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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혹시라도 지금 인생의 최저점(最低點)에 서 계십니까?
자캐오 회개 사건은 아주 짧은 스토리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예리코라는 도시를 들르셨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그분의 동선을 뒤따르기도 하고 길가에 나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천천히 걸어가시던 예수님께서 큰 돌무화과 나무 앞에 딱 멈춰서셨습니다. 숨어있던 자캐오를 보신 것입니다.
당시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당시 자캐오는 예리코에서 무시 못할 존재였습니다. 죄인으로 소문난 사람이었지만, 지역 유지였습니다. 그런 자캐오가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가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아마도 그냥 모르는체 하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를 뚫어지게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꽤나 짖궂은 분이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끄럽고 송구스러웠던 나머지 애써 몸을 숨기고 있던 그였는데,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셨으면 좋으련만, 굳이 멈춰서서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의 시선과 자캐오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자캐오의 심정이 어떠했을 것인지는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긴장감이 밀려와 숨이 멎을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아니, 생면부지의 저분이 왜 내 앞에 서시는 거지? 왜 나를 빤히 바라보시는 거지? 저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데, 내 어두운 과거를 모두 알고 있을텐데, 오늘 이러다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인 창피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상황은 급반전됩니다. 자캐오의 걱정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언성을 높이지 않으십니다. 화를 내지도 않고 야단치지도 않습니다. 세상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복음 19장 5절) 자캐오는 ‘존귀하신 분이 내 집에 머물겠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생각하며, 다람쥐처럼 조르르 나무 아래로 내려섰습니다.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하신 예수님의 배려 앞에 자캐오의 눈에서는 쉼없이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크신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어둡고 스산했던 자캐오의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하고 찬란한 봄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반전은 그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주님 사랑 앞에 수전노 자캐오는 자신도 모르게 지갑을 활짝 열어버립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복음 19장 8절)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반전, 세상 사람들은 그의 구원 가능성을 0퍼센트로 봤는데, 주님께서는 그에게 100퍼센트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복음 19장 9절)
예리코는 해저 258m에 건설된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로 유명합니다. 서쪽 40㎞에 위치해 있는 예루살렘과 무려 1000m 넘는 고도차를 보입니다. 그런데 가장 높으신 예수님께서는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에서 살아가던 가장 키 작은 사람, 가장 짙은 어둠 속에 살아가던 자캐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의 집에 머무르시며 그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회개하는 그를 칭찬하시며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자캐오에게 베풀어진 즉각적인 구원의 선포,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자캐오는 열렬히 예수님을 뵙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가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열렬히 바라보고, 간절히 기다리고, 진지하게 들음을 통해 다가옵니다. 혹시라도 지금 인생의 최저점(最低點)에 서 계십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 크게 먹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머지 않아 기적처럼 그분께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 옛날 자캐오에게 하신 것과 똑같이 내 이름을 불러주시며,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욕망의 종말: 아버지의 인정
세관장 자캐오는 부자였습니다(루카 19,1-10 참조).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 정성을 보시고 예수님은 많은 사람 중에 자캐오의 집에 가서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캐오는 자기 집에 ‘기쁘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으기만 했던 삶에서 내어주는 삶으로의 전환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였는데 재물을 좋아하는 욕구를 동시에 지니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캐오는 왜 굳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려 했을까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없애고
싶었을까요? 돈에 대한 욕심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욕심을 제어할 수 없는데 욕심은 자아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욕심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아를 버리면 나를 움직일 선장이
없어집니다.
따라서 자아를 밟고 내 주인이 되실 분을 내 안에 모시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욕심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인정받지 못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인정해 줄 때 자녀들이 굳이 돈 욕심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님이 다 책임져 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사정이 바뀝니다.
부모가 자신의 참 부모가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눈을 다시 넣어줄 수도 없고 생명을 다시 줄 수도 없습니다.
내가 지금 세상에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불안이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감을 채우기 위해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이 커지는 시기가 사춘기입니다.
참 창조자, 참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 이 욕구는 그래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구는 결국 ‘아버지로부터의 인정’으로 종말을 맞습니다.
자캐오는 아버지의 인정이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자 곧 부모는 자녀 앞에서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쫓지 않습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같은 욕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모에게 인정받을 때를 생각하며 부모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의 위로를 기대합니다.
로빈 윌리엄스와 멧 데이먼이 주연한 영화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의 줄거리입니다.
고아인 ‘윌(멧 데이먼)’은 양부모에게 길러졌지만, 양아버지에게 학대만 받고 컸습니다.
지금은 MIT 공대에서 청소부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윌은 공부를 한 적은 없지만, 수학, 법학, 역사,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천재입니다.
MIT공대에 노벨 수학상을 수상한 램보 교수가 복도에 써 놓은 문제를 단숨에 풀어버립니다.
누가 그 문제를 풀었는지 찾아내기 위해 그 교수는 더 어려운 문제를 복도 칠판에 써 놓았고
윌이 그 문제를 풀어내는 것을 목격합니다.
하지만 반항기 어린 윌은 교수까지도 무시합니다.
그리고 지나가다가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친구가 보이자 달려가 마구 두들겨 팹니다.
그러다 자신을 말리는 경찰까지 폭행합니다.
이전까지는 천재적인 머리로 자신을 변호하여 풀려났지만, 경찰 폭행은 수천만 원의 보석금이 아니면 영창을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램보 교수는 노벨상을 타기는 하였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내어놓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재 윌을 빼내기 위해 두 가지 제안을 합니다.
첫 번째는 자신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여 램보 교수를
도와줍니다.
그러나 정신과 치료는 잘 안 됩니다.
정신과 치료를 하는 사람들보다 윌이 한 수 위였기 때문입니다.
램보는 마지막 희망으로 자신의 친구 숀에게 부탁합니다.
숀은 얼마 전 아내와 사별하여 거의 폐인처럼 사는 시골 대학 심리치료 교수입니다.
숀을 본 윌은 그림 하나를 보며 숀을 다 파악합니다.
배 위에 있는 외로운 남자의 그림입니다.
그러며 아내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함부로 말을 합니다.
역시 숀도 화가 나서 윌에게 폭력을 쓰려 합니다.
그러나 어쩐 이유에서인지 숀은 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만나겠다고 합니다.
숀은 다른 정신과 의사들과는 다르게 그가 함부로 말한 아내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말해줍니다.
천재인 것은 알겠지만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아픈 면을 말했으니 윌도 마음을 열라고 합니다.
윌은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이 어렸을 때 부모에게 버려지고 양자로 입양되었으나 그 집에서도 양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했던 것을 말합니다.
윌은 어쨌건 그런 환경 때문에 자신이 지금 망나니처럼 사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었습니다.
숀은 말합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윌은 자신도 안다고 말했고 자꾸 그러니 화를 내다가 정말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전까지는 이런 위로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잘난 척하며 남을 깔보며 사는 삶이 합리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의 위로를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빼낸 램보 교수보다는 아버지와 같이 자기를 안아주는
숀에게 위로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누구도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 아프게 했던 여인에게 용서를 청하고 그녀를 찾아 떠나며 영화가 끝납니다.
우리는 누구나 세상 것에 욕심을 내는 사람은 나의 창조자가 될 수 없음을 압니다.
부모님은 자녀 앞에서 그런 것들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우리는 참된 창조자, 곧 세속-육신-마귀에서 멀어져 순결한 사랑만을 간직한 이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부모, 혹은 창조자의 위로만이 나를 모든 욕망에서 자유롭게 해 줄 참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성체는 바로 이런 목적으로 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인정하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처럼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당신과 하나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임을 믿게 해 주십니다.
이 믿음만이 우리가 욕망의 덫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세상에 이런 위로와 인정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욕심을 부리며 사는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미사의 목적은 이렇게 내 안에 자아와 생존 욕구를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배하시게 하기 위함이지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치 맛있는 음식과 몸에 좋은 음식을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욕심과 인정,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9,1-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셨을 때 자캐오를 만나신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소외당한 이 자캐오는 예수님의 자비를 입는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2절) 그는 세관장이었다. 그는 탐욕에 찌들고 재산 증식이 유일한 목표인 사람이었다. 세리들이 거의 다 그러한 사람이었다. 이 가운데서 자캐오는 주님의 자비를 얻는 사람이 되었다. 자캐오가 회심한 과정을 보자. 그는 예수님을 보려는 간절한 마음에서 돌무화과 나무로 올라갔다. 그 안에서는 구원의 씨앗이 싹텄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고는 자캐오에게 손길을 뻗으신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5절) 여기서 “군중에 가려”(3절)라고 했는데, 군중은 그의 죄를 가리킨다. 그는 군중을 떠나, 즉 죄를 떠나 나무 위로 올라갔고 거기서 군중의 방해 없이 예수님을 볼 수 있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는데 장애가 되는 군중을, 죄를 무시하고, 대신 “바보 같은 열매”를 맺는 돌무화과나무 올라갔다. 우리도 끊임없이 죄를 벗고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뵙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오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본 것만도 큰 은총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게 되었다. 은총이 쏟아져 내리고, 사랑으로 마음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8절) 절반을 내놓겠다는 것은 절반은 갖겠다는 것이 아니라, 갚을 것이 있다면 갚기 위해서이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9절) 자캐오는 칭찬 들을 만한 사람이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가 천국의 문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많은 재물이 그를 하늘 나라의 입구로 데려다주었다. 재물이란 장애가 아니라, 영광을 얻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유가 아니라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이 죄이다. 예수님은 자캐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신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재산을 내어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러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0절) 모두가 잃은 이들이며 죄 없으신 유일한 분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렸을 때 자석을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막대자석의 경우, 같은 극일 때는 서로 밀어내고, 다른 극일 때는 서로 붙는 모습이 정말 신기했습니다. 또한 그냥 평범한 못이 자석에 붙으면 다른 못을 잡아당기는 자성이 생긴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철 자체에도 자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자석이 되지 않습니다. 자석에 붙어서 자장을 걸어줄 때 비로소 자석이 됩니다.
이를 떠올리며 우리가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아버지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거룩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 붙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주님께 붙어 주님 뜻에 맞게 사는 것을 하나의 걸림돌, 짐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처럼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세상에만 붙어 있으려고 하니, 하느님의 뜻과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포도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 떨어져 나가면 주님께서 인정하신 열매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세상 것에 꽉 붙어 있으려고 하면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욕심을 과감하게 버릴 때, 주님께 꼭 붙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우리도 하느님처럼 거룩해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자캐오를 보십시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동포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 가져다주고 있으면서 벌어들인 세상의 부입니다. 세상 것에 꽉 붙어 있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노력도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세관장이고 부자였음에도 앞질러 달려가 아이처럼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갑니다. 예수님을 보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노력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부르셨고 자캐오는 기쁘게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재산을 내려놓습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횡령한 것을 네 곱절로 갚겠다는 것은 모든 재산을 포기한 것입니다. 주님께 붙어서 주님처럼 거룩해진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붙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세상 것인가요? 아니면 주님인가요? 주님께 붙은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한가? 그렇지 못한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아리스토텔레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묵시3,16)
성령이 충만한 이들은
은총으로
뜨겁게 타오르지만
게으르고
세속적인 이들은
그들의 욕망으로
차갑게 식어버린다네.
영적인 이들 안에서
성령의 불은
활활 타오르며
그들을 성장시키지만
미지근한 이들 안에서는
쉽게 꺼져버리고 만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돌무화과나무 열매는 일반무화과나무와 달리
가축 사료로 밖에 사용될 수 없었습니다.
이 열매를 가난한 이들이 식량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간 것은
서민들을 짓밟고
높은 자리(세관장)에 올라갔음을 상징합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작은 키의 자신을 놀리지 않고
우러러볼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재물로써 그들의 위에 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서민들에게 부당한 세금을 거두며
부당한 착취를 일삼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있는 그대로의 자리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 자리에 내가 함께 머무르겠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상처와 트라우마에 머물지 말고
얼른 씻어내고 주님의 초대에 기쁘게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죄인이었던 자캐오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변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을 것이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3,1-6.14-22
나 요한은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1 “사르디스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말한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2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나는 네가 한 일들이 나의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3 그러므로 네가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들었는지 되새겨,
그것을 지키고 또 회개하여라.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내가 도둑처럼 가겠다.
너는 내가 어느 때에 너에게 갈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4 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다.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5 승리하는 사람은 이처럼 흰옷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고,
내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6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14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아멘 그 자체이고 성실하고 참된 증인이며 하느님 창조의 근원인 이가 말한다.
15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16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17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18 내가 너에게 권한다.
나에게서 불로 정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흰옷을 사 입어 너의 수치스러운 알몸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여라.
19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20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21 승리하는 사람은,
내가 승리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
22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9,1-1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