 지점에 있다.[在貴州東北四十里]”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湖北省(호북성) 秭歸縣(자귀현) 지역이다. 한나라 竟寧(경녕) 元年(B.C. 33), 흉노왕(匈奴王) 호한사(呼韓邪)에게 시집보낼 궁녀를 뽑을 때, 화사(畵師) 모연수(毛延壽)가 뇌물을 주지 않은 왕소군을 추하게 그려 그녀가 뽑혔는데, 뒤에 원제(元帝)가 미인임을 알고 모연수를 참수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역주3> 紫臺(자대) : 제왕의 궁전으로, 자궁(紫宮)이라고도 칭한다.
역주4> 朔漠(삭막) : 북방의 사막지대를 뜻한다. 여기서는 왕소군이 시집가는 흉노족의 지역을 지칭한다.
역주5> 靑塚(청총) : 왕소군의 묘를 지칭한다. 현재 내몽고 자치구 呼和浩特市(호화호특시) 남쪽 20리 지역에 있다. ≪明一統志(명일통지≫ 卷20에 “왕소군의 묘는 옛 豐州(풍주) 서쪽 60리 지점에 있다. 흉노 땅은 흰색의 풀이 많은데, 이 무덤만이 푸르렀으므로 靑冢(청총)이라 하였다.[在古豐州西六十里 地多白草 此冢獨靑 故名靑冢]”라고 하였다. ≪後漢書≫ 〈南匈奴傳〉에 “호한야선우가 죽자 소군이 한나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상서하였으나, 성제는 오랑캐의 풍속을 따랐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소군이 마침내 흉노에서 죽었다.[呼韓邪鮮于死 昭君曾上書求歸 成帝令從胡俗 不許 昭君終死於匈奴]”라고 하였다.
역주6> 畫圖省識(화도생식) : 그림으로는 그녀의 미모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西京雜記(서경잡기)≫ 卷2에 “원제(元帝)는 후궁이 많아 평상시 볼 수가 없었으므로 화공에게 모습을 그리게 하고, 그 그림을 살펴보고 불러들여 합방하였다. 宮人들이 모두 화공에게 뇌물을 주었는데, 많은 경우는 십만이었고, 적은 경우도 오만보다 적지 않았다. 오직 王嬙(왕장)만은 뇌물을 주지 않아 마침내 왕을 모실 수 없었다. 후에 흉노가 입조(入朝)하여 알씨(閼氏:흉노족 선우의 처)로 삼을 미인을 구하였는데, 이때 왕이 그림을 보고 왕소군이 가도록 하였다. 그녀가 떠날 때에 이르러 불러 보니, 용모가 후궁 중에 제일이었고 응대도 잘하고 거동도 우아하였다. 왕이 후회하였으나 명부가 이미 정해졌고, 제왕이 외국에 대한 신의를 중시해야 했기에 다른 사람으로 바꾸지 못하였다. 이에 이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화공들이 모두 처형되어 저자거리에 버려졌다.[元帝後宮旣多 不得常見 乃使畵工圖形 按圖 召幸之 諸宮人 皆賂畵工 多者十萬 少者亦不減五萬 獨王嬙不肯 遂不得見 後匈奴入朝求美人爲閼氏 於是上案圖以昭君行 及去召見 貌爲後宮第一 善應對 擧止閑雅 帝悔之 而名籍已定 帝重信於外國 故不復更人 乃窮案其事 畫工皆棄市]”라고 하였다.
역주7> 環珮(환패) : 부녀자의 장신구로 여기서는 왕소군을 비유하였다.
역주8> 月下(월하) : ‘月夜(월야)’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역주9> 琵琶作胡語(비파작호어) : 왕소군이 흉노에 살면서 비파를 치며 흉노의 말로 부른 노래를 지칭한다. 왕소군이 비파를 잘 탔으므로 흉노에서 삶을 상상하여 말한 것이다. ≪古今事文類聚≫(續集 卷22)에 “왕소군이 처음 흉노 땅으로 갈 때, 가는 길에 향수와 원망이 일어나 마침내 말 위에서 비파를 타며 그 恨을 기탁한 것이 지금까지 전하는데, ‘소군원’이라 부른다.[王昭君 初適匈奴 在路愁怨 遂於馬上彈琵琶 以寄其恨 至今傳之 謂之昭君怨]”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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詠懷古跡五首 杜甫
其三
群山萬壑赴荊門,生長明妃尚有村
一去紫臺連朔漠,獨留青塚向黃昏
畫圖省識春風面,環珮空歸月下魂
千載琵琶作胡語,分明怨恨曲中論
[출처] 영회고적오수 중 제3수 (詠懷古跡五首之三:고적에서 회포를 읊다 3/5) - 두보(杜甫)[당시삼백수] |작성자 풀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