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의 먹거리가 내 어린시절의 멍에였네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소 순 원
농자천하지대본 시대에 소는 인간에게 으뜸가는 상머슴이었다. 논·밭갈이, 농자재, 퇴비, 각종 농산물의 운반 등 힘든 일들을 모두 떠맡아 해결하는 큰 일꾼이 소였다.
2019년 7월 13일 새벽, 강원도 횡성군 송정리 김태봉 씨 축사에서 불이 났으나, 주인은 인사불성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때 이 축사에서 몸에 불이 붙은 4년생 엄마 소 사랑이가 축사를 간신히 탈출하여 100여 m 떨어진 주인집 마루를 마구 들이받자 잠에서 깨어난 주인은 축사에 불난 사실을 알고, 소방서에 전화를 걸어 화재를 진압했다. 사랑이의 새끼들을 비롯한 11마리의 소들은 무사했으나 사랑이는 화상이 너무 심하여 주인집 마당에서 다음날 새벽에 죽은 채로 발견됐다. 모성애 깊은 어미 소의 죽음이 강원도민일보가 보도했다.
축사의 화재는 소방관들을 호출 했으니, 주인은 사랑이를 살펴볼 여유가 있었을 테고, 서너 바가지의 물만으로도 사랑이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다. 새끼들과 서너 마리의 소들은 살았으나 사랑이 자신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맹수들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로 도우며 살게 되어 안정된 화평시대를 누리게 되었지만 부족한 식량문제가 발생했다. 논밭을 더 많이 개간하여 더 많은 농사를 경작해야 하는데,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자, 농민들은 농가마다 커다란 일소를 키우며 그 힘겨운 일거리들을 소를 부려서 해결했다. 소가 농업노동력의 근간이 되자, 천석꾼 농주, 만석꾼 부자들이 방방곡곡에서 등장했다.
소들은 인재를 양성하는 밑천이 되기도 했다. 소를 서너 마리씩이나 기르던 부농들의 자제들은 별 어려움 없이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여 각 기업체에 입사하여 기술을 개발하고, 각종 상품을 제조 수출하며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발전을 견인하는 인재가 되었다.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는 맛 좋고 영양가 높은 쇠고기를 먹을 수 있었으니 소는 인간에게 일해주고, 고기를 먹여 주며, 가죽까지 내어주어 구두를 만들어 신게 하고, 북과 장구를 만들어 인간들을 즐기게 하는 소중한 동물이다. 인간은 이 소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빚을 지고 살아가는 중이다.
내가 일곱 살 되던 해의 봄에 아버지는 들판을 구경해보자며 내 손을 잡고 들판으로 나갔다 . 내 어깨에 앙증맞은 망태를 걸어주며 새잎이 파릇파릇 돋아난 풍년 초, 억새 순, 쇠스랑 풀, 향기 나는 보드랍고 연한 풀들을 베어 망태에 담아서 우리 집 소에게 먹이면 좋을 거라고 하셨다. 그날부터 일주일간은 새순의 풀들을 베어 소에게 주면, 맛나게 먹는 모습을 보니 참 재미가 있고 즐거웠다. 그 이후로 나는 본격적인 초동이 되어 버렸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초동의 책임은 날마다 나를 힘겹게 하는 멍에가 되었다.
2017년도 늦여름 몽골 초원지대를 여행할 때 많은 송아지 떼가 축사에서 떨려나 풀밭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유가 무엇인지를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엄마 소들에게서 사람들이 우유를 짜내는 시간이라 쫓겨난 상태라고 했다. 사람들이 우유를 먹을 수 있으려면 송아지들은 젖배를 채우지 못한다. 사람들이 송아지의 모유를 빼앗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들의 편에서 본다면 인간은 참으로 야속한 존재다. 사람들이 송아지의 젖배를 굶게 한다. 뿐만이 아니라 이빨이 빠진 사람들에게 인조 치아를 시술할 때는 잇몸에 뼈가 없는 부분에 18개월 된 송아지의 뼈를 뽑아 가루로 만들어서 사람들의 잇몸을 절개하여 그 시술자의 피에 혼합하여 잇몸 내에 인조 뼈를 생성되게 해서 인공치아를 시술한다. 치아 관리에 나태했던 인간들이 송아지들의 치아까지 빼앗는 시대가 된 것이다.
소를 타고 나들이하고, 소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그 소를 먹이고 기르는 머슴을 둔 윤택한 가문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세계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지만, 인간의 삶이 어찌 그렇게 녹록하겠는가?
일요일이면 오전 오후 각각 한 망태씩 꼴을 베어다 놓고, 아버지가 논갈이하는 모습을 구경하러 가곤 했었다. 아버지가 갈아놓은 흙덩이들의 모습은 꽃잎들이 질서 있게 늘여놓은 것처럼 보기 좋았다. 논갈이를 끝내고, 논두렁에 앉아 쉬면서 담배를 피우실 때는 내가 소를 논에서 끌어내 풀이 무성한 논두렁의 풀을 뜯기곤 했었다. 그러다 잠깐 한눈을 팔다 보면 남의 논두렁의 콩잎을 뜯어 먹어버려 남의 농작물에 손해를 입히고 만다. 논 주인이 물꼬를 보러 왔다가 그것을 발견하면 콩값을 물어내라 노발대발했었다. 죄송하다는 말과 이후론 절대로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고, 손해를 물어내라고 내 멱살이라도 움켜잡고 요절낼 기세다. 그러면 나도 억지를 부려보았다. 이 소를 몰고 가서 손해 본 만큼의 살점만 떼어가시고 소를 살려서 돌려보내라고 맞고함을 쳐댄다. 그러다 보면 그놈 참 맹랑한 녀석이라고 한마디 내뱉고는 자기 일을 보러 가버린다.
소는 이승에서 참 많은 공덕을 쌓으며 살아가는 동물이다. 수행에 정진하던 스님이 벼가 누렇게 익어 황금 물결치는 들판에 나들이 나갔다. 벼알이 여문 상태를 살펴보다가 손바닥에 벼알 셋이 떨어진 것을 발견하고, 벼 껍질을 벗겨내고 입에다 털어 넣었다. 주인 허락 없이 쌀 세 개를 먹었다는 죄책감에 소로 변하여 그 논 가에 서 있었다. 소 주인이 나타나 그 소를 끌어갈 것이라 기다렸지만 밤중까지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집으로 끌어가 잘 돌보며 농사짓기에 부리기도 하였다. 삼 년째 가을 그 농부는 소의 도움으로 그 농부네 마을에서 으뜸가는 부자가 되었다. 그 집에 끌려온 지 3년이 된 아침에 외양간에 나가보니 소는 간 곳 없고, 도포를 입은 스님 한 분이 외양간 앞에 앉아있었다. 소는 어디 가고 웬 스님이 오셨냐고 농부가 묻자 불자 자신이 소가 되어 주인댁 농사일을 도왔노라고 말했다. 3년간의 품삯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며 홀연히 떠났다는 일화가 있었다. 소는 이승에서 끝없이 덕을 쌓아가는 동물이다. 그 스님도 소처럼 공덕을 쌓고 싶었나 보다.
내 중학교 시절에 우리마을의 농작이 많았던 농부는 농번기의 노역으로 소가 지쳐갈 때는 미꾸라지를 구해다 삶아 맷돌에 갈아 체로 걸러서 소의 입을 높이 쳐들고 식힌 미꾸라지탕 두어 사발을 먹여서 소 보신을 시키기도 했었다. 소가 먹일 꼴을 베어오고 여물을 썰어 소죽을 끓이는 등 소를 건사하는 일에 시달리며 많은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그 소들 덕에 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경운기, 콤바인, 트랙터, 트럭 등의 출현으로 소들은 힘겨운 노역에서 벗어났으나 아직도 다랑이 논밭이 존재하는 지역에서는 소에 의지해 농사를 짓는다.
소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뒤지지 않은 소중한 존재다. 소는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에게 순종하는 충직한 동물이다. 소의 먹이는 여물, 콩깍지, 옥수수의 대, 쌀겨 등 거친 먹이가 주류인데 양질의 사료가 개발되어 좀 더 영양가 높은 먹이가 제공되기를 바란다. 사람은 누구나가 소의 성실성과 소의 덕행을 본받아 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소와 인간이 서로 공존하는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2019. 1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