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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남대학교 문예창작동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향원(남점순)
'문예창작반 사진과 함께 보는 문학기행'
2007. 6. 23. 09:00~17:00
전남대 평생교육원 앞 출발-> 미암 유희춘선생 사당(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송순선생 면앙정(봉산면 제월리)-> 죽녹원(담양읍 향교리)-> 가마골(용면 용연리)-> <중식> 후-> 동화정(용면 용연리)-> 전남대 평생교육원(귀가)
기행을 수고해 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진을 올려주신 목사님 덕분으로 편집해보았습니다.
장시간 투자했는데 두 곳만 완성하였답니다.
나머지는 언제 올리지요? ^^*
여러분이 쓰신 수필작품 기대합니다.
유월의 장맛비가 시작된 초여름. 기행을 떠나는 마음은 설렘 그 자체, 전날 밤 들뜬 마음은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고 한참을 뒤척인 후에야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창이 훤히 밝았습니다. 잠시 소강상태로 날씨는 이만하면 되었고, 비가 오더라도 강행하고야 마는 전남대문예창작반의 문학기행 전통은 날씨가 문학기행에 맞출 수 밖에 없지요. 그 누구도 말리지 못함을 알기에 벚나무 위로 투투투 투정을 부리 듯 떨어지는 빗방울을 모른 체 발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반가운 얼굴들엔 환한 미소가 가득,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여행은 함께 그 자체로 기쁨입니다.
출발!
첫번째 목적지인 '모현관(미암 유희춘 선생 사당)'으로 향하던 중 잠시 들른 우물.
지금도 여전히 식수로 사용되는 이 우물은 깊은 사연을 간직한 듯 하더군요. 우물을 잘 보존하기 위해 뚜껑을 덮었다는데 그 모습이 좀 아쉽습니다. 옛모습으로 복원할 예정이라는 얘기를 얼핏 들은 것 같습니다.
동네 앞 우물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하늘 향해 길죽긱죽 키가큰 옥수수가 즐비한 그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내내 가물었는데도 그렇게 잘 자란 걸 보면 이 우물물의 물줄기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소산 마을 앞 모현관을 가운데 둔 연못
연못 둘레 돌로 쌓아놓은 석축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처음에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쌓았고, 그 다음에는 흙과 나무(대나무)를 섞어 쌓았으며, 이렇게 화강암(청색빛 돌)을 이용하여 건축을 한것은 일본의 고건축물에서 볼 수 있다고 설명해 주신 이교수님 말씀이었습니다. 석축공법이 토성에서 석성으로 변화하여 나중에 산성으로 변화되었다고 하더군요.
연못 가까이 '연계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올려다 보아야 하지요. 300여 년 정도 되었다는데 그 연계정 위에 앉으면, 시원한 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불어 와 삼복 속 염천 더위가 맥을 못 춘다고 하더군요. 그 얘기를 들으니 삼복속에 한 번 더 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모현관은 위 사진의 연못 가운데 위치한 왼쪽 건물. 오른쪽 뒤 당산나무에는 당산재를 지낸 흔적인지 새끼줄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미암선생은 해남 출생이며 이 곳은 처가라고 합니다.
후손들의 보존각 '모현관' 앞
안내 표지판을 뚫어져라 바라보시며 읽기에 골몰하신 조순동님.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요?
자, 함께 읽어보실까요.
미암일기 안내 표지판
칼자루 쥐신 이교수님
자, 이제 모현관 앞 이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보실까요?
6월 23일 토요일은 제게 있어 아주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전에 이곳을 방문했었지만 겉모습만 둘러보고 돌아왔는데, 오늘은 내부 전시관에 들어갈 수 있는 행운을 얻었지요.
미암일기는 조선 선조 때 학자인 유희춘 선생의 친필 일기로, 조선시대 개인의 일기 중 가장 양이 많으며, 사회, 경제, 문화, 풍속 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해요. 임진왜란 때 선조25년 이전의 [승정원 일기]가 다 타고 없어 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사료가 없었는데, 이 책은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와 더불어 선조실록의 첫 10년의 사료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일기에 본인의 일상사를 상세히 적었기에 상류층 학자들의 생활상을 엿 볼 수 있으며 관리들의 내면 생활 및 사회, 경제, 문화, 풍속 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해요.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사료총간의 하나로 활자본 7책으로 인간한 바 있는데 최근에 번역본이 간행되었다고 합니다.
모현관 외부는 청색 화강암 벽돌인데 돌 두께가 30센티미터라고 해요.이 벽돌은 온도변화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못 가운데 이렇게 건축되었어도 공법이 탁월하여 기 피해가 전혀 없이 일기가 원형 그대로 잘 보관되어 있다고 해요. 지금의 모현관은 1958년 모현관이 복원되었다고 하더군요. 일본인들이 문화재급의 보존 가치를 지닌 유물을 이런 공법으로 건축하여 보관해 왔다고 하더군요.
드디어 모현관 안으로 안내를 받았습니다. 후손께서 직접 안내해 주시고 해설까지 해주셨습니다.
미암일기 원본입니다. 일기를 조심스레 꺼내어 눈 앞에 보여주셨지요.
보물 제260호인 미암일기(1567. 10. 1. ~1577. 5. 13일 까지 11년 여 동안 기록됨) 원본이 금고 안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일기와 그 일기를 출판한 목판들(그렇다면 조선총독부가 썼던 활자본?)이 함께 보관되어 있었지요.
일기 첫 장 겉 표지
누런 원본아래 하얀 종이가 보입니다. 그것은 '배접'이라고 하는데 1982년 문화재관리청에서 일기원본 훼손을 막기 위해 이렇게 일일이 한장한장 모두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일기의 겉 표지는 나무판에 무늬를 넣어 만들었는데 '능화판'이라고 부르며 귀한 자료라고 합니다. 역시 따로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일기 원본 2
너무 송구스러워 감히 손으로 만지기가 망서려졌습니다.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귀한 보물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이삼일에 한 번 쓰는 일기에 저 자신의 일상만을 세세히 기록하는 제 자신이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왜 이렇게 좁고 작게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종이가 귀한 탓도 있었겠지만, 하루의 일기가 대략 다섯줄 이상인 날도 많았습니다. 날자와 날자 사이의 여백도 거의 없었고 어쩌면 그렇게도 촘촘하고 가지런하게 써 내려갔는지, 붓으로 쓰신 한글자한글자에 선생님의 온기가 스며있는 듯 했고, 반듯반듯한 글씨에서 힘이 느껴졌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일기였습니다. 그래서 더 자세히 꼼꼼하게 살펴보았지요.
일기 원본 3
일기 원본 4
오늘 일기를 펼쳐보자고 어느 분이 제안하셨습니다. 그래서 일기를 열어 날자를 찾긴 했는데 도무지 읽을 수 없는 유형의 활자들이......
한자 공부좀 열심히 해야되겠습니다. 아참, 최근에 번역본이 나왔다고 하는데 강선생님께서 마무리 작업까지 마치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지금 건립중인 유물전시관이 완성되면 거기에 전시되지 않을까요. 그 때를 기다리는 편이 제가 한자를 공부해서 해독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겠습니다. ^^* 제 고민을 해결해 주신 강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자, 이제 목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목판에 대해 설명 중이신 이교수님 (진지+진지)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새롭게 알게 되고 느끼고 체험하게 되는 문학기행은 꼭 권장할 만 하지요. 덕분에 제 머리와 가슴은 지금 고급 지식으로 채워지는 중이지요. 허선생님 공감하시나요. 이숙희님, 주미경님도 동감이지 않으실까요.
목판에는 완판본과 안성판, 남해판이 있다고 하는데 완판본은 전주와 완주에서 18세기에 가장 왕성하게 새겨졌다고 합니다. 춘향전은 완판본이라고 하시더군요. 그 외는 안성판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해요.
처음에는 한 쪽만 새겼는데 이어 양면으로 새겼다고 하지요. 중국에서 처음 유래될 때에는 죽간에 먹물로 글씨를 새겼고 -> 흙을 구워 글자를 새기다 -> 돌 -> 나무(목판) -> 그 다음 금속활자가 출현했지요.
목판에 쓸 나무들은 남해에서 들여왔는데 글자를 새긴 이들은 절의 노비나 관청노비들이었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오자가 하나 나오면 권장을 맨살에 20대씩이나 맞았다고 해요.(2자 - 종이를 대고 맞고, 3자-헝겊을 대고 맞았다고 해요) 아무리 재료가 귀하다고 해도 노비에게도 인권이 있지않을까요. 사람 나고 나무 났지 나무 나고 사람 났나요. 공구인들 제대로 된 게 있었겠느냐구요. 한자한자 손끝으로 일일이 새겼을 조상들 생각에 마음이 아려왔습니다. 미암일기 목판을 새길 당시에는 그런 일이 없었기를 ......
참, 한가지 빠뜨릴 뻔 했군요. 허준을 내의원으로 천거한 분이 바로 미암선생이라고 합니다. 당시 벼슬이 대재학이라고 하더군요. 대재학이면 정2품으로 장관급이군요.
<참고자료> 조선시대의 벼슬
공무원을 9급부터 시작하는 것과 상관이 있지않나싶군요. 제 생각이었습니다.
이 목판에 미암선생의 일기가 새겨졌다는 걸 민지가 알았을거예요.
민지 뒤로 보이는 건 당상관 이상 벼슬을 지낸 분이 타셨다는 '초혼'입니다. 수레를 맬 때는 8사람이 필요했다고 해요. 바퀴가 달린 것도 있다는군요.
민지의 오늘 일기가 많이 궁금합니다.
허선생님, 언느 날자 일기의 목판을 찾으시나요?
임미리님, 오늘 날자 일기의 목판을 찾으셨다구요?
이름표를 가리면 제가 못 알아볼거라고 생각하셨지요? 고선생님.
유심히 들여다 보시는 박선생님.
목판 위의 하얀 먼지 벗을 날을 기다립니다. 유물전시관이 완공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필암서원에 보관되어 있는 목판보다 보관상태가 훨씬 좋다는 이 목판들을 잘 보존해야 하겠습니다.
금고 문을 철커덕 잘 잠그시고 캐비닛도 문 단속, 그리고 마지막 출입구도 문 단속.
이제 미암선생 사당으로 향합니다.
정 중앙의 이 문은 일반인 출입문이 아닌 듯 싶군요. 오른쪽에 일반인 출입문이 따로 있더군요.
보통 사당의 가운데 문은 제사를 모실 때 신이 출입하는 문이라고 합니다. 큰 사당(도산서원의 상덕사)의 경우, 세 개의 문이 있습니다. 삼문(三門)이라고 하는데 맨 왼쪽은 제물이 들어가는 문, 가운데는 신이 출입하는 문, 오른쪽은 제사를 올리는 사람들이 출입하는 문이라고 합니다.
다음 코스로 이동하기 전, 모현관 앞에서 멋진 한 컷을 남기셨군요.
다음 목적지를 향하여 출발합니다. 서두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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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가 좀 바뀌었지만, 이곳은 가마골 용소입니다.
"왜 이곳을 가마골이라고 불렀나요?"
"급하기도 하시군요. 곧 그 궁금증을 풀어드리겠습니다."
강선생님은 이곳 전설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야기를 주욱 들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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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교수님, 열심히 메모하시더니 역시나 ~~~재미있게 다시한번 문학기행을 정리해 보는 기회가 되었고 공부 잘 하고 갑니다. 여름 방학기간동안 건강하게 잘 지내셔요.
고맙습니다. 늘 평안하십시오.
사진을 보니 다시 떠나고 싶어지내요. 교수님 건강하시고, 전화기다리겠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위에 오자가 몇개 나왔군요. 스크랩했더니 수정이 불가하군요. 수필과제물방에 원본에 수정해 놓았습니다. 의미있는 문학기행이었습니다. 문예창작반 동우여러분께 항상 좋은 일들만 함께 하시길........
가보지 않으신 분들도 생생하게 느길수 있도록 정말 짜임새있게 자세한 설명하여주신 남교수님 정말 고맙습니다. 이번 기행을 위해 애써주신 윤회장님과 강회장님. 총무를 맡아 고생하신 소나무님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