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그가 낸 아리랑 관련 책만 ‘아리랑’(1986년), ‘아리랑 시원설 연구’(2006년)를 비롯해 공저 포함 12권이다. 고서·잡지 등 관련 자료는 수만 점에 이른다. 그는 고종의 헤이그 밀사였던 헐버트 박사가 1896년 처음으로 아리랑을 서양음계로 채보한 기록(문학월간지 한국소식 2월호)도 찾아냈다. 지난 1월 28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그를 만났다. 독립군처럼 검은색 한복 두루마기를 걸치고 나타난 그는 아리랑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자면 며칠 밤을 새도 부족할 듯 말을 쏟아냈다.
“인천상륙작전을 주도했던 미군 7사단의 사단가가 아리랑이었다는 걸 아십니까?”
“1960년대 반전음악의 대부였던 피트 시거의 음반에도 아리랑이 들어가 있어요.”
“헐버트가 아리랑을 ‘한국의 소리음악(Korean Vocal Music)’으로 소개한 글에서 즉흥적으로 가사를 부르는 한국인을 보고 워즈워스보다 뛰어난 시인이라고 표현했다는 것 아닙니까.”
최전방 북한에서 들려온 아리랑
오전에 끝낼 예정이었던 인터뷰는 정작 듣고 싶었던 그의 사연은 듣지도 못하고 아리랑 이야기만 듣다 끝났다. 오후에 국회에서 열린 ‘문경새재 아리랑박물관 건립’ 공청회에 참석하고 온 그와 저녁에 다시 만났다. 그는 “아리랑이 유네스코에 등재됐다고 들떠 있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저항·대동·상생의 아리랑 정신을 어떻게 살리고 어떻게 세계에 알리느냐는 것이다. 중국이 자국 문화재로 만들려는 움직임에 맞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면서 아리랑 걱정에 계속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노래를 채록하러 다니면서 들었던 사연들을 말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는 “돈 안 되는 일 하느라 지금껏 전셋집 한 번 살아본 적 없이 월세를 전전했다. 남들이 신발 바꿔 신는 횟수만큼 이사를 다녔다”고 말했다.
도대체 아리랑의 무엇이 평생 그를 움직였을까. 그는 최전방인 철원에서 군복무를 했다. 북한 측은 대남방송으로 매일 아리랑을 틀어댔다.
‘저기 저 산이 백두산이라지/ 해 뜨고 달 뜨고 별도 뜨네~’.
생소한 아리랑 가사가 그의 관심을 끌었다. 왜 저렇게 줄창 아리랑을 틀어댈까. 알고 보니 해와 달은 김일성·김정일을 뜻하는 것이었다. 아리랑을 다시 만난 곳은 제대 이후 1980년 강원도 정선의 사북사태와 광주민주화운동 등 시위 현장이었다. 시위의 마지막은 늘 아리랑이었다. 팽팽한 대치 상태에서도 아리랑만 나오면 모두가 숙연해졌다. 궁금했다. 싸우다가도 화해하게 만드는 아리랑의 힘이. 우리 민족의 DNA에 새겨진 이 노래가 무엇인지. 중국·미국 등 타국으로 떠나면서 왜 아리랑을 가슴에 담고 갔는지, 아리랑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진도로 밀양으로 정선으로 답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고서나 잡지에 나오는 아리랑 관련 자료들도 찾아 나섰다. 옛날 잡지나 노래책만 찾아다니는 그를 보고 “별 미친놈도 다 있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1980년대 그의 보물창고는 서울 노원구 상계동이었다.
“당시 운동권 출신의 돈 없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고나던 곳이 상계동이었어요. 이삿짐과 함께 날마다 헌책들이 쏟아져 나와 전국의 고물상들이 몰려들었죠. 그 틈에 끼어 책을 중고서적에 넘겨주고 대신 잡지나 노래책이 나오면 달라고 부탁하고 다녔어요.”
아리랑은 그 시대의 SNS
그렇게 빠져든 수집 활동은 국내를 넘어 해외로도 뻗쳐 갔다. 그가 헐버트 자료를 찾아낸 곳은 일본 도쿄의 고서적 거리인 간다의 헌책방에서였다. 그렇게 수집한 자료가 몇 년 만에 서재를 꽉 채웠다. 그는 자신을 “최초의 잡지 전문 수집가”라고 말했다. 수집한 자료로 잡지 전시회도 열었고 신혼집 서재를 사람들에게 도서관으로 개방하기도 했다. 1987년 9월 26일자 매일경제신문에는 ‘김연갑씨, 일요시민무료도서관 운영’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녹음기 들고 전국으로 다니면서 만난 아리랑은 놀라웠다. 현장에는 수많은 아리랑 가락이 살아있었다. 온갖 사연과 눈물이 기록돼 있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말로 못한 속마음을 주고받고, 민초들이 불만을 토해내고, 삶의 노하우를 전해주고, 남편의 부실함을 탓하고, 연정을 호소하고…, 저항과 선동의 목소리이자 대동과 상생의 메시지였다. 말하자면 아리랑은 요즘 시대의 SNS와 같은 역할을 했던 셈이다.
“전남 진도의 옥주여관에 묵은 적이 있어요. 주인 아주머니에게 아리랑 연구한다는 말을 했더니 자기도 한 가락 들려주겠대요. 노래를 시작했는데 끝이 없어요. 몇 시간 동안 녹음 테이프를 몇 개나 갈아 끼워야 했어요. 옥주여관 주인이 진도에서 아리랑을 최고로 잘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다시 가보니 아니에요. 왜 우리는 안 시켜주냐면서 노래들을 해대는데 진도에선 강아지 옆구리를 찔러도 아리랑을 부른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에요. 강원도·경상도 일대에도 3~4시간씩 가사가 중복되지 않게 아리랑을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찾아낸 아리랑 가사가 셀 수 없이 많다. 시집살이, 자장가, 기생아리랑부터 나물 뜯는 노래, 배 타고 나간 남편 흉보는 노래, 의병들이 불렀던 노래까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싸 배 띄워라/ 춘천아 봉의산아 너 잘 있거라/ 신연강 배턱이 하직이로구나/ 우리 나 부모가 날 기르실 제/ 성대장 주려고 날 기르셨나~’.
춘천에서 구한말 불려지던 의병 아리랑이다. 이밖에 다양한 의병 아리랑을 묶어 신나라레코드에서 ‘역사적 기억의 전승-의병 아리랑’을 냈다. 그는 조선 고종 2년(1865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아리랑이 대변혁기를 맞았다고 주장한다. “‘문경새재 박달나무는 홍두깨로 다 팔려나간다’를 비롯해서 경복궁 중수 10년 후부터 아리랑이 대유행을 했습니다. 강제부역군들을 중심으로 확산되면서 토속민요가 시대의 노래로 환골탈태를 한 것입니다. 그만큼 아리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최고의 선동도구이자 시대의 노래이고 역사의 노래입니다.”
그는 이제부터 할 일이 많다고 했다. “북한은 물론 해외동포들이 함께하는 아리랑대축제를 열어야 하고 일본 어딘가에 있다는 영화 ‘아리랑’ 필름도 찾아야 합니다. 10년간 작업한 ‘아리랑연표’ 출간도 해야죠. 아리랑 7000수를 한지에 기록하는 일도 문경시·한국서예협회와 협의 중입니다.”
그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본조아리랑을 비롯해 정선·밀양·진도 등 종류는 25종에 이르지만 아리랑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같으면서도 다르고, 옛것이면서 현재 것이다. 모두가 우리의 아리랑이다”라고 말했다.
첫댓글 잊혀져가는 구전 문화들을 제도적으로 발굴해내는 분들을 지원해야 할텐데요 안타깝습니다 !!
그렇지요 아리랑은 언제 들어도,보아도 우리나라의 애환이 담긴 노래이지요
저도 글을 쓸 때 아리랑을 많이 쓰는 편입니다 우리 민족의 혼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요
셰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이라 불리울만큼이나 아름답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