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法의 힘 빌려 唐軍 물리쳐 문무왕의 판타지 같은 방책
670년. 당나라 유학 중인 의상대사로부터 당나라 50만 대군의 침공 급보를 들은 신라 조정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다.
문무왕은 요즘으로 치면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한다.
“문무왕은 여러 신하를 불러모아 방책을 물었다.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尊)이 나섰다. ‘근래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龍宮)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해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삼국유사> 문무왕 법민조)
“문두루비법을 쓰십시오”
‘그래 불법(佛法)에 기대자.’
문무왕은 당장 명랑법사를 모셨다.
“명랑이 아뢰었다. ‘낭산(狼山)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사온데, 그곳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 보고했다.
“당나라 군사들이 무수히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정탐하고 있습니다.”
“법사, 이를 어쩌면 좋겠소.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니….”
명랑이 비책을 냈다.
“자, 우선 채색비단으로 절을 가설(假說)하소서.”
임시방편이었다. 명랑의 계책에 따라 채색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든 뒤 풀(草)로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제작했다. 그리고 명랑은 유가(瑜伽)의 명승(明僧) 12명과 함께 문두루(文豆婁)의 비법을 썼다.
“(문두루비법을 쓰자) 그때는 당나라군과 신라군이 아직 교전(交戰)하기도 전인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 당나라 전함들이 모두 침몰하였다. 그후 절을 고쳐 짓고(679년) 이름을 사천왕사라 하였으며, 지금까지 단석(壇席)이 없어지지 않았다.”(삼국유사 문무왕 법민조)
신라는 이듬해인 671년 당나라 5만대군이 쳐들어왔을 때도 어김없이 문두루비법을 써서 당군을 모두 물리쳤다.
670년 당나라 침략에 맞서려고 급히 세웠던 경주 사천왕사. 2006년부터 실시 중인 발굴조사에서는 녹유사천왕상 벽돌편(위의 오른쪽 사진)을 비롯, 문두루비법 사용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단석의 흔적(아래)이 확인됐다.
“불심에 의존한 신라”
차근차근 검토해보자. 당나라 대군의 침공소식을 들은 문무왕이 택한 방책은 결국 불법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642년 백제 의자왕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城)을 빼앗기고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신라 선덕여왕은 황룡사 구층탑을 세웠다. 경덕왕 12~13년(872~873년) 사이 황룡사 탑을 수리한 뒤 그 경위를 기록한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보자.
“중국에 갔던 자장(慈藏)이 귀국할 때(643년) 종남산(終南山)의 원향선사(圓香禪師)에게 하직인사를 드리자, 원향이 말했다. ‘내가 관심법(觀心法)으로 신라를 보니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해동의 여러 나라가 항복할 것이다.’ 자장이 돌아와 왕(선덕여왕)에게 알렸고, 645년 탑을 세웠다. ~과연 삼한을 통합하여 군신이 안락한 것은 이에 힘입은 것이다.”
황룡사구층탑은 백제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궁극적으로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세운 호국불교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력이 있는 신라였으니 당나라군의 침공소식에 역시 불교의 힘을 빌린 것이다. 게다가 문무왕의 불심은 남달랐다. 문무왕은 생전에 입버릇처럼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한 유언이 있었다.
“법사, 나는 죽은 뒤에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겠소.”(삼국유사 문무왕 법민조)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의 주(注)에 인용된 ‘감은사 사중기(寺中記)’를 보면 한술 더 뜬다.
“문무왕은 왜병 진압을 위해 감은사를 지었는데, 완성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아들 신문왕이 감은사를 지은 뒤(682년) 감은사 금당 밑 섬돌을 파서 동쪽으로 향하는 구멍을 냈는데, 이 구멍으로 용(문무왕)이 들어와 돌아다녔다.”
선덕여왕의 지기삼사와 신유림
또 하나, 명랑법사는 왜 사천왕사를 ‘낭산(狼山·사적 163호)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세울 것을 권했을까.
낭산 남쪽은 선덕여왕릉(사적 182호)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선덕왕 지기삼사(知幾三事)조’를 보자. 유명한 ‘선덕여왕 지기삼사’는 재위 16년 동안 선덕여왕이 앞일을 예측한 세가지 일을 기록한 것이다. 선덕여왕이 스스로의 죽음을 예측하고 무덤을 낭산 남쪽으로 정한 것은 지기삼사 가운데 세번째이다.
“셋째, 왕이 아무 병도 없었는데,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어떤 해 어떤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 속에 장사지내게 하라.’ 신하들이 어느 곳인지 모르자 왕은 ‘그곳이 바로 낭산 남쪽이니라’했다. 그 날에 선덕왕이 죽자 신하들은 낭산 양지에 묻었다. 그런 뒤 문무왕이 (선덕)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를 세웠는데, 불경에서는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도利天)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대왕(선덕여왕)의 신령스럽고 성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신유림(神遊林)’은?
“ ‘신유림’은 ‘신(神)이 노는 숲’이라는 이름에서 풍기듯 심상치 않은 곳을 뜻하잖아요. 명랑법사가 황룡사나 금광사 등 기존 사원에 도량을 개설할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낭산 아래 신유림’에, 그것도 임시로 절을 세운 것은 선덕여왕의 영험함이 깃든 신성한 곳을 찾아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려 했던 게지.”(조유전 토지박물관장)
당나라군 물리친 문두루비법
다음, 더욱 중요한 것은 당나라군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문두루의 비법’이다. 즉, “명랑이 유가 명승 12명을 이끌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어 문두루비법을 행하자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했다”는 내용이다.
“명랑이 개설했다는 문두루비법은 ‘관정경’(灌頂經·밀교의 경전 가운데 하나)에 나오는 문두루법(Mundra·神印法)에 따른 주술(呪術)이에요.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위기에 빠졌을 때 둥근 나무에 오방신(五方神)의 이름을 써놓은 문두루를 가지고 향하는 곳이면 모든 악이 물러난다는 것입니다.”(조유전 관장)
‘관정경’에 따르면 문두루형(形)은 금은진보(金銀珍寶)와 전단목(전檀木) 등으로 만들어야 한다.
김상현 동국대 교수는 “그런데 명랑은 풀(草)로 오방신상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침략이 워낙 화급한 상황으로 빠지자 임시로 절을 짓고, 오방신상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어쨌든 삼국유사에 따르면 명랑이 사천왕사에서 임시로 행한 이 문두루비법 때문에 당나라는 2번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저기 보이는 저곳이 바로 망덕사터(望德寺址·사적 7호)입니다. 저 절도 이 사천왕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지요.”(조 관장)
무슨 말인가. 다시 삼국유사를 들춰보자. 670년과 671년 두 번에 걸쳐 사천왕사에서 행한 문두루기법으로 참패한 당나라 고종이 당나라에 와 있던 신라인 박문준(朴文俊)에게 물었다.
“너희 나라에 무슨 비법이 있기에 당나라군 가운데 살아 돌아온 자가 없느냐.”(당 고종)
“신라가 상국(당나라)의 은혜로 삼국을 통일했기에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남쪽에 천왕사를 새로 짓고, 황제의 만수무강을 위해 법석(法席)을 열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습니다만.”(박문준)
그 말을 들은 당 고종은 크게 기뻐하여 예부시랑 악붕귀(樂鵬龜)를 신라로 보내, 사천왕사를 살펴보고 오라고 했다.
“사천왕사를 가려라!”
당나라 사신의 방문 소식을 들은 신라는 크게 걱정했다. 당나라가 ‘사천왕사의 진실’을 안다면 보복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신라는 사천왕사 남쪽에 가짜로 절을 짓고는 사신을 기다렸다. 이윽고 신라를 방문한 악붕귀가 “황제를 축수한다는 천왕사에 분향하겠다”고 운을 떼자 신라 측은 새롭게 지은 가짜 절로 사신을 인도했다. 하지만 악붕귀는 이 절이 당나라를 속이기 위한 ‘짝퉁’임을 간파하고는 문전에서 버텼다.
“이것은 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군요.”
신라는 금 1000냥으로 요지부동인 악붕귀를 매수했다. 못 이기는 척하고 당나라로 되돌아간 악붕귀는 황제에게 “신라가 천왕사를 지어 폐하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습니다”하고 거짓으로 고했다.
‘사천왕사의 기적’에서 시작된 신라·당나라 간의 싸움은 신라의 완승으로 끝났다. 이후 신라는 연전연승했고, 당나라는 한반도 경영의 야욕을 완전히 꺾었다. 676년 안동도호부 치소를 평양성에서 랴오둥성으로 옮겨갔다.
사천왕사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다. 790년 무렵, 향가인 도솔가(兜率歌)와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지은 월명사(月明師)는 사천왕사 앞에서 피리를 잘 불었는데, 얼마나 소리가 좋았는지 달(月)이 월명을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월명사라는 이름도 이때 얻었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망국의 조짐이 사천왕사에 나타났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종합해보자.
“경명왕 때(918년 혹은 920년) 사천왕사의 소조상이 잡고 있던 활시위가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犬)가 짖었다. 또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다.”
“녹유전에 새겨진 상(像)의 정체는?”
지난 2006년 4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신라 호국불교의 알파요, 오메가’인 사천왕사 조사에 나섰다.
이미 1922~36년 사이, 일제가 경주~울산 간 철도부설과 동해중부선 건설공사를 위해 조사를 벌인 뒤 절터 한가운데를 잘라먹었던 상황. 당시 조사에서는 유명한 녹유전(綠釉塼·녹색유약을 바른 벽돌)이 확인된 바 있다. 이 ‘녹유벽돌편(綠釉塼)’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 등에 소장돼 있다.
그런데 2006년부터 재개된 발굴조사에서 흥미로운 유물들이 확인됐다. 서탑지에서도 녹유전이 발견된 것이다. 최장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사의 말.
“발견된 벽돌편은 녹유전에 새겨진 상(像)의 상반신이었는데, 이것을 일제 강점기에 수습된 하반신과 함께 3D 스캔을 해보니까 딱 맞았습니다.”
또 하나 금당 북쪽에 동·서로 위치한 수수께끼 같은 건물터가 있는데, 그 쓰임새에 대한 해석이 재미있다. 이 건물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방형구조이며, 초석 중앙부에는 지름 22㎝, 깊이 20~22㎝의 원형구멍이 파여 있다.
장충식 교수는 “이것은 삼국유사 기록대로 고려 때도 남아 있었다는 ‘단석(壇席)’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한 바 있다. ‘관정경’에는 문두루비법에 사용하는 원목 크기를 77푼(23.33㎝)이라 했는데, 이 초석의 구멍 지름(20~22㎝)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12월11일 경주에서 열린 ‘신라의 호국의 염원 사천왕사’ 학술심포지엄에서는 새로운 주장도 나왔다. 2008년 발굴에서도 출토된 녹유전 상(像)에 대한 해석과 관련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녹유전에 그려진 상(像)이 사천왕상 혹은 팔부신중(八部神衆)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었지만, 그게 아니라 불법 전반을 수호하는 신왕(神王)이라는 견해(임영애 경주대 교수)가 등장한 것이다.
이렇듯 사천왕사는 140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숱한 이야기거리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사천왕사를 둘러싼 이야기를 보세요. 마치 판타지 영화 같잖아요. 당나라의 한반도 야욕을 물리친 역사적 사실에 온갖 판타지를 입힌….”(조유전 관장)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5) 사천왕사를 지은 까닭 下 - 경향신문 (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