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의 목에는 빨간 마후라를
- 삼수농장에서
최병호
벨라, 모스크바의 하늘에도 염소자리가 바람이 넉넉한 자리에 떠 있으면 좋겠소
이곳 삼수농장의 양들이 따스한 햇볕 아래서 풀을 뜯을 때 내는 소리는 천국의 소리 같소
양들을 거둘 때 나는 더는 시를 쓰지 않아도 돼 행복하오
펜을 버리고 풀밭에서 양 떼들을 돌보는 것이
나의 새로운 시 쓰기요
눈 쌓인 농장에서 양들의 선명한 발자국을 볼 때
거기서 내 마지막 말을 발견했소
그래서 양 떼들과 함께 내달릴 때 나는 참으로 자유요
무능과 순수로 난 시인이오
이 간단한 이치조차 깨치지 못한 내 어리석음이라니
벨라, 평양에서 기린 목에 붉은 깃발을 내걸자고 노래했을 때
그들은 내게 왜 공화국에 사는 곰이나 너구리의 목에는 붉은 깃발을 걸지 않느냐고 했소*
기린이 외국 것만 좇는 부르조아적 근성의 상징이 될 줄은 몰랐소
이곳 삼수농장에서 만난 양들은 나의 새로운 스승이오
벨라, 나는 오늘도 꿈속에서
시 안 쓰는 자유를 꿈꾸오
나의 양들은 더 이상 사냥개에 쫓기지 않소
양 떼들이 자유로이 달리는 방향이 나의 시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 보내는 첫 시가 되지 않아도 좋소
벨라
*김연수 소설 “일곱해의 마지막”에서
(계간『창작산맥』2023년 봄호 )
[작가소개]
최병호 전남 해남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고려대 언론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열린시학》신인작품상 등단(2021).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
[시향]
최병호 시인은 그의 시 첫행에서 ‘염소자리’를 소환하여 백석의 목소리로 벨라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고대 플라톤의 제자들은 가을 하늘에 역삼각형 모양으로 보이는 ‘염소자리’를 ‘신들의 문’이라 부르고, 이승에서의 수많은 굴레에서 벗어난 인간의 영혼이 이 문을 통해 천국에 간다고 믿었다 한편 동아시아의 별자리에서도 ‘견우직녀’ 이야기와 관련된 ‘견우성’이 염소자리에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백석 시인은 시인들의 시인이다 납북이나 월북이라는 말로 단순히 규정지을 수 없는 향토 시인이다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아오야마가쿠인에서 영어사범과를 졸업하고 소설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으며 시집『사슴』을 자비로 출간한 바 있다 그 후 남한을 떠나 고향 정주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또 분단을 맞게 된 것이다 그런 시인에게 북한 노동당의 혁명과업 수행 도구로서 시 쓰기는 너무나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고민을 토로할 문우 한 사람 없는 시인은 결국 평양의 중앙문단에서 쫓겨나 흔히 오지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삼수갑산 근처 삼수농장에서 양떼를 돌보게 된다
“벨라, 평양에서 기린 목에 붉은 깃발을 내걸자고 노래했을 때/ 그들은 내게 왜 공화국에 사는 곰이나 너구리의 목에는 붉은 깃발을 걸지 않느냐고 했소*”
이 부분은 백석도 평양의 중앙문단에 살아남기 위해 나름 노력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북한 당국에서는 기린이 외국 것만 쫓는 부르조아적 근성을 지닌 상징이라 트집 잡으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질타를 받는다 사사건건 비판적 시선에 정조준되어 삼수농장의 양치기가 된 백석 시인은, 시 안 쓰는 자유를 얻어 차라리 기뻤을 것이다 시인에게는 “양 떼들이 달리는 방향이 새로운 시 쓰기”였을 것이다 러시아 시인 벨라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안내를 맡았던 백석에게 그녀는 유일한 피난처였을 것이고 속내를 터놓을 수 있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서 최병호 시인은 백석의 목소리로
“벨라, 모스크바의 하늘에도 염소자리가 바람이 넉넉한 자리에 떠 있으면 좋겠소”라고, 고백하듯 편지의 말문을 열었을 것이다
글 : 박정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