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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이전 아이디가 해킹으로 인하여 정지되었습니다.
15일날 등업신청했는데 못보셨나보네요^^
전화도 드렸는데 마침 꺼져있어서 부득이하게 일단 여기가 올리겠습니다 오늘이 마감이라 ㅜ.ㅜ
등업되면 바로 글 삭제하고 윤리학 부분란에 올릴께요
인문과학대학 인문학부(철학) 200417872 고 광 춘
주제 - 공격적인 타자성의 개념 결여
구성
- 물자체로서의 타자란 타자의 인격성 혹은 자유인데, 그것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죽은 자와 미래의 인간에서다. 현상학적인 타자론은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 동일한 도덕성, 책임, 자유라는 말이 대립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 단 하나 확인해두고 싶은 것은 자본제 단계로부터 코뮤니즘으로의 발전은 결코 역사적 필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지 ‘자유로워지라’,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고 하는 윤리적 의무로부터 생겨난다. 역사에는 의미도 목적도 없다. 그것은 실천적으로만 존재한다.
- 그에게 있어 도덕성은 선악보다는 오히려 ‘자유’의 문제다. 도덕, 윤리, 종교 등의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해져 있지않다. 이 책에서 나는 사회나 공동체의 도덕을 ‘도덕’, 세계시민으로서의 도덕을 ‘윤리’라고 부른다.
- 칸트는 종교를 윤리적인 한에서만 인정했다. 이러한 시각은 종교를 윤리로 격하시킨다는 이유로 비판받아 왔다.
의견
- 나는 이전에 가라타니 고진의 또다른 저서인 탐구 1을 읽으며 문제는 타자가 결국 윤리적 문제로 집약된 것으로 결론을 얻었었다. 그리하여 윤리 21에 대해서는 목숨을 건 도약이나 타자, 단독자에 관한 문제를 언급할 줄 알았다. 사라트르의 실존주의를 넘어서 더욱 더 구체적이고 근본적인 도약에 관한 문제를 기대했다. 윤리 21은 결국 사르트르가 주장하는 우리는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는 주장과 칸트의 정언명령을 섞어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과연 탐구 1이나 윤리21이나 가라타니 고진의 저서가 맞지만 과연 이것이 같은 사람의 저서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른 견해를 내세우는 면을 보고 아리송했다.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윤리는 어떤 불변하는 본질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항상 실천에 의해서 상황마다 그 때 그 때 결단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예전 세계 대전 때의 나치즘, 파시즘을 생각해보자. 히틀러는 목숨을 건 도약을 한 것이다. 또한 그것을 실천했다. 고진의 논리에 히틀러를 적용시킨다면 세계연합적인 공동체 안의 질서에 저항하는 바로 단독자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독일 민족과 함께 세계 전쟁으로서 바로 목숨을 건 도약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히틀러는 과연 윤리자이며 칭송받아야 마땅한 사람인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100이면 100 당신은 히틀러가 올바른 사람이냐고 물어본다면 아니라고 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히틀러가 왜 비윤리적인 사람이고 비판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진의 견해에 따른다면 나치즘은 전혀 비판받아야할 어떠한 기준이 없다. 히틀러 같은 단독자가 목숨을 건 도약을 하였을 때 이것이 왜 잘못된 것이라는 판단해줄 메타적인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세계연합은 공동체이다. 고진이 말하고 있는 타자성은 이 공동체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히틀러의 나치즘은 단독자로서 목숨을 건 도약을 전쟁으로 발산하면서 독일 민족을 내세운 것이다.
고진은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인가? 고진은 히틀러를 비판하고 있다. 이 비판의 이유로 그는 칸트의 정언명령에 따르고 있다. 이것은 곧 나와 타자간의 대칭적 관계 속으로 도피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저서인 탐구 1에서는 사르트르조차 대칭적 관계로 비판하던 그가 무슨 이유로 갑자기 단독자 들을 버린 것일까? 그렇다면 윤리는 타자들이 만지고 건들 수 없는 절대적인 영역에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고진은 탐구 1에서는 순간순간 그때마다 목숨을 건 도약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타자들 사이에서의 어떠한 윤리적인 기준이 가능해져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윤리21에서 제시하고 있는 칸트의 정언명령은 당연히 타자들 간의 메타적인 윤리가 될 수 없다. 두 저서간의 모순점이 바로 이것이다. 만약 윤리 21처럼 칸트의 정언명령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윤리적인 면에서의 목숨을 건 도약 따위는 필요 없게 된다. 기존의 탐구 1의 내용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도약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의 결과는 절대로 칸트의 정언명령이 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어떤 상황에서는 히틀러처럼 결단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또 다른 상황에서는 스탈린이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공통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다른 것은 이를 테면 세계공통체적인 국제 법을 지키지 않는 것도 포함될 수 있겠다. 이러한 공통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는 나라에 대하여 고진이 말할 수 있는 도약은 칸트의 정언명령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항상 타자성 자체에서 정언명령이 자신의 논리적 필연성을 띠고 구성되는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정언명령을 빌린 고진의 견해는 결국 타자성과는 무관해지는 공동체적인 주장이 되어 버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히틀러에 대해 평가하는 기준은 항상 목숨을 건 도약에 의하여 매 순간 순간마다 결정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윤리 21에서의 고진은 그 도약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이다.
칸트의 정언명령은 어떤 일이 되었든 간에 타자성이라는 개념을 배제한다. 이것은 곧 전형적인 대칭적 관계임을 의미한다. 사르트르의 우리는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는 주장 또한 타자들 간의 윤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보여주는 것이 없다. 여기에서 고진은 타자들 간의 윤리가 절대 일정한 모습으로 선험적인 방식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곧 목숨을 건 도약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가장 절실하게 목숨을 건 도약이 필요할 것만 같은 윤리적 문제에 관해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다. 모순된 주장이 아닐까? 철학에 관하여는 그렇게 목숨을 건 도약을 강조하고 있던 이들이 정작 윤리에 관해서는 매우 보수적인 측면은 가지고 있다. 종교라는 개념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말이다. 특히 칸트는 윤리를 위하여 종교를 필요로 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목숨을 건 도약을 한 것이 아니라 윤리적 문제에 회피하는 행동이 불과한 것이 아닐까? 도스토옙스키는 "만약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만약 어떤 단독자가 순수한 힘만을 타자간들의 윤리이다 라고 못을 박고는 윤리로서 목숨을 건 도약으로 결단하였다고 하자. 그에게 정언명령이 들어오기나 할까? 아무런 제약도 장애도 되지 않을 것이다. 히틀러 또한 수단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자기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그 나머지를 적대했을 뿐이다. 그에게 전쟁은 목숨을 건 도약에서 항상 이루어질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보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전쟁은 직접적으로 타자성을 드러내는 가장 확실하고 보편적인 방법이 아닌가? 과연 고진은 이 책을 통해 항상 가르치다와 배우다 또는 팔고 산다라는 정도로만 타자와 관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타자와의 관계에서 갈등 또한 생길 것인데 말이다. 이러한 갈등속에 전쟁이 생길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개념을 배제한다는 것은 결코 인간사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분명 이 행위는 고진이 의미하고 있는 타자성과 단독자의 목숨을 건 도약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고진은 바로 이러한 개념과 관련된 목숨을 건 도약을 생각지 않고 있다. 타자성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고진의 타자성이 제대로 적용될 수 있는 관계는 무엇일까? 예를 들면, 호랑이를 타자라고 가정해보자. 우리 인간은 그 호랑이에게 가르칠 수도 없을 것이고 간접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직접적으로 배울 수도 없다. 또한 우리는 호랑이에게 팔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다. 물론 타자성이라고 해서 이런 관계만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갈등의 개념을 생각해보자. 호랑이가 만약 우리 인간을 공격해올 시 어떤 상황이 일어날까? 인간이 제대로 대처하지 않을 시에는 잡아먹힐 수도 있을 것이고,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또한 인간이 대처를 잘하여 반격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만약 어떤 무사가 검을 뽑아 나를 해치려고 한다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에게는 대화도 통하지 않는다. 이럴 경우에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내가 검을 뽑지 않고 저항을 하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다. 물론 내가 검을 뽑아들고 제압한다면 살겠지만 말이다. 고진에 따르다면 이러한 공격적인 타자성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결여되어 있으며 그 윤리라는 것이 이런 공격적 타자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격적인 타자성에서 윤리는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공격적 타자들을 배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그 공격적 타자보다 힘이 월등히 강할때나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르트르의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거나 칸트의 정언명령 같은 것에서는 아무 의미사항이 될 수 없다. 타자들간의 메타적인 윤리라는 개념은 포함시키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때 그 때 항상 목숨을 건 도약으로 타자와 관계해야 하지 않을까?
고진이 생각하는 공동체는 적게 보았을 시 한 사람부터 크게 보았을 때에는 기독교같은 집단이 해당된다. 기독교가 식민지의 타자들에게 했던 것 중 가장 우선적인 일은 그들을 동일 공동체화 한 후에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렇게 인간사의 역사에서 목숨을 건 도약은 항상 목숨을 걸만한 그 무엇이 됐던 것이다. 이것에 대해 제동을 걸 수 있는 윤리로 과연 칸트의 정언명령으로 충분해 질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자유로워지라는 말로 충분한 것일까?
1001단어 입니다
참고 문헌
- 가라타니 고진, <탐구 1>, 새물결, 1998
- 랄프 루드비하, <정언명령(쉽게 읽는 칸트)>, 이학사, 1999
인용문
1. p.17 단 하나 확인해두고 싶은 것은 자본제 단계로부터 코뮤니즘으로의 발전은 결코 역사적 필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2. p.19 그것은 단지 ‘자유로워지라’,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고 하는 윤리적 의무로부터 생겨난다.
3. p.19 역사에는 의미도 목적도 없다. 그것은 실천적으로만 존재한다.
4. p.24 커뮤니티즘에 대해서는 이 임노동의 폐기가 핵심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가령 구소련과 같은 사회는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했다.
5. p.26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고 할 때, 칸트는 구체적으로 독립 소생산자들의 연합 사회를 생각했다.
6. p.29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까지 독일에서는 산업혁명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7. p.34 종교 비판은 인간이 인간에게 최고의 존재라는 교의로 끝난다.
8. p.34 인간을, 경멸당하고 예속되며 버림받고 멸시 당하는 존재로 방치하는 일체의 관계를 뒤집으라는 지상명령으로 끝나는 것이다.
9. p.39 고전이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재편가라는 시렴을 만나고 그것을 통과해야만 고전일 수 있다.
10. p.48 과거는 조금도 완료되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과거의 타자와 우리의 관계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11. p.49 국가가 법적으로 죄를 추궁한다면, 도덕적으로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이른바 공동체다.
12. p.56 흔히 서구에는 기독교적 도덕이 있고 그것이 개인주의의 기반이 되고 있다고들 한다.
13. p.58 다른 의미에서 유교권인 중국과 한국에도 도덕적기축이 있고, 그것이 역설적으로 일종의 개인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14. p.58 한국에서는 인구의 약 3분의 1이 기독교도다. 그 기독교는 어딘가 유교적이고, 바로 그 때문에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15. p.59 동일한 도덕성, 책임, 자유라는 말이 대립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아무런 구별 없이 사용되고 있다.
16. p.61 사람이 완전히 선하다거나 악하다거나 하는 일은 그의 없다.
17. p.62 대부분은 어떤 점에서는 ‘선’하고 다른 점에서는 ‘악’하며, 또는 어떤 외적 조건에서는 ‘선’하고 다른 조건하에서는 결정적으로 ‘악’ 하다.
18. p.62 그는 먼저 종교를 가르치고 나서 과학적 지식을 가르칠 게 아니라 처음부터 사물을 과학적으로 가르치라고 말한다.
19. p.62 이 세상에 끝나는 것이란 하나도 없어. 일단 한번 일어난 일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
20. p.62 그저 이러저러하게 모양이 변하니까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라구.
21. p.67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경제적인’원리다. 그로부터 보면 죽음의 충동은 불합리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한다.
22. p.69 뭔가 새로운 지점에 도달할 때 우리는 과거를 다시 본다.
23. p.71 그것은 죽은자와의 관계 변화라고 말해도 좋다.
24. p.71 그 경우 죽은 자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변하는 것이다.
25. p.73 종군위안부 문제는 종종 종래의 한일관계 문제와 연속적으로 다루어지지만 거기에는 이질적인 물음이 존재한다.
26. p.74 그것은 여성의 관점에서 전쟁을 다시 보는 것, 세계사를 다시 보는 것이다.
27. p.75 일본은 조선과 대만, 만주 등을 식민지로 삼고 또 동아시아 일대를 점령했다.
28. p.77 예전의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는 용서되고 일본 같은 후진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는 침략으로 비난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29. p.77 칸트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통정적 이념이 작용하는 것이다.
30. p.79 일본인이 세계사에서 하나의 위치를 점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전쟁책임을 명확히 하는 것, 나아가 그것을 보편화하는 것에 의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31. p.81 19세기에는 사람들은 우선 계몽되어 있었고, 합리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사물을 생각하는 것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했다.
32. p.81 아무래도 인간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근원적인 ‘악’이 내재해 있는 것 같다.
33. p.85 확실히 19세기 이래 작가들은 ‘악’에 주목했다.
34. p.85 동시대 사람들이 합리적, 공리주의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인간은 그렇지 않다라는 직관에서 기괴하고 비합리적인 인간의 행동이나 심리를 그리려고 했던 것이다.
35. p.85 어떤 사건에 관해 원인을 아는 것은 인식의 문제며,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실천(윤리)의 문제다. 이를 구별한 사람이 칸트였다.
36. p.89 인간의 행동은 모두 원인에 의해 결정되고 자유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이 경우 자유는 실은 자기원인이라는 것이다.
37. p.91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38. p.92 스스로를 피해자로서가 아니라 가해자로 보는 사상가는 프랑스에는 사르트르뿐이었다.
39. p.94 전전, 전쟁 세대에게 사르트르가 달갑지 않은 존재였음은 당연하다. 그것은 그들에게 정치적 책임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40. p.96 우리는 전쟁책임의 문제를 그저 선악의 도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은 단지 누가 나쁘다든가 좋다든가 하는 것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41. p.99 그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이론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42. p.101 일본인이 평화헌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외부에서 보면 아시아 제일의 군대를 가진 국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43. p.101 전쟁세대들은 우리는 몰랐다. 배우지 못했다. 속았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44. p.103 요시모토는 무지에도 책임이 있다는 태도를 취했다. 무지에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책임을 지면 되는가?
45. p.104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46. p.106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이론과 현실의 어긋남을 무시하고 이론에 집착하는 비전향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전향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47. p.108 에티카란 윤리라는 말인데, 만일 자유가 없다면 윤리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48. p.109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9. p.112 사람들은 선인인 것은 자신의 의지 때문이고 악인은 그 의지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50. p.115 또 기독교도는 선인이고 이교도는 악인이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51. p.117 스피노자는 그런 것은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52. p.119 대개의 사람들은 단지 ‘악인’이 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태어났을 뿐이고, 기독교 공동체에 태어났기 때문에 기독교도가 되는 것뿐이다.
53. p.127 이 ‘지상명령’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칸트는 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54. p.129 ‘신’이라고 해 두면 이야기는 간단하지만 그는 그것을 거부한다.
55. p.131 동일한 하나의 내용이 인식의 대상이며 동시에 윤리적 판단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56. p.131 그것은 미적 판단의 대상으로도 나타난다.
57. p.132 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그러한 실존적 계기를 고려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와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시작했다.
58. p.133 전쟁 전뿐만 아니라 전후에도 당의 지도자가 아무리 어리석고 국제적 권위에 맹종할 뿐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비판하기는 어려웠다.
59. p.146 그것은 비전향=선, 전향=악이라는 도덕적 구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60. p.148 도쿄 재판 이후의 점령군은 중국 대륙 및 한반도에서 진행되고 있던 혁명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한 추궁을 중지해버렸다.
61. p.151 오히려 일본에 재군비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62. p.153 자유의 세계에서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다.
63. p.157 우리는 전쟁 중에 우리가 어땠는가를 스스로 추궁하고 검토하며 비판해야 한다.
64. p.157 정치적인 죄는 정치가나 관료 등 권력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65. p.158 우리가 국민인 한 정치적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66. p.160 거듭 말하지만 구조론적으로 인식할 때 개인의 책임은 괄호 안에 넣어야만 한다.
67. p.161 칸트는 종교를 윤리적인 한에서만 인정했다. 이러한 시각은 종교를 윤리로 격하시킨다는 이유로 비판받아 왔다.
68. p.162 부처는 ‘자기(영혼)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이 것은 심원한 사상이라고 하지만 그리 난해한 것은 아니다.
69. p.164 부처 이전의 종교는 영혼이 윤회 속에 있고, 그로부터 해탈하는 것이 과제였다.
70. p.167 스피노자가 자유의지를 부정한 것은 바로 사람들을 윤리성으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다.
71. p.167 마찬가지로 세계종교에서도 자유의지에 대한 부정은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성을 되돌아보게 하기 위한 것이다.
72. p.169 그러한 악을 면한 부자나 지배계급이 구원된다면 악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구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73. p.171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74. p.173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75. p.173 실제로 간음하는가 안 하는가, 실제로 죽이는가 죽이지 않는가 하는 차이는 절대성 앞에서는 없어지고 만다.
76. p.174 그러나 그와 동시에 윤리도 없어져 버린다.
77. p.174 우리는 항상 과거의 텍스트와 대화하면서 살고 있다.
78. p.175 성서라든가 불경이라든가, 그 외에도 갖가지 책들과 함께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대화’라고는 할 수 없다.
79. p.177 죽음이란 단순히 생물적인 죽음이 아니라 사회적인 승인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80. p.178 죽은 자는 어떠한 현실의 대상도 아니다. 죽은 자는 자신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산 자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끊임없이 밝히는 기회다.
81. p.179 혹은 산자가 그에게는 이미 현존하지 않는 죽은 자에 대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는 기회에 불과하다.
82. p.181 정말이지 무엇 하나 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83. p.182 따라서 만약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가 변했다고 한다면, 그 경우 적어도 산 자가 변했음에 틀림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84. p.184 도덕상의 죄와 형이상학적인 죄란 개인만이 이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의 자신의 죄로 파악하며, 그 본질상 속죄라는 것은 없다.
85. p.183 인간 정신의 자연본성 자체에 의해 그어진 이 내적 국경으로부터 비로소 그 결과로서 거주지라는 외적 국경이 생기는 것이다.
86. p.184 떤 것이든 항상 책임은 자유라는 형이상학적 영역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분별한 상태라면 책임을 구별하는 것은 필수불가결 하다.
87. p.186 그 비참한 사태를 체험하는 것은 미래의 타자다.
88. p.186 그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환경 파괴를 불러오는 산업자본주의적 발전을 멈추게 하는 것은 행복주의 원리로부터는 나오지 않는다.
89. p.187 오늘날 자유주의 경제를 주창하고 있는 미국에는 역으로 자원봉사자의 수가 많다.
90. p.187 그러나 자본제 경제의 본질적인 결함은 이런 종류의 ‘도덕 감정’에 의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91. p.188 우리의 ‘행복’이 미래의 타자를 단지 수단으로 대하고 목적(자유)으로 대하지 않음으로써 획득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윤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92. p.189 이탈리아에서는 최고 권력자 무솔리니가 민중에 의해 살해되었고, 독일에서는 히틀러는 자살하고 나치 간부는 규탄되었다.
93. p.189 일본에서는 개개인이 과거를 알고 반성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한다. 그 말은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미묘하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94. p.189 자유의 세계에서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쟁 중에 우리가 어땠는가를 스스로 추궁하고 검토하며 비판해야 한다.
95. p.190 칸트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통정적 이념이 작용하는 것이다.
96. p.190 그러므로 일본인이 세계사에서 하나의 위치를 점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전쟁책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97. p.191 나아가 그것을 보편화하는 것에 의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98. p.193 종군위안부 문제는 종종 종래의 한일관계 문제와 연속적으로 다루어지지만 거기에는 이질적인 물음이 존재한다.
99. p.194 그것은 여성의 관점에서 전쟁을 다시 보는 것, 세계사를 다시 보는 것이다
100. p.194 그것은 단지 ‘자유로워지라’,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고 하는 윤리적 의무로부터 생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