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번 가을유사가 80 번째 모임이었다. 1973년 봄부터 한번 빠짐없이 봄가을로 일년에 두 번씩 40년 동안을 만나온 셈이다. 물론 그 사이에 좋고 궂은 일이 생길 때마다 수시로 만났지만, 공식적인 유사 횟수로 80번째가 되었다고 하니 감회가 새롭다.
에고, 아까워서 이걸 어찌 먹누. 우리 친구들이 갈비찜과 왕새우소금구이에 젓가락질을 하면서도 시선은 온통 나와 내가 먹는 음식에 꽂혀있네. 저건 무슨 맛을 내며, 그 맛에 내가 어찌 반응하는지도 관심이다. 이렇게 화려한 비건 코스 요리는 나도 처음 보았으니 궁금한건 마찬가지다.
세로로 찢어놓은 송이와 데친 표고를 둘러 앉힌 큰접시 위에는 자색 양란 덴파레 두 송이가 기름소금종지 양옆에 놓여 있다. 곁들인 3종의 소스와 잣죽 에피타이저를 시작으로, 연잎밥과 채식만두, 구멍 안을 색음식으로 채우고 각지게 만든 연근과 이끼방석을 깐 산삼 한 뿌리, 야채쌈전, 그리고 솔잎 몇 가닥이 얹혀진 향진한 자연산 송이와 더덕 구이, 콩고기 구이와 야채탕수에 무알콜 맥주 클라우스탈러와 무오신채 사찰김치, 그리고 바삭하게 말린 과일슬라이스 디저트까지.
인당 부부가 조계사 앞 사찰음식 전문점 '발우공양'에 직접 찾아가 시식까지 해가면서 준비해준 이 비건 음식은 하나하나 먹는 순서에 따른 종류와 각 음식별 소스까지 꼼꼼히 챙겨서 구색을 갖춰놓은 예술품만 같다. 두부와 상추쌈, 나물과 김이면 충분하다고 인당한테 미리 말했건만, 비건 채식인 나 하나 때문에 두 종류의 음식준비를 기꺼이 감당한 것이다. 친구를 위한 가없는 배려와 수고에 대해서 인당 부부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다시 드린다.
내 분에 넘치는 융숭한 대접은 금번 인당네 한번으로 족하다. 앞으로 유사 때면 나로 인한 별도의 수고가 없는, 평범한 Vegan 식단을 부탁한다. 그래야 꾸준히 오래 비건식을 하고싶은 내 마음도 부담을 덜고 편할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식사 후, 제수씨께 맘으로만 크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북촌 한옥마을로 출발했다. 일요일에 비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광주 집을 나설 때 미리 짐을 줄였다. 우선 삼발이와 F2.4렌즈 두 개를 덜어내고, 대신 모자를 쓰고, 목긴 신발을 신고, 우산을 챙겨 왔다. 빗속에서는 사람이 이동하는 일도 습기에 약한 카메라 장비를 챙기는 일도 수월치 않기 때문이다.
'세옹지마'라 하지 않던가. 평소 일요일 오후라면 대절버스는 줄서 있고, 밀려든 국내외 관광객들 때문에 서있으면 사람으로 가득 찬 길거리 위를 떠밀려가기 십상이란다. 일정대로 움직이는 우산 쓴 외국인들 몇 팀이 보일뿐, 궂은 날씨 덕분에 해설사가 안내해준 코스대로 우리는 한가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비 맞고 발색이 좋아진 은행나무와 선명해진 단풍잎이 고풍스런 한옥마을과 잘 어우러진 풍경을 향해 카메라 렌즈를 갖다 대는 곳마다 그림이 된다.
친절하고 박식한 해설사의 명쾌한 설명과 북촌마을의 품위 있는 아름다움, 비에 젖은 단풍과 전통을 카메라에 담는 즐거움, 우리 친구들과 함께 보낸 특별하고 귀한 시간들은 만추의 낭만과 함께 잘 갈무리 되어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노란 은행잎들이 요처럼 두텁게 깔려있는 감고당길 위에서, 월정과 서호와 설촌이 각기 다른 포즈로 동시에 공중부양중인, 우리 친구들의 점핑화상을 들여다보며 어찌 미소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친구 카페에 올려놓은 글입니다. |
첫댓글 가을비에 도심의 가을은 흠뻑 젖어서 색깔은 더욱 찐하고
우아한 레녹스 그릇에 담긴 고운 빛깔의 음식들 하며....언제고 가볼요량으로 메모해 두었습니다...
하얀색 국화가 담긴 은은한 빛깔의 다섯개의 도자기...일부러 하나는 비워놓은듯...이뻐서 스케치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좋으신 친구님들의 다정한 모습 차암 부럽고 보기 좋습니다..
서울의 가을에 흠뻑 젖었네요. 비건의 음식에 친구들의 배려가 빛납니다. 다들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친구들 모임사진입니다. 금번 유사는 산수운(인당)이었습니다.
비건 코스요리가 등장하는 과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튿날 일행은 북촌 한옥마을로 나들이를 나갔습니다.
금번 행사 사진 중 일부를 올려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