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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 1275 ~ 1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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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26대 충선왕(忠宣王, 1275~1325)은 원 간섭기에 개혁정치를 시행하고,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설치하여 원나라와 고려의 문화 교류를 촉진하고 학문을 발전시킨 임금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고려 임금으로서 그의 역할은 낙제점에 가까웠다.
몽골인과 고려인의 혼혈로 태어나
충선왕은 25대 충렬왕(忠烈王, 1236~1308)과 원나라(몽골제국) 5대 세조 쿠빌라이(khubilai khan, 1215~1294)의 딸인 쿠툴룩켈리쉬(제국대장공주)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장(璋), 몽골명은 이지리부카(益知禮普花)였다. 그가 살았던 시기 고려는 몽골의 부마국(駙馬國)이자, 반식민지였다. 고려에서도 아버지 충렬왕보다는 어머니인 제국대장공주의 권력이 더 막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 장은 1277년, 3살의 나이에 세자로 봉해졌다.
사냥에 빠진 방탕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아들
소년 시절부터 그는 아버지 충렬왕보다 어머니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다. 자주 사냥을 나가고 연회를 즐기며 방탕한 아버지를 싫어했던 것이다. 1290년 만주 일대에서 원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던 합단적(哈丹賊)이 원나라군에 패해 고려를 침범해온 사건이 벌어졌다. 충렬왕은 적이 쳐들어오자 강화도로 피난을 가고, 자신은 늙었다며 적과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반면 원나라에 있던 왕장은 자신을 총애하는 외할아버지 세조에게 요청하여 1만 구원군을 얻어 합단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1292년 고려로 귀국할 때 그는 아버지에게 몸을 굽혀 마중을 나오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아버지를 능가하는 권력을 갖고 있던 그는 고려에서 이미 왕처럼 행동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부자지간의 사이는 더욱 나빠지기 시작했다.
1297년 5월 그의 어머니가 갑자기 사망했다. 부부 사이가 안 좋은 충렬왕은 사냥을 자주 나가 애첩인 무비(無比)와 즐겨 놀았다. 충렬왕의 방탕한 생활에 속을 상했던 탓인지 그녀는 39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원나라에서 서둘러 귀국한 왕장은 어머니 죽음에 무관심한 아버지의 처사에 분개했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무비 탓으로 돌리고, 무비와 그 일당을 잡아들여 목을 베어 버렸다. 죽은 자들 대부분은 충렬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상을 마치고 다시 몽골로 돌아갔다.
충렬왕은 공주의 사망을 계기로 권력을 크게 잃었다. 이에 원나라 6대 성종 테무르에게 표를 올려 세자에게 왕위를 양위할 뜻을 밝혔다. 하지만 그의 양위는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1298년 1월, 세자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충선왕이 되었다.
왕위에 올라 개혁정치를 단행하다
충선왕은 왕위에 오른 후, 인사 제도부터 뜯어고쳤다. 자신의 장인인 조인규를 시중으로 삼는 등 새 인물을 채워 아버지 충렬왕 대의 측근 정치를 개혁하고자 했다. 새로운 권력 기구로 사림원을 키웠고, 권세가들의 대토지 소유 문제와 양민 착취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또 고려의 옛 제도를 복원하는 등의 정책을 취했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지나치게 빨랐고, 기존 기득권층의 반발을 불러왔다. 기득권층 가운데 상당수는 원나라 황실과도 끈이 닿아 있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그들은 왕을 몰아내기로 작정하고 충선왕의 약점을 공격했다.
왕비와 사이가 나빴던 충선왕
충선왕은 원 세조의 손녀인 부타시리(계국대장공주)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이들의 부부 관계도 매우 나빴다. 충선왕은 어머니를 속상하게 한 아버지를 비난했지만, 그 역시 충렬왕과 마찬가지로 몽골 공주를 놔두고 여러 후궁들을 거느렸다.
충선왕은 여러 부인 가운데 조비를 가장 총애하고, 부타시리를 멀리했다. 그러자 조비가 충선왕으로 하여금 공주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음모를 꾸민다는 소문이 돌았다. 궁궐 문에는 조비의 아버지 조인규의 아내가 무당을 시켜 왕이 공주를 사랑하지 않도록 저주하게 했다는 글이 나붙기도 했다. 질투심에 화가 치민 공주는 조인규와 그의 아내, 가족들을 잡아 가두고, 몽골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1298년 5월 원나라에서 온 사신은 조비를 원나라로 압송하고, 조인규 등의 재산을 몰수했다. 고려의 수상이 고문을 받고 후궁이 압송당하는 상황에서 충선왕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해 8월 충선왕과 공주는 원나라로 불려 들어갔다. 충선왕은 왕위에 오른지 불과 7개월 만에 폐위당하고 충렬왕이 복위되었다.
왕비 개가(改嫁) 시도 사건
충선왕이 폐위되자, 고려 정계에서는 충렬왕 세력과 충선왕 세력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 권력을 잡게 된 충렬왕 세력은 젊은 충선왕이 다시 복위될 것을 우려하여, 놀라운 공작을 펼쳤다. 그것은 부타시리를 충선왕과 이혼시켜 개가하게 하고, 그녀의 새 남편을 고려왕으로 받들자는 것이었다.
공주의 새 남편감으로는 충렬왕의 처남의 아들이자 24대 원종(元宗, 1260〜1274)의 손자인 서흥후 전(琠)이 선택되었다. 서흥후 전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전략에 충렬왕도 동의했다. 대단한 미남인 서흥후 전과 공주가 자주 만나면서 공주도 마음이 흔들렸다.
충선왕, 몽골에서 세력을 키우다
원 무종의 초상. 어려서부터 원에 머문 충선왕은 무종, 인종 형제와 친밀한 관계였고 그들의 재위 기간 동안 탄탄한 권력을 누렸다.
자칫 이혼당하고 왕위 복귀마저 어려워질 상황에 놓인 충선왕이었지만, 그에게도 반전의 기회가 생겼다. 1307년 원나라 6대 성종 테무르가 사망하면서, 차기 황위를 놓고 원나라 황실이 일대 혼란에 빠진 것이다. 성종의 사촌 안서왕 아난다와 성종의 조카 아유르바르와다가 유력한 후보였다. 충렬왕은 아난다를, 충선왕은 아유르바르와다를 지지했다. 그해 2월 아난다가 원나라 수도인 연경(燕京)에 입성하자, 아유르바르와다 일파가 정변(政變)을 일으켜 그를 체포했다. 아난다를 옹립하려는 세력을 단죄(斷罪)하는 일은 충선왕이 맡았다. 아유르바르와다의 형 카이샨이 먼저 황위에 올라 7대 무종이 되었다. 1311년에는 아유르바르와다가 8대 인종으로 즉위했다.
충선왕은 두 형제와 어린 시절부터 친밀한 사이였다. 게다가 정변에서도 정적을 제거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니, 충선왕은 두 형제의 재위 기간 동안 큰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충선왕은 카이샨을 황제에 옹립한 공으로 고려 국왕보다 위계(位階)가 높은 심왕(瀋王) 작위를 받았다.
이렇게 원나라에서 그의 권력이 강해진 반면, 충렬왕 세력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결국 서흥후 전과 공주의 개가를 추진한 사람들은 연경에서 처형당했다. 황제를 옹립한 공으로 권력이 막강해진 충선왕은 국왕인 충렬왕을 제치고 고려 정치를 직접 관장했다.
복위하였으나 원나라에 머문 왕
1308년 7월 충렬왕이 죽자 충선왕은 고려 국왕으로 복위했다. 그는 더 이상 고려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대호군(大護軍) 정자우(鄭子羽)의 아내 최씨를 불러 동침하기도 하고, 종친과 결혼했던 과부를 후궁으로 맞이하고, 심지어는 그가 충렬왕에게 후궁으로 들여보낸 숙창원비 김씨를 범하여 숙비로 책봉하기도 했다. 그의 난행(亂行)은 아버지를 능가했다.
충렬왕의 측근 정치를 비판했던 그였지만, 충선왕 역시 측근들을 중심으로 정치를 했다. 충선왕의 더 큰 문제는 귀국하여 왕위에 오른 후, 다시 원나라로 돌아가 1313년 3월까지 5년간 단 한 차례도 고려에 오지 않고 연경에서 전지(傳旨, 신하들에게 내리는 명령)만을 보내는 식으로 고려를 다스렸다는 점이다.
자식을 믿지 않은 왕
그는 원나라에 더 많은 인맥과 지지 기반이 있었고, 그곳에서의 생활에 익숙했다. 그에게 고려 왕위는 원나라에서 행세하기 위한 지위에 불과했다. 귀국할 의사가 없던 충선왕은 1310년 1월, 왕위를 세자 감(鑑, 몽골인 의비 야속진의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양위(讓位)는 그의 진심이 아니었다. 충선왕은 이때 자신의 아들 세자 감과 그를 지지한 자들을 죽이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오래도록 고려에 돌아가지 않자 원나라 황제가 직접 나서 귀국을 종용했다. 결국 충선왕은 둘째 아들인 강릉대군 도(燾, 감의 아우)에게 양위를 했다. 1313년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충선왕은 재위 5년 만에 상왕으로 물러앉고, 강릉대군 도는 즉위하여 충숙왕(忠肅王, 1294~1339)이 되었다. 충선왕은 충숙왕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고려에 왔으나,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다.
양위한 후에도 충선왕은 계속해서 전지를 보내 국정에 간섭함으로써 고려 정치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충렬왕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의 아들을 믿지 않았다.
충선왕이 고려에 남긴 재앙의 씨앗
고려 왕위를 양위한 후에도 충선왕은 여전히 심왕의 직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1316년 심왕의 지위를 충숙왕이 아니라, 연안군 고(暠)에게 물려주었다. 연안군 고는 충렬왕의 첫 번째 부인인 정화궁주 왕씨가 낳은 강양공 자(滋)의 아들이었다. 충선왕은 조카인 고를 양자로 키우며 총애했었다. 친아들보다 그를 더 총애할 정도였다.
충선왕이 가진 두 개의 왕위를 두 사람에게 나누어 준 사건은, 이후 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에도 이용되었다. 심왕 고가 고려 왕위마저 넘보는 사건이 벌어져, 고려 정치가 더욱 혼란에 빠진 것이었다. 고려 내부에도 심왕 고를 따르는 무리들이 넘쳐났는데, 이는 충선왕이 고려에 남긴 재앙의 씨앗 때문이었다.
만권당과 쓸쓸한 말년
심왕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원나라 인종은 그에게 수상 자리를 맡기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마다하고 만권당(萬卷堂)을 세우고 정치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서적을 모으고 조맹부(趙孟頫), 염복(閻復) 등의 학자들을 불러 모아 고전 연구를 하게 했다. 또한 고려의 이제현(李齊賢, 1287~1367) 등을 불러 고려와 원나라 학자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학문 연구를 하며 소일했다.
그런데 1320년 충선왕을 지지한 인종이 죽고, 그의 아들 영종 시데발라가 즉위하면서 그의 정치적 입지도 변했다. 고려 출신 환관 임빠이엔토쿠스의 모략으로 인해 토번으로 유배된 것이다. 그러다가 1323년 그의 매부(妹夫)인 태정제 이순테무르가 즉위하면서 유배에서 풀려났다. 충선왕은 2년 후에 몽골에서 죽었고, 죽은 후에야 고려로 돌아와 개성부 서쪽 덕릉(德陵)에 묻혔다.
그는 고려의 임금이었나
충선왕은 태어날 때부터 몽골과 고려 두 개의 피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원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자라는 신분에 만족해했다. 고려는 그에게 봉지(封地)에 불과했다. 그가 첫 번째 즉위 후 행한 정책을 반원자주정책이라 평하는 이들도 있지만, 원나라에 반대하는 고려의 자주독립을 위한 정책은 아니었다.
1308년 복위되었을 때는 귀족의 횡포를 억제하고,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였으며, 조세의 공평성과 인재 등용을 개선하는 등 혁신 정치를 단행했다. 그는 고려의 풍속과 관행을 유지하는 한편, 고려의 국체를 보전하는 것을 전제로 원나라의 제도도 수용했다. 하지만 그의 혁신 정치는 고려를 기반으로 삼아 원나라 정치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진정 고려의 혁신을 원했다면, 열심히 정치를 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려의 왕임에도 고려에 거의 머물지 않았다.
충선왕은 소금 전매제도를 통해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자 했지만, 권세가들의 소금 독과점과 그로 인해 백성들에게 소금이 돌아가지 등 않는 폐단이 심해지는 부작용이 더 많았다. 수시로 행해지는 인사 발령과 새로운 측근 정치, 환관의 득세는 고려의 정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특히 그가 연경에 체류하는 비용을 고려에서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그 비용은 고스란히 고려 백성들의 부담이 되었고, 국가 재정을 심각하게 고갈시켰다.
결국 충선왕은 고려를 위한 임금이라기보다는, 고려가 그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존재였다.
부마국 왕의 한계
그의 행실 가운데 아버지의 후궁을 자신의 후궁으로 삼은 것은, 흉노와 몽골에 아버지가 죽으면 친어머니를 제외한 아버지의 여자를 자식의 것으로 하는 증(蒸)이란 풍습이 있었으므로, 당시 상황에서는 이해될 수 있는 사안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물론 자식과도 대립하여 고려 정치를 어지럽힌 것이나, 왕위를 친아들과 조카 둘에게 나누어 주어 서로를 대립하게 만들어 고려에 큰 해악을 끼친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
원 세조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 포부가 컸던 그였지만, 고려 왕위를 원나라의 명령에 의해 하루아침에 빼앗기는 상황에 처하면서 그는 부마국 왕의 한계를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항상 불안했던 자신의 지위 탓에, 충선왕은 지위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아들마저 살해하고, 조카로 하여금 자신의 아들을 견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원나라에서 더 많이 살았고, 고려왕이 된 이후에도 원에서 훨씬 오래 머문 충선왕은 그의 몸에 흐르는 피처럼 고려의 반쪽 임금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