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멍텅구리입니다.
나는 지금 멍텅구리 아빠를 보고 있답니다.
창 밖에는 비가 옵니다, 부슬부슬. 비는 아침부터 내렸지요. 지금은 저녁이구요.
아빠는 소아병동 뒤뜰 나무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의자는 푹 젖어 있을 겁니다. 아빠도 의자만큼 푹 젖어 있겠구요.
아빠에겐 우산이 없습니다. 우산이야 구내 매접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을 텐데, 괜히 비를 맞고 있는 아빠 때문에 난 무지무지 속이 상합니다. 약도 오르구요. 왜 비는 그치지 않는 걸까요.
비 내리는 날에는 창문조차 열지 못하게 하는 아빠죠. 내가 감기에 걸릴까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랍니다. 하지만 아빠 자신은 흠뻑 비에 젖은 채입니다. 이유를 물으면 아빠는 틀림없이 말하겠죠.
"아빠는 어른이고, 다움이는 꼬마이기 때문이지."
난 얼른 고개를 끄덕일 겁니다. 그렇다고 아빠의 말에 속아 넘어갈 만큼 멍청이가 아니랍니다. 설마 빗방울이 미사일처럼 꼬마만 겨냥해서 떨어질 리가 있겠어요.
나는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요.
다음달이면 3학년 여름박학이 시작되는데, 초등학생이 된 후로 학교에 나간 날을 몽땅 합쳐봤자 여섯 달도 안될 겁니다. 그렇지만 난 6학년 형들의 수학책도 혼자서 풀어버릴 정도로 똑똑하답니다. 어느 때는 내 자신이 아주아주 자랑스러워요. 하지만 내놓고 자랑할 사람이 없어서 가끔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껏해야 아빠인데, 아빠는 빙그레 웃으며 말하곤 하지요.
"공부는 중요한게 아니란다. 살아가는 걸 열이라고 한다면, 그 중 하나쯤밖에 안되는 것이 공부지."
아빠한테 묻고 싶어요. 살아가는 것에 필요한 나머지 아홉은 무엇이냐고요.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물을 수는 없답니다. 왠지 아빠 자신도 자세히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빠가 살아가는 것에 필요한 나머지 부분도 모조리 알고 있다면, 지금처럼 쓸쓸하고 힘없는 모습은 아니겠죠.
아빠는 슬픈 겁니다. 슬퍼서 먼 데 하늘을 바라보며 멍텅구리처럼 비를 맞고 있는 거겠지요. 비가 아빠의 슬픔을 씻어줄 수는 없을 텐데, 꼼짝도 않고 있습니다.
아빠가 점퍼 주머니를 뒤지고 있습니다. 뭘 찾는지 알 만해요. 담배입니다.
언젠가 내가 세상에서 미워하는 것들을 공책에 적어본 적이 있었지요. 모두 수물 다섯 개였고, 담배는 열 세번째를 차지했습니다.
아빠를 사랑하요. 그렇지만 담배 피우는 아빠는 싫습니다.
엄마는 담배피우는 아빠한테 늘 짜증을 냈지요. 그래서 아빠는 담배를 끊어버렸구요. 그런데 내가 다시 입원하면서부터 담배를 또 피웁니다. 담배를 피우는 것과 끊는 것, 모두 아빠가 알아서 할 일이긴 하지만 난 정말 못마땅합니다.
그렇다고 엄마처럼 짜증을 낼 수는 없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선 싫은 일도 참아낼 줄 알아야 한다고, 아빠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아빠고, 그러니까 아빠가 좋아하는 담배쯤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아빠가 내 옆에서 담배 연기를 뿜어낸 일은 없지만요.
우리가 아파트 20층에 살 때가 생각납니다. 아빠는 언제나 베란다로 통하는 유리문을 열고 나가 담배를 피우곤 했습니다. 엄마가 거실에서 담배 피우는 걸 금지시켰기 때문이죠. 베란다 난간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는 아빠의 모습이 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저 밑에서 커다란 손 하나가 불쑥 올라와 아빠 다리를 훌쩍 낚아챌 것만 같았지요. 난간이 뚝 부러지든지요.
나는 겁쟁이가 아닙니다. 겁쟁이라뇨? 의사 선생님들은 씩씩하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걸요. 사실 우리 병실에 나보다 주사든 약이든 잘 참아내는 아이는 없답니다.
그런데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만 가슴이 콩알만하게 오므라듭니다. 나도 모르게 찔끔찔끔 오줌이 새어나올 것 같아요. 그네를 타거나, 하다 못해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는 것도 그래요. 한번은 에버랜다에 가서 '플레시 팡팡'이라는 놀이기구를 탔는데 까무러치는 줄 알았어요. 그때 결심했어요. 어른이 되어도 비행기는 절대로 타지 않겠다구요.
베란다에 서서 푸푸푸, 담배 연기를 뿜어대던 우리 아빠. 그때 내가 정말 싫었던 것은 까마득히 높은 20층도, 담배도 아니었을 거예요.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있는 지금의 아빠처럼 쓸쓸하고 힘없는 모습이었겠죠.
난 꼬맹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아빠는요, 영락없는 꼬맹이 취급이에요.
내 앞에 있을 때면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사람이 바로 아빠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돌아서면 금방 지금 같은 모습으로 날 속상하게 만들 거면서요.
난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아빠는 한 번도 무슨 병인지 말해주지 않았지요. 앞으로도 그렇 게 뻔하구요.
우리 병실에는 온통 백혈병과, 백혈병과 사촌인 재생불량성빈혈 환자들만 있어요. 알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된답니다. 백혈병이 얼마나 끔찍한 병인지도요.
나는 키가 작은 편입니다. 백혈병에 걸린 2년 동안 다른 애들은 쑥쑥 자랐지만 난 그대로에요. 백혈병이 내 키를 나무 기둥에 쾅쾅 못박아둔 겁니다. 또 백혈병은 심술맞은 고양이 톰 같아요. 나는 새앙쥐 제리 꼴이구요. 아무리 도망쳐도 끈질기게 쫓아오는 고양이 톰처럼 백혈병은 나를 못살게 굴지요.
입원과 퇴원, 입원과 퇴원......
2년 전부터 계속 그러고 있습니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열 번도 넘을 거예요. 짧으면 일주일, 길면 두 달씩. 그리고 오늘로 다시 입원한 지 한달하고도 보름이 지났답니다.
벌써부터 아빠한테 퇴원하자고 말하고 있어요. 아빠는 꿈쩍도 않습니다. 입원을 하든 퇴원을 하든 마찬가지일 텐데두요. 어쨌는 빨리 퇴원을 해야 할 겁니다. 아빠는 이제 빈털터이가 분명해요. 원무과에서 아빠른 부르는 일이 많아지고 있거든요. 병원비가 밀렸기 때문이겠죠. 정말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어요, 아빠는.
아빠는 두 손을 점퍼 주머니에 넣고 있습니다. 결국 담배를 찾지 못한 모양입니다. 아까처럼 먼 데 하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낮고 짙은 구름이 가득 들어찬 하늘입니다. 꼭 아빠의 가슴속에 들어 있는 슬픔처럼요.
난 아주 나쁜 아이입니다. 슬픈 아빠를 더 슬프게 만든 나쁜 아들 말입니다.
아무리 아쁘고 힘들어도 그런 말은 하지 말 걸 그랬어요. 난 어째서 이렇게 생각이 모자란 아이일까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답니다. 저절로 쏟아지던 코피처럼 저절로 튀어나온 말이었거든요. 아빠에겐 미안하지만 그말은 내 생각 그대로였어요.
백혈병은요, 까딱 잘못하면 나늘 죽일 수 있는 병이에요.
그 동안 실제로 죽는 아이들을 봤답니다. 자다가 죽은 아이도 있었구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다가 갑자기 뚝 숨이 멈춰버린 아이도 있었죠. 내가 만약 죽게 된다면 자다가 죽은 아이를 닮았으면 좋겠어요.
백혈병에 걸렸다고 모두 죽는 건 아닙니다.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백혈명을 물리칠 수 있대요. 완치가 되어 건강하게 살고 있는 영재 누나처럼요. 하지만 난 요즘 자꾸만 자신이 없어요.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아요.
기도하는 게 좋아요. 기도를 하면 시간이 아주 빨리 지나가거든요. 그 동안은 아픈 것도 잊어버릴 수 있구요. 그렇지만 옛날처럼 병이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진 않아요.
하나님, 빨리 날 하늘 나라로 데려가 주세요.
난 매일매일 그렇게 기도하고 있답니다.
우리 주일학교 전도사님은 말했어요. 하늘 나라는 온통 황금길로 되어 있고, 아픔도 슬픔도 걱정도 없다고. 황금길이든 말든 그건 아무래도 괜찮아요. 아픔도 슬픔도 걱정도 없다면 어서 빨리 그곳으로 가고 싶어요.
이젠 내 병이 지겨워요. 아빠도 그럴 거예요. 또 빈털터리 아빠를 위해서도 그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중이죠. 하지만 내가 하늘 나라로 가버리면 아빠 혼자서 어떻게 살아갈까요? 엄마가 떠났을 때처럼 진탕 술만 먹을까요? 그게 무지무지 걱정이랍니다.
첫댓글 아이구.. 끝부분에서 손 힘풀렸당 히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