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만 침공은 중남미 국가에 대한 미국의 간섭이 앞으로도 실패할 것임을 보여주었다.
최근, 쿠바와 수교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반가웠다.
1953년부터 1958년까지 전쟁으로 드디어 1959년 1월 미국의 앞잡이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낸 쿠바 독립전쟁이다.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 체게바라 등이 주도 했다.
라울 카스트로와 피델 카스트로 형제는 50 년 이상 쿠바를 독재 권력으로 이끌어 왔으며,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아왔다.
그러나, 쿠바는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여, 세계 최고의 무상의료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비록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이고, 쿠바를 괴롭혔던 미국은 풍족하지만 불행한 나라이다.
특히, 체게바라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피그만 침공은 미국은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1961년 4월 15일, 미국의 지원 하에 반공 게릴라가 벌인 상륙작전이다.
마이애미에 모인 쿠바 망명자들을 군사기지에서 훈련 시켜 쿠바에 상륙해 이들을 통한 게릴라전과 항공 지원으로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본래 계획과 달리 지나치게 많은 기관들이 개입하고 필요 이상의 군사력 투입으로 인해 단순히 소규모 부대들을 통한 게릴라전이 아니라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 상륙작전으로 전개되었고 지형과 항공 지원의 부재, 현지의 정보 부족과 민심같은 여러 사항들로 인해 미 군사 역사상 가장 참혹히 끝난 작전들 중 하나 이자 첩보 및 공작 역사상 가장 처참한 실패 사례 중 하나로 남았다.
아이젠하워 정권 말기인 1960년 3월 백악관과 CIA에 의해 브루투스라는 작전명으로 계획되었다.
마이애미에 거주하던 약 1,500여 명의 쿠바 망명자들을 모아 부대를 창설해 명칭을 ‘2506여단(Brigade 2506)’이라고 짓고
친미 군사정권이 있었던 과테말라 모처에 위치한 비밀 캠프에서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
다만 그해 5월에 발생한 U-2 격추 사건으로 인해 아이젠하워는 외교적으로 궁지에 몰리면서 브루투스 작전에 대한 실행 의욕을 잃었다.
때문에 당시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이 작전을 진행하였으나 이미 임기 말이 다가와 작전이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아이젠하워 정부가 끝나고 신임 대통령으로 케네디가 당선되며 훈련 중이던 1,500여 명의 게릴라는 그대로 실미도 사건 꼴이 나는가 싶었으나 이 작전은 CIA뿐만 아니라 국무부와 펜타곤까지 개입되었다. 지금까지 쓴 비용과 끌어모은 전력을 이대로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케네디는 외교적 위험 부담이 큰 이 작전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러나 노회한 인상의 전임 대통령 아이젠하워에 비해 무언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애송이 같다는 평가를 단번에 떨칠 정도의 탁월한 업적을 쌓아 올리고 싶었던 케네디는 쿠바에 침공군이 상륙하면 쿠바 국내의 호응이 있을 것이란 CIA의 호언장담만 믿고 작전을 승인했다.
사실 배경은 또 하나 더 있다. 피그만 침공이 1961년 4월에 시작되었는데 그해 3월에는 군부에서 더 정신 나간 작전인 노스우즈 작전을 올린 것이다. 케네디 입장에서는 노스우즈 작전보다는 차라리 피그만 침공 쪽이 훨씬 제정신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을 가장 괴롭힌 나라들이 중남미 국가다.
미국은 수도 없이 중남미 국가들의 정치와 경제에 개입하여 이득을 취했으며 직접 군사력으로 개입하여 수 많은 정권의 몰락을 간섭하였다.
피그만 침공은 미국의 중남미 국가 침략의 상징이다.
미국은 피그만 사건을 끝으로 중남미 국가에 대한 더 이상의 간섭을 말았어야 한다.
피그만 침공의 실패는 미국의 자존심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오늘도 뉴스에는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 이야기 뿐이고, 미국은 중남미처럼 다시 간섭을 시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