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책 한권
80대에 들어서면서 관념적이던 죽음에 대한 생각이 현실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지금 죽음으로 들어가는 프런트라인 앞에 서 있다는 각성이 생겼다. 언제 갈지 모르지만, 가는 날까지 이 시간을 잘 보내야 하는 일이 절실해졌다. 장거리든 단거리든 뛰는 선수는 골인 선이 보이면 스퍼트를 시작한다. 내게 남은 이 시간은 인생을 마무리하는 스퍼트(주의집중의 의미)의 시간이다.
한자문화권에서 현대 최고의 불교학자이자 선(禪) 수행자인 남회근(1918~2012) 선생이 제자들에게 수행을 가르치면서 말씀했다.
“도를 이루고 못 이루고는 잠시 덮어두더라도, 살면서 병도 적고 번뇌도 적으며, 가야 할 때는 선뜻 떠나 스스로 편하고, 다른 사람에게 누도 끼치지 않으니, 이야말로 일등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나도 ‘가야 할 때는 선뜻 떠나 스스로 편하고, 다른 사람에게 누도 끼치지 않고’ 싶다.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온갖 누추한 꼴을 다 보이고 갈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노력도 안 해보겠는가. 살아온 날에 수행 공덕이 부족했더라도, 주의집중의 시간인 이제부터라도 마무리는 잘하고 싶다. 내가 생각한 잘사는 방법은 정해 놓은 루틴을 지키면서 하루씩 버티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 타이밍에 만난 책이 《놓아버림》(데이비드 호킨스 지음, 박찬준 옮김, 판미동, 2013)이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1927~2012)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책이다(원제: Lettlng Go: The Pathway Of Surrender, 미국에서 2012년 발간.).
나는 뉴욕의 정신과 의사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를 《놓아버림》을 만나기 이전, 1997년에 《의식혁명》(데이비드 호킨스 지음, 이종수 옮김, 한문화)이라는 책으로 만났다(원제 Power vs. Force). 《의식혁명》에서 호킨스 박사는 운동역학(Kinesiology) 테스트를 이용해 인간의 의식 수준을 수치로 제시했다. 의식 수준에 따라 1에서 1000까지의 의식 지도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붓다나 예수의 의식 수준은 인간의 의식 수준으로는 최고인 1000에 해당한다. 인도를 식민 통치했던 대영제국의 의식 수준은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타국을 착취하는 나라로 175였다. 반면 마하트마 간디의 행동 동기는 보통 사람의 의식 범주에서는 정상에 가까운 700이었다. 이 투쟁에서 간디가 이긴 것은 그가 가진 진실의 힘이 월등히 컸기 때문이다.
“인간 개개인의 마음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연결된 컴퓨터 터미널과 같다. 이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는 인류의 의식 세계 자체이고, 우리 자신의 의식은 단지 인류의 공통의식에 뿌리를 둔 데이터베이스의 개인적인 표현일 뿐이다.”
《의식혁명》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30년간 연구한 결과물이다. 나는 한때 이 책에 반했다. 사람의 의식 수준을 수치로 매긴다는 이 발상이 놀랍고도 신선해서였다.
호킨스 박사는 《의식혁명》 이후, 진보된 자각 상태와 깨달음에 주안점을 둔 책을 여러 권 썼고, 여러 모임에서 강연했다. 수없이 거듭해서 받는 질문을 통해 의식의 진화와 깨달음을 가로막는 일상의 장애가 ‘부정적 감정’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기법을 알려주는 것이 현실적인 해결책이었다. 《의식혁명》이 이론서라면 《놓아버림》은 실천서다.
《놓아버림》에서는 ‘부정적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라고 한다. 감정을 억제하거나 바꾸려 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둔다. 감정을 비난하거나 도덕을 따지지 않고 분출하지도 않는다. 감정을 생생히 느끼기만 하면서 어떻게든 바꿔 보려는 노력을 모두 포기한다. 감정을 바꾸려는 노력을 포기하면 감정이 달라지면서 강도가 약해진다. 저항 때문에 감정이 지속되는 것이다. 감정에 저항하지 않으면 감정 이면의 에너지가 사라지면서 감정이 없어진다.
불교도에게는 너무 익숙한 방법 아닌가. 위빠사나 명상법이다. 붓다는 몸(身, 호흡·행동, 몸의 각 기관), 느낌(受), 마음(心, 탐심·진심·치심 등), 법(法, 감각적 욕망·악의·나태와 졸음·들뜸과 후회·의심)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상태에 주의 집중하여, (또 하나의 내가 있듯이) 관찰하는 수행을 통해 세간에 대한 탐욕과 불만에서 벗어나라고 했다(《대념처경》). 알아차리고, 주의집중 하여 머물고 바라봐서 벗어남은 초기불교의 수행법이다. 생각이나 감각도 무상(無常)한 것이다.
호킨스 박사는 우리의 마음이나 생각이 무엇보다도 감정에 휘둘린다는 점에 착안하여 부정적 감정을 놓아버리라고 했다. 호킨스 박사는 ‘놓아버림’은 붓다의 가르침을 적용한 기법이라고 밝혔다. 깨달음은 성취하지 못하더라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호킨스 박사는 자신이 이 수행을 실천했다. 편두통, 피부염, 궤양, 위염, 게실염, 통풍, 근시와 난시, 요통 증후군 등 20가지가 넘는 만성 질환에 시달렸는데, 그는 이 질병들을 의학적 치료가 아닌 ‘감정을 놓아버림’으로 해결했다고 고백했다. 마음은 생각과 감정으로 몸을 통제한다. 몸을 치유하려면 생각과 감정을 바꿔야 한다. 놓아버림은 일상에서도 매우 쓸모가 있지만, 특히 삶의 위기 때 사용하면 크게 괴로울 일을 미리 막거나 가볍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면서 권고한다. 아마도 죽음의 순간에 유용할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감동한 장면이 있었다. 호킨스 박사가 완전한 내적 정적 상태에 빠져 뉴욕의 5번가를 걷고 있을 때 마주친 한 노신사가, 호킨스 박사의 내적 정적 상태를 한눈에 알아보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자신을 완전히 열었다고 한다.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책에 쓰지 않았다. 호킨스 박사는 그 신사가 자신의 진정한 큰 나를 깨닫고, 완전한 평화 속에 존재하는 사람임이 틀림없다고 했다. 자본주의의 심장인 뉴욕의 번화가에서, 깨달음을 말하는 고수들의 만남이라니!
호킨스 박사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성취한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도달한 존재의 상태에 의해 세상에 기여한다.”라고.
이창숙 / 불교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