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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묵상글 ( 주님 부활 대축일. - 진리 안에 자유로운 삶.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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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진리 안에 자유로운 삶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우리도 거듭나는 부활의 삶을 충직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가로막는 장애에서 매 순간 다시 살아나길 희망하며 부활의 삶을 자유라는 측면에서 묵상하는 가운데 깨우침을 주시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사람은 이 자유의지를 사용함으로써 사람의 사람됨을 확인 받게 됩니다. 창세기말씀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은 ‘피조물’로써의 존재 조건을 깨뜨렸다는 데 핵심이 있습니다. 곧 물고기가 뭍으로 뛰어나온 격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유를 왜곡, 남용하여 피조물의 존재성을 거부하고 마침내 하느님으로부터 이탈한 인간은 죄의 노예 상태로 살게 되었고 오히려 부자유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 거짓이나 악을 선택하면 일시적으로 자유로울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고 후회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인간적인 욕심을 선택하면 자유가 아닌 속박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 당장은 어렵고 힘들지 모르지만 영원히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삶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진리 안에 머물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매번 강론을 길게 하시는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강론을 시작하면 아예 눈을 감고 쉬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신부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믿습니까?” 하고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깜박 졸고 있던 신자분이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신부님 말씀은 정말 질립니다. 질리고말고요!” 진리의 말씀은 질릴 수가 없는 말씀인데......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15,42-44). 하고 말하였습니다. 부활한 몸과 육적인 몸의 차이는 바로 자유에 있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몸은 제한에 묶여있지만, 영적인 몸은 경계, 한계, 속박에 더 이상 매이지 않는 자유의 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야말로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7,15)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로마7,19-23). 하고 말합니다. 이만큼 자유를 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유를 선택해야 하고 또 누려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의 자유야말로 부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속은 알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좋아 보여도 속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인 것 같은데 속은 누구보다도 깊고 넓은 마음을 가진 분도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어려움을 당해봐야 그 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서도 변함없는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여야 합니다. 삶의 부활은 바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성인들의 기쁨은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충만성은 사랑으로 죽는 것입니다. 애덕과 사랑을 거느리는 곳, 그런 곳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까롤로 까레또). 그러므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그분과 함께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증오가 그대를 얽어매는가? 용서하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기심이 그대를 속박하는가? 사랑하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죄가 그대를 괴롭히는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재물이 그대를 집착하게 하는가? 나눠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죽음이 그대를 두려움에 가두는가? 부활을 믿어라. 자유로워질 것이다(차동엽).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부활의 희망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활은 이 세상에 살던 개똥이의 고유성과 인격 전체의 부활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그의 인간성에 대한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부활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부활을 희망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부터 삶의 부활을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하느님의 뜻대로 쓸 수 있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왜 여자에게 먼저 나타나셨는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도 여자의 입이 가볍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사실 입이 싼 남자도 있습니다. 싸도 너~무 싼 남자 말입니다. 그러니 여자분들 섭섭해 생각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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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부활 담화문
“마음 속에서 날이 밝아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2베드 1,1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 부활, 악에 맞선 선의 승리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봅니다. 폭력과 억압은 세상의 다양한 영역에서 일상적인 것이 되었고, 많은 불평등이 인간이 활동하고 존재하는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악의 힘에 눌려 그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람의 처지를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사람은 자기 길의 주인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 길을 걸으면서도 자신의 발걸음을 가눌 수 없습니다”(예레 10,23). “악마와 그 부하들”(마태 25,41)이 활개치는 세상에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사나운 늑대가 되고 섬뜩한 맹수가 됩니다(호모 호미니 루푸스, Homo homini lupus).
이렇듯 암울한 세상의 현실 앞에서, 오늘 우리는 복음서가 전해주는 ‘빈 무덤’의 소식을 듣습니다. 거기에는 여인들과 제자들이 목격한 빈 무덤이 있습니다(루카 24,3 참조). 빈 무덤은 분명한 사실이고 완전히 새로운 현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악에 맞서 아버지의 선을 행하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예수님을 세상의 모든 악에 대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빈 무덤을 보고 그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들은 여인들은 처음에는 너무도 깜짝 놀랐지만(마르 16,5 참조), 불가능한 것을 받아들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며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정말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오늘도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희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느님 아버지를 믿으며 어두운 세상에서 선한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폭력과 갈취, 증오와 복수 같은 악의 모든 행위는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고 그 길의 끝에서 사람은 결국 무참히 실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참 생명의 힘을 믿고 선으로 악에 맞서 싸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모든 이는, 사람이 사람에게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는(호모 호미니 아미쿠스, 프라테르, Homo homini amicus, frater) 세상을 꿈꾸고 열망하며 이뤄갑니다.
2. 부활, 두려움에 맞선 사랑의 승리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분께서 무덤에 묻히셨을 때 그분께 희망을 두고 그분을 따랐던 제자들의 절망과 상실감을 전해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지만(루카 24,21 참조) 그분의 죽음으로 그들은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었고 무엇보다 너무도 두려웠습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사람들이 두려워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다고 했습니다(요한 20,19 참조).
우리도 두려워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아담이 처음으로 입을 열어 고백한 감정이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었다고 말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10). 인간의 죄는 그의 창조주인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만들었고, 하느님께 죄를 지은 이후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갖고 살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사람이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노예처럼 예속된 삶을 살아가며 스스로 악과 죄에 빠져 산다고 말합니다(히브 2,15 참조).
이 모든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도 “아직 어두울 때에”(요한 20,1),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여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에 나오는 이 여인들은 마음속에 큰 슬픔과 두려움을 안고 있음에도 예수님을 찾고 그분을 뵙고자 하는 깊은 열망을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잃은 아픔을 마음에 담고 있었지만, 그분이 살아계실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쏟으셨던 사랑을 기억하며 끝까지 스승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멈추지 않은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신실한 사랑, 예수님과 맺은 깊은 우정이 없었다면 여인들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무덤에까지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이들만이 그분의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이겨내는 힘입니다. 주님께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한 사람은 “마음 속에서 날이 밝아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2베드 1,19) 생명의 주님께 나아가는 자신의 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3. 부활, 주님을 따를 용기와 믿음의 승리
맨 먼저 ‘빈 무덤’을 본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그분께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니 거기서 그분을 뵙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뵙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계신 “갈릴래아”(마르 16,7)를 향해 다시 걸어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뵙기 위해 제자들은 다시 한번 일어서서 주님이 계신 곳을 향해 걸어갈 용기와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찾아나설 갈릴래아는 어디입니까? 갈릴래아는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는 이 세상의 모든 곳이고,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부활의 빛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든 곳이며, 재화와 물질을 나누고 성찬의 식탁에서 빵을 쪼개는 자리에 모여 서로 형제적 사랑과 화해를 이루는 모든 곳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복음서의 제자들처럼 우리에게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우리의 인생길을 다시 걸어갈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앞에는 여전히 세상의 많은 유혹과 갖가지 시련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걸어가시며 우리가 걸어갈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먼저 가시고 열어주신 그 길을 따라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아버지의 오른쪽에 이르기까지(콜로 3,1 참조), 한 걸음 한 걸음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아버지의 집을 향해 올라갑시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생명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이겼습니다. 마냥 승리할 것 같았던 죽음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완전히 패배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 안에 살고 사랑으로 이뤄낸 인생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가 이미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이미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우리 자신의 파스카를 살아냅시다.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 인생길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구합시다.
2024년 3월 31일
주님 부활 대축일
청주교구장 김종강 시몬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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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3.31 05:55
- 마음 아픔이 마음 새김이다
*** 내용은 올라와 있지 아니합니다.
<06:55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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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공동체, 단톡방에 올라온 것을 확인하여 13:45. 강론 내용글 올립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따라
광야를 지나고 홍해를 건너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주님을 따라서
파스카 여정을 가야 한다는 묵상을 오늘 저는 했습니다.
왜 이런 묵상을 했냐면 제가 전보다 좀 겸손해졌기 때문입니다.
전엔 겁이 없기 때문인지 또는 너무 자신만만해서인지
그냥 가면 되는 것 아냐? 하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내가 가면 그것이 길이라고도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또 같이 여정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같이하곤 하였고,
수련자들과 같이 걷곤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쉽고 가까운 길은 혼자 갈 수 있고 혼자 가는 것이 편하다.
그러나 멀고 힘든 길은 혼자 가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엄두를 냈더라도 중도에 포기할 것이다.”
그렇지만 하느님께로 가는, 이 세상에서 저세상으로 가는 파스카의 여정은
혼자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럿이 가고 떼로 몰려가도 불가능합니다.
그렇습니다. 파스카 여정은 이 세상 길 떠나듯 떠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번 이스라엘의 파스카 여정을 생각해봅시다.
모세 없이 이집트를 떠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모세처럼 하느님께 부르심과 사명 받지 않으면
그 누구도 이집트 곧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아니 하고 떠나야 한다고 얘기하지도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하늘에서 우리에게 오신 분,
우리를 하늘로 데려갈 사명을 가지고 오신 분,
하늘과 우리 사이의 길을 너무도 잘 아시는 분이며
우리의 모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셔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몸소 말씀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찾는 부자 청년에게는 당신을 따르라고 초대하셨고,
제자들에게는 좀 더 강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런데 이 말씀과 초대와 명령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제 생각에 경청과 응답과 순명이 필요하고
믿음과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파스카 여정을 주님의 말씀을 따라 떠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이 옳다는 믿음이 무엇보다 먼저 있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에게 다른 말들 곧 이설(異說)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날 때도 그리고 여정 중에도
떠나지 말자는 이설과 그만두고 돌아가자는 이설이 많았는데,
그것은 파스카 여정에는 어려움이 많고도 많기 때문입니다.
우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는 것이 어렵고,
가는 중에 부닥치게 되는 어려움도 만만치 않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늘나라가 가야 할 곳이고 갈 수는 있는 것인지
믿음이 흔들리면서 가고자 하는 마음도 흔들리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제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가 되었을 때
그때까지 그렇게 지혜롭던 분이 저의 어머니 같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을 두고 떠나는 것 특히 혼자인 저를 두고 떠나는 것이
어머니 뜻대로 되지 않으셨는지 전에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
집착을 그렇게 하시고 수시로 제게 전화를 거시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저희를 두고 하느님께로 가시라고 매정하게
어머니를 하느님께 떼밀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마음 아픕니다.
이 매정한 짓을 수도자인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리했는데
이제는 제가 저에게도 그 매정한 짓을 해야 하겠지요.
저희 어머니는 저희를 두고 떠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가신 것입니다.
물론 저희를 두고 떠나신 것이지만 하느님께 가기 위해 떠나신 거라는 말이고,
저희 어머니 덕분에 우리 인생 여정은 파스카의 여정을 가는 것이라는 것을,
곧 이 세상에 살다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라는 것을 관념적으로 그리고 막연히
생각하며 지냈는데 마음이 아플 때마다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 아픔이 마음 새김입니다.
어머니를 하느님께 떼민 것이 마음 아플 때마다
어머니 가신 그곳으로 저도 따라가야 한다고 마음에 새기는 곧 명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죽음과 부활의 길을 먼저 가신 주님을 우리는 따라야 하는 겁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시고 초대하시고 명령하십니다.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라라.”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
그리고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우리는 매일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위에 있는 것을 선택하고,
다른 이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한 파스카의 여정을 가게 되고,
기쁘고 행복한 파스카 여정을 가게 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여러분 가정안에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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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주님의 날인 주일이 한 주간의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오늘은 전례 주년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과 악의 세력을 이겨내신 주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 역시 부활하리라는 큰 희망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큰 기쁨으로 오늘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강론을 시작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보고 싶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불행을 함께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성공을 진정으로 축하해 주는 사람일까요?”
불행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과 함께해 주는 것은 큰 위로와 힘이 됨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불행을 함께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성공을 진정으로 축하해 주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랫동안 일이 풀리지 않아 고생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변의 친구들은 힘들어하는 친구와 함께하면서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대박이 난 것입니다. 사업이 잘 풀리면서 경제적 여유와 안정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주변에 함께해 준 친구들보다 훨씬 더 잘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친구들이 그의 곁에서 떨어져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 친구가 돈 벌더니 변했어.”
친구들에게 고마워서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는 “너 돈 자랑하는 거니?” 하면서 인상을 쓰더라는 것입니다.
불행을 함께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공을 진정으로 축하해 주기란 정말 힘듭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우월성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더 우월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 시기와 질투가 작동하면서 함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행보다 성공을 진정으로 축하해 주는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함께 기뻐합니다. 그렇다면 이 기쁨에 함께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냥 무시해야 할까요? 주님의 진정한 친구가 되려면 이날에 더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부활의 기쁨을 나의 이웃들에게도 알려야 하고, 진정으로 기뻐하는 삶을 스스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따로, 나 따로 삶을 살면 어떨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지, 내가 부활한 것인가?’라면서 자기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주님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은 함께 기뻐해야 하는 날입니다. 그 기쁨을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진정한 친구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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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자신의 소명을 사랑하면 필시 세상도 사랑하게 된다(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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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요한 20,1)
알렐루야! 부활 대축일입니다.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는 다 같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주간 첫날 새벽에 발생한 일을 전해줍니다. 곧 막달레나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일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곳에서 본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이 제일 먼저, 첫 번째로 본 것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요한 20,1)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이 어떤 의미인지를 시사해주는 첫 번째 표상입니다.
그렇다면 돌이 치워져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사실, 부활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막았던 돌이 닫혀 있든지 막혀 있든지 상관없이 드나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부활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주간 첫날 저녁에 두려워서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는 데도 들어오셨습니다(요한 20,19). 그러니 돌이 치워진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빈 무덤’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부활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그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큰 돌’을 치워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볼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는 ‘돌’, 주님의 은총과 사랑과 용서를 나눌 수 없도록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돌’,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는 ‘돌’, 우리 자신을 짓누르고 무겁게 만드는 ‘돌’, 바로 그 ‘돌’을 치워내어야 우리는 그분의 부활을 볼 것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그 ‘돌’을 치우는 것이 바로 부활의 삶임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의 생명을 짓누르고 있는 이 죽음의 ‘돌’을 치우면 우리도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분의 부활을 볼 수 없도록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이 돌,
우리의 생명을 가로막고 있는 이 돌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욕심과 탐욕과 이기심일 수 있고, 상처와 분노와 미움일 수 있고, 자존심과 명예심과 높아지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눈을 가로막고 있는 온갖 종류의 생각과 우상들일 것입니다. 그것들은 우리 각자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갉아먹는 벌레들이요, 주님 사랑을 실행하게 하는 것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장애물들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을 찢으셨고, 당신의 거처인 몸의 궁전을 허무셨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바로 서로를 분리시키고 단절시키는 불통의 장막을 걷어내는 것이 부활의 표시오, 부활의 삶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어렸을 때 읽은 동화가 하나가 생각납니다. 우리가 잘 아는 19세기 말의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거인의 정원] 입니다.
거인이 집을 비운 사이에 아이들이 거인의 정원에 들어와 놀았고, 정원에는 꽃이 피어나고 새들이 지저귀고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와 머물렀다. 7년이 지난 어느 날 거인은 돌아왔고, 그는 정원이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변한 것을 보고, 어린이들이 못 들어오도록 높은 담장을 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원에는 꽃도 시들고 새들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고 을씨년스런 세찬 바람만 불었다. 거인은 봄을 기다렸지만 봄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봄을 기다리기만 하던 어느 날, 마침내 봄이 찾아왔다. 그런데 정원에는 뜻밖에도 담벼락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들어와 놀고 있었다. 아이들이 들어와 놀자 꽃들이 피어나고 새들이 다시 찾아와 노래하고 싱싱한 봄바람이 머물렀다. 그제야 거인은 정원 둘레에 친 높은 담의 벽을 헐어버리고 어린이들이 들어와 놀 수 있게 하였다.
그렇습니다. 삶의 울타리를 높이 세우고 그 삶 속에 자기를 가두는 사람은 부활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며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돌’을 치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부활의 첫걸음은 우리를 가두고 있는 장벽을 허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부수는 일입니다. 마치 병아리가 껍질을 벗어나 태어날 수 있듯이, 번데기가 허물을 벗어야 나비가 될 수 있듯이,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안전장치인 장벽을 깨부수는 일입니다.)
우리는 씨앗이 땅에서 썩어 없어지는 것을 보고 ‘씨앗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싹이 텄다’고 말하듯이, 부수어지는 일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며,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며, 땅속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올라가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이들이 나의 정원에 들어와 놀 수 있도록 돌 벽을 허물어야 할 일입니다. 남에게 던지려고 쥐고 있는 ‘돌’을 놓아야 할 일입니다. 곧 부활은 바로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이 ‘돌’을 치우는 일입니다. 타인과 이웃과의 높이 쌓아놓은 벽을 허는 일입니다.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돌’을 치우고 자유로워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용서하는 일입니다. 곧 새 생명에로의 전환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알렐루야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요한 20,4)
주님!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가듯, 목동들이 구유로 달려가듯,
고귀한 경쟁에서 질세라 빨리 달리게 하소서!
무덤을 들여다보지만 말고, 안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비어져 나오게 하소서.
비어진 눈으로 보게 하시고, 본 바를 믿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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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240330 06:52 ㅣNo.171051
먼저 오늘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시는 세례자분들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세례는 두 가지 은총을 우리에게 줍니다. 하나는 지난날 내가 범했던 모든 잘못을 용서받는 은총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입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모두 형제와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원래 세례는 정화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세례는 회개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세례를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는 성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정화와 회개의 상징이었던 세례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품격이 올라갔습니다. 교황님께서 우리 성당을 방문해 주면 우리 성당의 기쁨이 더 크듯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례는 죄를 용서받는 성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성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부활 성야 미사의 독서와 복음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고,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자식을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셨고,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만을 믿고 광야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바다를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거센 폭풍우에서 구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그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와 잘못으로 고난과 고통이 다가왔지만,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우리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유배지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향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이 되십니다.
부활 성야 독서와 복음은 ‘빈 무덤’에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천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셨던 곳, 표징을 보여 주셨던 곳 갈릴래아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새로운 탄생이 아닙니다. 부활은 머나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부활은 슬픔에서 기쁨으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다시금 허리띠를 동여매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는 더 이상 치욕과 굴욕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구원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12명의 제자가 시작한 하느님 나라 운동이 2000년 역사를 이어온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하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초대교회의 많은 신자는 십자가를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부활’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던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부활하였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고,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환상입니다. 씨를 뿌리지 않고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재물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조직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하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외면하는 교회는 언제나 위기를 겪었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고통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보내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교회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아픔에 함께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활의 삶입니다. 오늘 세례를 받으시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신 분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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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그리스도교의 부활은 세상의 부활과는 사뭇 다릅니다.
가끔 세상적인 이런 말을 듣습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늘 사람을 고쳐 쓰십니다.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을 고치십니다. 어둠에 빠져있던 제자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실수하고 잘못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들이 희망을 품고 생동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를 포함한 두 제자는 무덤을 향해 달려갑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천천히 걸어가도 되련만 그들은 달려갑니다.
무엇을 바란 것일까요? 무엇을 보고 싶어서 달려갔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희망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일어서고 싶었던 그들의 소망이 뜀박질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이곳 갑곶순교성지 조배실에는 ‘부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십자가는 버려지고 부서지고 깨지고 끊어진 성물들을 모아 커다란 십자가로 부활시켰습니다. 물론 더 이상 하나하나가 성물의 역할을 할 수 없지만 커다란 십자가 안에서 그 각자의 성물들은 빛을 내고 있습니다. 죽었던 성물들이 부활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온 마음을 다해 달려봅시다. 부족하고 실수하고 잘못하는 우리지만 주님께 달려가는 열정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모습으로 안내하시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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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3월이 지나갑니다.
어떤 철학자가 말했던가요.
인간은 모두 던져진 존재이다.
이 말의 의미는 이럴 것입니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다.
태어났으니 죽음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우리 선택의 몫이 아니다.
우리 몫은
시작과 마침 사이의 것들이다..
기뻐할 것인지, 슬퍼할 것인지
열정으로 걸어갈지, 무기력하게 끝을 기다릴지
벌써 3월의 마지막입니다.
저는 다시 한번 열정을 품어보겠습니다.
힘겨운 일을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어차피 가야 한다면 즐겁게 가겠습니다.
벌써 3월이지만 아직 9달 남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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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키엣 대주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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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축하합니다!”
-예수님 부활 만세, 우리들 부활 만세-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축하합니다!
예수님 부활, 우리들 부활을 축하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우리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덕분에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기쁜 소식은,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모두 파스카의 주님과 하나되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일 4월1일은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만개한 파스카의 봄꽃들과 더불어 이제 참 멋지고 황홀한 부활시기 4월을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날이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 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24.1)
오늘 부활 대축일 낮기도 시편 화답송 후렴도 참 적절합니다. 어제 부활 성야 미사도 참 감격스러웠습니다. “1.빛의전례, 2.말씀전례, 3.세례전례, 4.성찬전례” 네부분으로 이뤄진 전례로 새삼 세례전례가 부활성야미사의 중심임을 깨달았습니다. 수도원 개원후 최초로 장차 입회가 예정되는 이종원 베네딕도 형제가 공동체의 특별한 배려로 세례를 받았고, 이어 모두가 세례 서약 갱신에 참여함으로 모두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을 체험했습니다.
말씀전례 7개의 독서에 이어, 복음전 로마서 독서는 아랫집 저와 띠 동갑인 우리 나이로 88세 노령의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서 마리레몽 수녀”가 또박또박 낭낭한 목소리로 읽었습니다. 이 또한 신선한 감동에 충격이었습니다. 수녀님 역시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부활하였음을 입증합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부활 축하드리며 주님의 크신 평화가 가득하시길 빕니다!! 기쁜 축제의 날, 어린양의 파스카, 승리의 날, 감사와 기쁨의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디지털 스마트폰 카톡의 시대, 유일하게 초코렛 선물과 더불어 받은 수녀님의 친필서한입니다. 영혼이 육신을 끌고 가는, 늘 파스카의 신비를 사는 열정과 순수의 수녀님입니다. 또 뜻밖에 총선을 앞두고 재판이 끝나자 마자 곧장 유세에 오른 어느 정치가의 간절하고 절박한 호소가 깊은 감동의 충격으로 마음을 울렸고 그대로 하느님께 기도로 올렸습니다. 이어 열심한 도반으로부터 부활축하편지와 더불어 만개한 개나리꽃 사진 선물을 받고 발송한 답신도 나눕니다.
“신부님 부활 축하드려요. 부활하면 개나리와 매일 부활의 삶을 사시는 신부님이 생각납니다.” 이어 즉시 옛 “개나리” 시를 선물했습니다.
-“겨울 지낸
개나리
햇빛 환한 대낮도
너무 어두워
샛노란 꽃초롱들 가득 켜들고
대낮의 어둠
환히 밝히고 있네”-2001.4.11.
23년전 시이지만 여전히 아끼고 있는 시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어둠을 환히 밝히며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깨어있는 영혼을 상징하는 청초한 사랑, 샛노란 개나리꽃입니다. 어떻게 하면 파스카의 승리를,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지요?
첫째, 예수님을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오늘 복음의 빈무덤을 배경한 세 제자들이 예수님 사랑의 모범입니다. 누구나 자명한 주님 부활체험이 아닌 참으로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한 이들만이 부활한 주님을 체험했습니다. 맨처음 빈무덤을 확인한 마리아 막달레나 만큼 예수님을 사랑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전갈에 쏜살같이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애제자와 수제자의 대결, 그러나 앞선 것은 애제자의 사랑이었고, 겸손한 애제자는 잠시 멈추었다가 수제자 베드로 다음에 무덤에 들어섭니다. 세분의 예수님 사랑은 막상막하입니다. 그러나 빈무덤을 봤을 때 전광석화 주님 부활을 감지하고 확신한 것은 에제자였습니다. 다음 짧은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랑의 눈이, 영의 눈이 활짝 열린 애제자만이 빈무덤을 보는 순간 주님 부활을 믿었습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체험하는 부활하신 주님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천상의 꿈, 희망이신 그리스도를 추구하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간곡한 권고입니다. 주님 부활 체험만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부단히 천상의 그리스도를 추구할 때 샘솟는 영적 열정에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초월과 내재의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참 귀한 말씀이요 부활시기 내내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살아있다하여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떠난 삶은 살아 있는 삶이 아닌 유령같은 좀비같은 헛된 삶, 죽은 삶이겠습니다. 이미 살아서 그리스도와 깊어지는 일치와 더불어 생명력 넘치는 참나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마침내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영광속에 환히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자 영원한 꿈이요 희망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 백절불굴 파스카의 삶을,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셋째, 주님 부활 선포의 증인이 되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베드로는 예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던 제자가 아닙니다. 불굴의 주님의 용사가, 주님 부활의 전사가 된 베드로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후의 베드로의 활약상을 보여줍니다. 이제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일에 전념하는 베드로입니다.
“그분은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우리도 부활하였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 갈릴래아에서 만나는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다음 파스카의 부속가 그대로입니다.
“그리스도 나의 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너희보다 먼저앞서 갈릴래아 가시리라.
그리스도 부활하심 저희 굳게 믿사오니
승리하신 임금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루하루 파스카의 삶을, 주님 부활 승리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의 참삶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삶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간곡한 당부 말씀입니다.
1.늘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날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알아 닮아갈 때 참나의 실현입니다.
2.늘 천상의 꿈, 희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추구하십시오.
초월과 내재의 그리스도,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3.늘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하십시오.
바로 내 삶의 자리 갈릴래아에서 내 삶자체로 부활하신 주님을 환히 드러내는 삶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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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마르 16,4)
그대,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빛을 가리던
어둠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처음처럼 밝게 빛나시게나.
그대,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선을 막아서던
악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처음처럼 티 없이 선하시게나.
그대,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믿음을 뒤흔들던
유혹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처음처럼 오롯이 믿으시게나.
그대,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희망을 꺾던
포기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처음처럼 하얗게 희망하시게나.
그대,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사랑을 짓밟던
탐욕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처음처럼 뜨겁게 사랑하시게나.
그대,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기쁨을 억누르던
불안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처음처럼 마냥 기뻐하시게나.
그대,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함께를 거스르던
홀로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처음처럼 기꺼이 함께하시게나.
그대,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온유를 집어삼키던
냉혹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처음처럼 곱게 온유하시게나.
그대,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자비를 밀어내던
무관심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처음처럼 한없이 자비로우시게나.
그대,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살림을 비웃던
죽임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처음처럼 정성껏 살리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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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주님 부활대축일을 맞아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히 내리시길 빕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며 존재의 의미입니다. 부활이란 일반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생이나 환생과는 다릅니다. 따라서 부활이란 완전히 죽은 사람이 신비로운 몸으로 살아나 다시는 죽지 않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주님은 참 하느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사도바오로의 말 처럼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은 덧없고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주님 부활은 우리 또한 ‘환골탈태’ 하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 부활의 이면에는 죽음과 고통이 따릅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아프락시스(abraxas)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시스이다”
이 글의 뜻은 땅에 있는 알이 하늘을 나는 새가 되려면 알의 껍질을 깨뜨려야 하는 고통이 수반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자신의 에고를 죽이고 일상에서 만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을 원하는 것,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과 직면하는 것과 죽음의 전투에서 기뻐하는 것은 애덕의 완전한 행위임’을 성 보나벤뚜라는 얘기합니다. 많은 성인성녀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은 성인에 따라 5년, 10년, 15년이란 세월속에서 어떤 분은 육체적 고통, 어떤 분은 정신적 또는 신앙의 어두움속에서 정화시켜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성인들의 성덕 뒤에는 혹독한 시련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을 닮는 완덕의 과정은 내적, 외적으로 언제나 고통스럽고, 희생을 거친 순화와 정화를 통하여 획득됩니다.
그리스도의 진리의 정신 그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내면적으로 매일 자기에 대하여 죽어야만 합니다.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갈 때 그것이 우리를 내적으로 활기 있게 하고 영혼의 상심과 옹졸을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과 건강과 삶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그리고 모든 순간을 의식적으로 살고 삶의 가치있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알며 매일 부활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다시 한번 주님부활을 축하드리며 일상안에서 작고 소중한 부활체험을 누리시길 빕니다.
✝️ 1일요일 성체의 날✝️
교황 프란치스코의 찬미받으소서 1-2항
1. 찬미받으소서 (LAUDATO S1').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라고 노래하셨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이 아름다운 찬가에서 우리의 공동의 집이 우리와 함께 삶을 나누는 누이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 주는 아름다운 어머니와 같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누이이며 어머니인 대지로 찬미받으소서. 저희를 돌보며 지켜 주는 대지는 온갖 과일과 색색의 꽃과 풀들을 자라게 하나이다. "
2. 이 누이가 지금 울부짖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지구에 선사하신 재화들이 우리의 무책임한 이용과 남용으로 손상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구를 마음대로 약탈할 권리가 부여된 주인과 소유주를 자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죄로 상처 입은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폭력은 흙과 물과 공기와 모든 생명체의 병리 증상에도 드러나 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억압받고 황폐해진 땅도 가장 버림받고 혹사당하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지구는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로마 8.22)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흙의 먼지라는 사실을 잊었습니다(창세 2,7 참조). 우리의 몸은 지구의 성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는 그 공기를 마시며 지구의 물로 생명과 생기를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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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낮 미사
마리아 막달레나는 새벽같이 무덤으로 갑니다.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막달레나가 생각했을 때
누군가 예수님을 무덤에서 꺼내 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막달레나는 그 사실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립니다.
스승님께서 돌아가신 것도 충격인데
스승님의 시신까지 없어졌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둘은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갑니다.
요한과 베드로는 먼저 아마포를 봅니다.
베드로는 더 나아가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을 봅니다.
특이한 점은
수건이 아마포와 함게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누군가 시신을 꺼내 갔다면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를
굳이 벗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시간이 아직 어두울 때
그렇게 보았다는 것으로 미루어
꺼내 갔다면 그 전에 그랬을 것이고
아마도 그 일은 급하게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 긴급한 상황에서
수건을 개어 놓고 갔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시신을 꺼내 간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제자들이 본 것은
비어 있는 무덤
흩어져 있는 아마포
그리고 따로 개켜겨 있는 수건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것을 보고 믿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요한이 본 것을 우리도 따라서 보고 있지만
요한은 무엇을 보고 믿은 것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에서
모세의 얼굴을 가렸던 너울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만났던 모세는
하느님의 영광 때문에
얼굴에서 빛이 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세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두려워했고
모세는 너울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을 언급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하느님의 영광을
가릴 필요가 없음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직접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수건이 벗겨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것이며
그것을 요한은 보았습니다.
즉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을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 사건으로
요한은 믿었습니다.
부활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기에
부활 사건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전지전능하심은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하느님 당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도
당신의 영광에 함께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한계를 지닌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천년 전의 부활 사건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희망을 주는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희망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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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오늘 무엇에 죽고 어떻게 부활할 것입니까?
참으로 감사하고 은혜로운 부활 성야입니다.
영광스러운 주님 부활, 그러나 한 마리 나비처럼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예수님 부활 사건입니다.
저는 이번 부활 시기, 구체적인 제 삶 속에서, 공동체 생활 안에서 주님 부활의 흔적을 찾고, 느껴보기 위해 나름 노력을 해봤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넉넉한 고장 태안에 내려와 산지 벌써 만 4년이 지나갑니다.
막 도착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도착하자마자 팬데믹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약되어 있던 피정 센터 모든 스케줄이 백 퍼센트 취소되었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집합 금지 명령까지 내려져 피정객들은 단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건물 싸이즈가 큰 관계로 한 달 전기세가 나왔는데, 입이 딱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심각한 상황이 계속되니, 한때 관구에서는 폐업뿐만 아니라 매각까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는 그게 무슨 소리냐? 수많은 청소년들이 다녀간 오라토리오요, 많은 살레시안들의 땀과 눈물이 흩뿌려진 성지 같은 내리를 어떻게 포기하냐?
절대 그럴 수는 없다며,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드디어 길을 찾았습니다.
집합 금지 명령이 내려졌지만, 용기를 내서 피정객들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딱 한 분이 피정을 오셨습니다.
그러다가 두분, 세분, 그리고 어느 순간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네명 미만은 가능하니, 여기 네 명 저기 네 명, 저 건너편에 네 명, 또 다른 쪽에 네 명...
그런 노력의 결과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에도 아무런 경제적 타격을 입지 않고, 피정 센터는 잘 돌아갔습니다.
오히려 흑자를 내서 선교 기금이나 양성 기금으로 기여를 했습니다.
오늘 같은 경우도 정말이지 하느님께, 또 멀리서 찾아오신 교우들께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는 태안읍에서도 50분이나 더 들어와야 하는, 오지입니다만, 이 외딴 곳의 시골 성당을 꽉 채워서 부활 성야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는 것, 너무나 큰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바로 이런 우리 공동체의 모습에서 주님 부활의 확실한 표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한때 메말라가고 죽어가던 저희 공동체였지만, 형제들의 헌신과 희생, 많은 교우들의 기도와 협조 덕분에 다시 맥박이 뛰기 시작했고, 생기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주님 부활의 흔적은 바로 우리가 매일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 특별히 내 안에서 발견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제 지난 수도 여정을 되돌아볼 때마다 저는 언제나 깊은 감사의 정을 느낍니다.
한때 저는 살아있었지만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몸과 마음에 에너지가 모두 다 빠져나가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동체에 그 어떤 기여도 할수 없었고, 제 존재 자체가 형제들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속상하고, 그야말로 매일 매일이 숨만 쉬고 있지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세상 나 혼자뿐이로구나, 이제 내 인생 끝이로구나, 하고 좌절하고 살아가던 그때
한 존재가 제게 다가왔습니다.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셨고, 무한한 인내심과 배려로 저를 일으켜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분은 저를 죽음에서 부활시키기 위해 주님께서 보내주신 천사였습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분께서도 한때 저와 비슷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을 보고 큰 위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 대담 프로그램 중에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교황님 생애 중에 가장 힘들고 어두웠던 순간, 하느님이 대체 계시긴 한건가 하는 생각이
든 때는 언제였습니까?
교황님께서는 즉시 이런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회 부에노스 아이레스 관구장 직무를 끝내고 나서였습니다.
1983년부터 1992년까지 만 9년 동안 황폐한 시기가 계속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어두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코르도바로 유배되었던 그 순간, 정말 힘들었습니다.
아주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저는 그때 깊은 패배감에 젖어 이미 제가 죽었다고 믿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힘들다보니 기도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계속 기도했습니다.
부단히 하느님께 나를 맡겼고, 용서를 구했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특별히 감실 앞에 드리던 기도가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주님 부활을 경축하고 계시는 교우분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다른 먼 곳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노력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나를 막고 있는 죽음의 큰 돌을 굴려내는 일입니다.
매일 우리가 접하는 인간 관계 안에서 누군가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측면의 죽음입니다.
내가 아직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서 수시로 분노하고 마음의 평정심을 잃는다면, 그것은 아직도 내가 죽음에 머물러 있다는 표시입니다.
오늘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해서도 부단히 죽고 부활하고, 죽고 부활할 것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나는 오늘 무엇에 죽고, 어떻게 부활할 것인지 성찰해보는 부활성야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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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주간 첫날”(1절), 오늘 주일이라고 부르는 날, 주님께서 부활하셨다. 당신의 탄생으로 인간의 탄생을 거룩하게 하신 분이 당신의 부활로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이날, 부활하신 분과 함께 낙원이 열린다. 그 낙원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인간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직 어두울 때 무덤에 갔다. 그곳에 분명히 주님께서 묻히셨는데, 돌은 치워져 있었고, 그 안에 시신은 없었다. 마리아는 깜짝 놀랐다. 마리아는 시신이 없자 누가 훔쳐 갔다고 생각한다. 마리아는 무덤에 왔을 때, 아직 어둠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2절)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꺼내 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린다.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그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 무덤을 살핀다.
마리아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은 부리나케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본다. 예수님의 얼굴을 싸매었던 수건이 아마포와 따로 잘 개켜져 놓여있었다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다. 처음에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보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보았는데 베드로는 수의가 흩어져 있고,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따로 한 곳에 잘 개어져 있었음을 보았으나 그는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믿음을 일으키게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예수님의 부활이 빈 무덤이나, 예수님을 싸맸던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추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의 믿음은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나, 베드로의 경우처럼 시각적인 면에서 보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차원, 보이는 현상을 넘어 내적인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해하는 그런 차원에서 보는 것으로 얻는 것이다. 이렇게 보기 위해서는 자신이 파악하려고 하는 것에 빠지고 매료되어 자신을 그 현실에 잠겨야 한다. 따라서 사랑, 연민, 다른 사람의 요구에 대한 개방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보고 믿었던 다른 제자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라는 독특한 표현으로 소개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요한이 아직 예수를 보지 않고서도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보고 믿게 해준 것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의 힘으로 요한만이 빈 무덤과 개켜져 있던 수건에 감추어진 의미를 이해했다. 참된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 구체적으로 성서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지, 빈 무덤이나 잘 개켜진 수건과 같은 어떤 구실이나 단서를 찾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9절).
부활의 은총으로 새로이 창조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계신 천상을 갈망하면서 부활을 숨 쉬며 살아야 한다. 부활을 숨 쉰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삶이 매 순간 부활을 체험하며, 부활 체험 안에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저 위에 있는 것들은 바로 우리 이웃이 필요로 하는 것을 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랑의 마음과 봉사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며, 이로써 부활하신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다. 그분이 바로 형제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고 구원을 주실 수 있었던 한없는 사랑을 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 사랑에 대해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삶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천국의 삶을 이미 이 땅에 끌어내려 사는 삶이 될 것이다. 이 삶은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며, 부활한 후의 삶은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그분이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이제 우리가 부활을 확실히 체험하는 것이다. 천상의 것을 추구하면서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연습, 아니 죽어야 한다. 죽는 삶을 통해 우리는 부활을 체험할 수 있으며, 우리는 사도들이 한 말과 같이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복음 선포이며, 그리스도, 즉 구원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도 항상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전할 수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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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한 예수님 만나는 유일한 법: 갈릴래아로 가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면 부활을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먼저 부활이 내 안에 없으면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개가 꽃이 예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개에게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을 찾일 리도 없고
꽃을 보아도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볼 수도 없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했던 일은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처음 가발을 쓰신 것을 본 날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진짜 아줌마로 불렀습니다.
예상하지 못하면 알아볼 수 없습니다.
한 국제 육상경기에서 선두에 한참 뒤진 채 꼴찌로 달리던 선수가 갑자기 쏟아진 폭우를 뚫고 끝까지 완주해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에 따르면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2023 동남아시안게임 여자 5천m 경기에 출전한 캄보디아 대표 보우 삼낭(20) 선수는 꼴찌로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기록은 1위에 6분 가까이 뒤진 22분 54초였습니다.
대부분 선수가 이미 결승선을 통과한 상태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달렸습니다.
가난 때문인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스트레스 때문인지, 평소 빈혈에 시달려 온 이 선수는 경기 당일에도 코치가 출전을 만류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결승선을 통과한 뒤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악천후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역주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 알려지면서 하루아침에 유명 스타가 됐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물론 경기를 포기할 권리가 있었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의무가 더 중요했고, 포기하지 않으면 목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끝까지 달렸습니다.”
삼낭 선수는 자기를 위해 달렸다기보다는 나라와 희망이 필요한 이를 위해 달렸습니다.
그런데 그 달리기는 목숨을 내어놓아야 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달렸습니다.
분명 피의 열매가 있을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활을 믿는 이에게 부활한 분이 보입니다.
그녀에게 감동한 많은 이들이 그녀를 돕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부활한 이들입니다.
중학교 때 개신교 전도사 한 분이 우리에게 종교교육을 해주었습니다.
그분은 한국에서 전교하는 것도 좋지만 아무도 가지 않는 오지 나라로 가서 선교사로 죽는 것이 꿈이라고 했습니다.
가족이 함께 가야 해서 그 목적을 위해 몇 년간 계속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젠 돈이 얼추 모여서 떠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은행으로 돈을 찾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돈을 찾고 나올 때 소매치기들에게 몇 년 동안 모은 돈을 모두 털리고 만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위협할 때 그동안의 모든 꿈을 접어야 함에도 돈을 순순히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자신이 속한 교단에서 오지로 선교를 떠나겠다면 돈을 전액 지원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웃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때만 부활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차인표 씨도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목소리라도 한번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성경 공부하고 예수님 역할의 연극도 4년을 했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순간은 갈릴래아로 가서였습니다.
신애라 씨 대신 인도 콜카타에 가난한 이를 위해 봉사해야 했을 때입니다.
그는 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기 가게 되었고 비행기도 혼자 1등석을 타고 갔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한 아이가 손을 내밀 때 그는
“하느님께서 너를 사랑하신다. 너는 소중한 존재다.”라는 말을 해주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통해 그 말을 해 주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죽을 줄 아는 이는 이미 부활을 믿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움을 믿는 사람이 꽃을 발견하듯,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도 우리나라에 와서 가장 가난하고 냄새나는 사람에게 봉사하고 안아주려고 할 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언 것과 같습니다.
만약 저도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지 않았다면 아직 사해쪽에서 헤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책을 통해 내가 추구하던 것을 버리고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신학교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이 갈릴래아였고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너 내게 많이 주었니? 근데 나는 네게 다 주었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의 실천 안에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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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지금, 여기.』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 20,1-9).”
1) ‘빈 무덤’은 부활의 증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은, 시신이 그곳에 없다는
표시일 뿐이고,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그 믿음을 사람들에게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때 ‘빈 무덤’은 언급하지도
않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이 직접 만났다는 것을
강조하기만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8).” 라고 증언합니다.
<따라서 “부활의 증거는 ‘빈 무덤’이 아니라 ‘만남’이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2) 그렇다면 8절의 “보고 믿었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빈 무덤’을 보고 요한 사도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단순한 뜻이라면 좋겠는데, 정말 그런 뜻일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면,
왜 옆에 있는 베드로 사도에게 아무 말도 안 했을까?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충격과 슬픔 때문에
울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막달레나를 내버려둔 채 그냥 가버렸을까?
네 복음서 어디에도 “무덤이 비어 있으니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다.” 라고 증언하는 요한 사도의 말은 없습니다.
어쩌면 요한 사도는 빈 무덤을 보고 사흘 째 되는 날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기억해내고, 혼자 속으로
예수님 부활을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증언하지 않는(또는 증언하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혼자만의 ‘생각’일 뿐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증언으로 이어지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8절의 “보고 믿었다.” 라는 말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막달레나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었다.”가 더 타당한 해석일 것입니다.
그래야 9절의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에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9절의 ‘그들’이라는 말을, 베드로 사도와 마리아 막달레나만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하면서 요한 사도를 제외할 이유나
근거가 없습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과 모든 사람의 부활에 대해서
말할 때 이런 말도 했습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여기서 ‘불쌍한’이라는 말은 ‘어리석은’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고, 그 일에 대해서나 자기 자신의
부활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 그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받기만을 바라면서, 그것만을 얻으려고 예수님께
청원기도를 바치는 사람들은,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영원하신 주님께 허무한 것만 청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이고,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데도 받을 생각도 안 하면서,
주님께서 안 주실 것만 청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원하고 노력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데도,
그것을 외면하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만 찾는 것은
어리석고 불쌍하고 답답한 일입니다.
그것은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지는 않고
‘빈 무덤’만 찾고 있는 것과 같다고, 또는 ‘빈 무덤’에만
집착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려면
우리 자신도 ‘영적으로’ 살아 있어야 합니다.>
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고 약속하셨는데,
그러면 언제부터? ‘부활 순간부터’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시는 일을
계속 반복하시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긴 한데, 오셨다가
떠나셨다가 다시 오셨다가 또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보이든지
안 보이든지 간에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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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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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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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빈무덤을 사랑으로 바꾸며 ♣
따뜻한 봄 공기와 더불어 부활대축일을 맞았다. 사순시기에서 부활로 넘어가는 이 여정처럼 우리네 일상사도 그분과 더불어, 그분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견하고 모든 이에게 화사한 봄빛과 같은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허탈감과 절망감에 빠져 있던 사람들 중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주님께 대한 충성심 때문에 일요일 ‘아직 어두운’ 이른 아침에 통곡하기 위하여 주님의 무덤에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아직 어두운’이란 말에 주목하자. 그것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부활을 믿지 않은 상태에서 곧, 여전히 자신의 현실과 자신에게 다가온 아픔에만 시선이 쏠려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뜻밖에도 무덤 입구를 막아 놓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시신을 훔쳐간 것으로 여겼다. 이 여인들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이 놀라운 사실을 알렸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무덤으로 달려갔고, 실제로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빈 무덤으로 말미암아 예수 부활 신앙에 이르기는 고사하고 매우 당황했을 뿐이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전 지상 여정에 함께 했던 사람들이었기에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권능을 가지신 분인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고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인간적이며 현세적인 것에만 집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빈 무덤’은 바로 오늘 ‘나’의, ‘우리’의 처지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요 한국사회의 모습이다. 우리는 요즈음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이렇게 여인들과 제자들과 같은 반응과 삶의 태도를 보이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건강을 돌봐야 하니까 등등 온갖 이유를 대며 목표도 방향도 없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지는 않는가? 어떻게 해야 할까? 제자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보자. 여인들과 제자들은 ‘빈 무덤’ 앞에 아연해 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입구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고, 예수께서 “사랑한 제자”는 무덤 안에 잘 개켜져 있는 “염포들”을 보았으며, 베드로 사도는 “염포들”과 “수건”을 보았다. 제자들은 무덤 안의 이러한 정황을 보고서 즉시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다. 그런데 제자들이 확고한 부활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하고 나서였다.
이 빈 무덤과 예수 발현은 사도들과 여인들 안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 도망가 버렸던 사도들과 여인들이 모여와 예수님의 죽음을 선포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들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발견하였다. 죽음이 이제는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며, 좌절과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며, 실패가 아닌 승리라는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의 생명과 예수님의 영원한 진리가 그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결코 죽임을 당할 수 없는 것임을 우주적으로 선언한 사건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부활은 봄이 오고 꽃이 피듯 저절로 찾아오는 평범한 하루가 아니다. 부활은 ‘오늘’, ‘나’에게서 ‘우리’ 안에서 재현되어야 한다. 주님의 사랑을 갈망하여 그분과 일치하기를 바라는 우리는 그분과 더불어 사랑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자신과 다른 이들을 ‘다시 새롭게 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할 나는, 죄악과 허물, 탐욕, 무관심, 소극적인 태도, 편협한 마음, 미움, 증오 등을 ‘빈 무덤’에 묻어버려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빈 무덤에도 허공에도 계시지 않는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들을 갈라놓는 ‘무덤 입구의 돌’을 치워버리고 살아계신 주님의 가르침을 살도록 하자.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이제 사랑이 담긴 작은 손길을 형제자매들의 빈자리에, 빈 주머니에, 빈 가슴에 채워 넣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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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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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함승수 신부님.
요한 20,1-9 “보고 믿었다.“
주님 부활의 이야기는 날이 밝기 전, 아직 어두울 때에 시작됩니다. 요한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어둠’은 단순히 시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짓과 탐욕, 위선과 폭력이 여전히 남아있는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희망적 사건이 일어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해서 갑자기 세상이 180도 달라지는게 아닙니다. 그분을 믿는 신앙인들의 삶 역시 여전히 힘들고, 괴롭고, 두려운 상황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달라진 게 있습니다. 이제 이 세상의 어둠 속에 희망의 ‘빛’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나 그 빛을 발견할 수 있는건 아닙니다. 그 빛을 알아보려면 믿음으로 열린 눈이 필요하지요.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관점을 하나씩 살펴봄으로써,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그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을지 그 답을 찾을 겁니다.
첫번째로 살펴볼 인물은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예수님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그녀는 예수님을 여읜 슬픔 속에 깊이 잠겨 있었습니다. 즉 그녀의 시선은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 그리고 그분의 시신에 머물러 있었던 겁니다. 안식일 때문에 시간에 쫓겨 사랑하는 스승님의 시신을 제대로 염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주간 첫날 새벽 아직 해가 뜨기도 전부터 그분의 무덤을 찾아가지요. 그리고 거기서 주님의 무덤을 막아놓았던 큰 돌이 한쪽으로 치워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보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블레포”(blépein)로서 대상을 그저 눈에 보이는대로 한 번 슥하고 훑어보는 무덤덤한 ‘봄’을 의미합니다. 즉 그녀는 아직 날이 어두워 시야가 흐릿한 상황에서 무덤 입구에 있던 돌이 치워져 있는 외적인 상황을 확인하는데에 그친 겁니다. 물론 날도 어둡고 연약한 여인 혼자인데다가 생각지도 못한 큰 일에 놀라기까지 했으니, 무덤 속까지 들어가 샅샅이 살펴보지 못한 것이 이해는 됩니다. 그러나 그녀가 제대로 보지 못한 탓에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갔다’는 커다란 오해를 하게 된 것은 큰 문제입니다.
두번째로 살펴볼 인물은 ‘시몬 베드로’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주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은 베드로는 한달음에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그 안으로 들어가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그 현장을 유심히 ‘바라보지요’. 여기서 ‘보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테오레오”(theoréin)로서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나 사물을 꼼꼼하게 ‘살펴봄’을 의미합니다.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상황을 대충 훑어보고 엉뚱한 결론을 내린 마리아 막달레나보다는 분명히 나은 모습이지만, 베드로의 ‘봄’은 우리가 본받고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살아계실 때에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서 당신께서 겪으셔야 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음에도, 베드로는 그 말씀을 귀기울여 듣지 않았지요. 주님의 뜻보다는 자기 뜻에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진리를 찾는데에는 관심이 없고 세속적인 부귀영화에만 마음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에 그칠 뿐 그 사실 안에 담긴 메시지를, ‘빈 무덤’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세번째로 살펴볼 인물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 깊이 머무르며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노력하던 요한은 주님의 무덤이 비어있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마음의 눈으로 상황을 바라봅니다. 여기서 ‘보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호라오”(oràn)로서 의미와 이유를 생각하며 현상 너머에 있는 본질을 통찰하여 봄을 의미하지요. 마리아의 말대로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무덤에서 몰래 꺼내갔다면 그분의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가 왜 무덤 안에 그대로 놓여 있는지,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재빠르게 일을 처리하느라 경황이 없었을텐데 주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을 가지런히 접어두는 여유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자취를 더듬어가다보니 비로소 ‘진실’에 접근하게 된 겁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던 주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이 알아보고 믿게 된 ‘구원의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만’ 했습니다. 이는 평범한 ‘사실’이 아니라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당위’의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 꼭 부활하셔야만 했던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분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가 ‘나도 주님처럼 부활하여 그분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이 팍팍한 세상에서 기쁘게 살아가도록 이끄시려고, 그리고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드시려고 우리보다 먼저 죽으시고 우리보다 먼저 부활하신 것이지요. 그리스어로 부활은 ‘일어나다’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죽음에서 일어나신 것처럼 우리도 일어나야 합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불평과 원망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일어남으로써 우리는 멸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갑니다(파스카). 그러니 말로만 주님의 부활을 축하할 게 아니라 내가 부활하기 위해, 하느님을 닮은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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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 16, 6)
얼었던 개울물이
풀리고 봄꽃들이
꽃망울을 마구
터뜨립니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신 생명의
일들입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
이루어지는
부활이 아니라
죽음이 빚어내는
무덤의 현장
여기에서
생명의 부활은
놀랍도록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이미
무덤을
막았던
큰 바윗돌은
굴러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억누름의
억압이 아닌
풀어줌으로
새로운 길이
열리는 생명의
참된 자유이며
죄의 해방입니다.
스스로를
묶어
속박했던
우리들이
살아있는
관계속으로
이제는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살아나심으로
죽음의 한계를
벗어버립니다.
생명의 숨결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인
사랑의 참된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과 세상의
단절이 아닌
파괴되고 손상된
관계성의 힘찬
회복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가 부활의
본질입니다.
무한히
열려져 있는
끝없는 사랑을
우리는
부활을 통하여
뜨겁게
체험합니다.
무덤을 막았던
바윗돌만
붙들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됨의 일치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느님을 이제는
맛보아야 합니다.
하느님 생명의
힘을 믿기에
우리는
우리의 뜻을
버리고
비울 수 있습니다.
버리고
비우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부활을
체험하니
예전의
갈릴래아가 아니라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게되는
부활의 현장
살아있는 관계의
갈릴래아입니다.
되살아나신
예수님과 함께
삶의 참된
행복을 누리는
부활의 새날입니다.
참으로
되살아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우리모두를 향한
부활의 기쁜소식을
온 마음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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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31일 일요일
[주님 부활 대축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에 봉독된 복음은 세 사람의 믿음의 여정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이 여정은 ‘보다’라는 동사를 통하여 진행되는데,
우리말 성경에 동일하게 ‘보다’로 옮긴 낱말은 사실 그리스 말 성경 본문에는 서로 다른 세 개의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등장하는 동사는 ‘블레포’입니다.
단순히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시각적으로 보는 행위를 말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요한은 무덤 안에 아마포가 있는 것을 ‘봅니다’.
그저 단순하게 어떤 장면을 본 것입니다.
두 번째 동사는 ‘쎄오레오’인데, 무엇인가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 ‘살펴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금 늦게 도착한 베드로는 무덤 안에 들어가 아마포와 수건이 놓여 있는 상태를 유심히 ‘살펴봅니다.’
앞뒤 상황을 고려하며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여겨보는 것입니다.
세 번째 동사는 ‘호라오’입니다. 베드로와, 뒤이어 무덤에 들어간 요한은 ‘보고’ 믿습니다.
이때의 ‘봄’은 단순히 시각적인 기능을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믿고 이해하는 인식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세 개의 동사를 통하여
오늘 복음은 등장인물들이 처음에는 단순히 ‘보는 것’에서 시작하여
상황을 유심히 ‘살펴보는’ 단계로 발전하고,
마지막으로는 본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까지 믿게 되는 은총에 다다름을 알려 줍니다.
보여 주시는 것을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은총입니다.
보여 주어도 믿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빈 무덤과 부활의 연관성은 단순히 지적인 인식을 넘어서는 사랑과 신뢰의 ‘봄’으로만 제대로 체험되는 사건입니다.
빈 무덤이라는 예수님의 ‘부재’는 사실 어디에나 두루 계시는 ‘편재’의 시작임을 믿는 것,
빈 무덤이야말로 부활의 가장 분명하고도 명백한 증거가 되는 현장임을 고백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가지게 된 새로운 ‘봄’(시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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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1. 주님 부활 대축일. cpbc TV. 매일미사.
2024년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 (12:00) -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집전 I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https://youtu.be/HvZ-o0wubrk 1:19:35
cpbcTV가톨릭콘텐츠의모든것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집전 되는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특별 중계해 드립니다.
📍 일시 : 2024년 3월 31일 (일) 오후 12시
📍 집전 :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서울대교구장)
📍 장소 :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
주님 부활 대축일은 전례 주년의 절정을 이룹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과 악의 세력을 이겨 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큰 기쁨이며 희망입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은 하느님의 권능과 주님 부활의 은총에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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