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5월 21일. 수요일. 비, 약올린다.

[아해]

*지난 일기 한 토막 올립니다. 뭐 홀아비 지내는 꼴이야 궁상일색이기로 널리 떠버릴 일은 아니겠으나....





Irish Boy - Mark Knopfler






5월 21일. 수요일. 비, 약올린다.

아침 늦게까지 안개가 답북 끼었다.
비 올 듯 말듯 구름 낮게 내려앉을 듯하다가도 땅까지는 내려오지 않는다.
약만 올린다.
올려다보지 않아서 모르기야 하지만 머리 위 하늘이 메롱, 하고 혓바닥을 내밀었을 것만 같
다. 올 들어 처음으로 텃밭에서 수확을 했다. 시금치. 제법 커 꽃대궁이를 내었다. 지금 거두
지 않는다면 쇠어져 먹지 못할 것이다. 비가 드물어 그런지 야채들이 누렇게 뜨고 잘다. 이
러다가는 채 크지도 못하고 질겨져서 맛이 없겠다. 스프링클러를 옮겨 박아 밭에 물을 뿌렸
다. 스프링클러 곁에 서 있었더니 물방울들이 얼굴로 목으로 팔뚝으로 잘게 부서져 날린다.
콧구멍으로 촉촉한 물방울이 들이친다. 코 점막이 젖는다.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인 듯 두 팔
을 뒤로 제켜 눈을 감고 고개를 한껏 쳐들어 볼까?
왕자병이다.

어제 해온 나물을 삶아 널었다. 뜯을 때는 온 산을 뒤져 헤매며 모아도 삶아 널어 꼬돌꼬돌
해지면 한 줌밖에 되지 않는다. 소매치기 당한 듯 허망하다.

건희 올 시간이 되어 큰길을 내다보니 스쿨버스가 온다.
날이 후덥지근하니 목이 탈 거야. 물병에 음료수를 담아 마중을 나갔다.
한참을 갔는데도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나릿나릿 제 볼 일 다 보며 세월아, 내월아, 한량처럼 걸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저만치에서 오는데 보니 갈지자걸음으로 이리 한 번 둘러보고, 저리 한 번
엎드려 보고, 돌아갈 듯이 뒤돌아보고, 참견할 것도 많다. 폴폴 날아가는 나비도 눈여겨보랴,
못자리 논둑에 쪼그려 앉아 소금쟁이도 기웃거리랴, 저놈 한창 바쁘다.

가까이 오길래 보니 볼에 때꼬장물이 잔뜩 앉았다.
맨손으로 흙장난하다가 땀을 닦았겠지.
나를 보자마자 받아쓰기를 60점이나 맞았다고 자랑이다. 남의 집에서야 60점이면 회초리 들
일이겠으나 우리 집은 칭찬이다. 어제도 빵점, 그제도 빵점이고 이제껏 받아온 점수 중에 40
점이 제일 높은 점수였으니 대견하지 않고 배길 도리가 있나.
칭찬을 잔뜩 하며 음료수를 따라 먹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집에 돌아와 간식을 먹이고 나서 철근을 가져다가 고추, 가지, 토마
토에 지주를 세웠다. 토마토는 사람 키보다 더 클 테니 길게 세워야하므로 산에 올라 베어
진 나무를 골라 몇 개 가져왔다. 끝을 뾰족하게 깎아 나중에 세울 것이다.

저녁 먹기 전 받아쓰기 공부를 시켰다.
평소에는 몸 배배꼬며 딴청이더니 오늘은 칭찬을 받아서 그런지 진득허니 앉아서 더 잘하려
고 한다. 받아쓰기를 다 하고 수학 숙제를 시켰는데 이놈이 또 수학은 그런 대로한다.

텃밭에서 거둔 시금치 데쳐 담백하게 무치고 어제 산기슭에서 베어온 먹우대(머위) 껍질 까
고 쪼개어 들깨가루 넣어 국물 자박하게 끓여 먹어라, 너도 먹어라, 하며 저녁을 맛나게 먹
었다.




5월 22일. 목요일. 날씨. 후텁지근. 덥다, 더워. 여름이네.

텃밭에 야채가 많이 컸다. 솎아주어야 할 때가 지났다.
보기조차 아깝기도 하거니와 아까워서 그냥 두었더니 비좁은 데 바짝 붙어서 저희끼리 다투
느라 크지 못한다.
너무 붙으면 안 돼. 사람이건 식물이건.

며칠 전에 담근 유채 겉절이가 아직 조금 남았지만 달리 쓸 데 없어 얼갈이 배추와 열무,
또 강화 순무, 여수 돌산갓을 솎아내어 김치를 담그기로. 단무지 무는 데쳤다가 냉동실에 넣
어두고 우거지로 쓰면 좋을 듯. 상추, 쑥갓, 치커리, 청경채는 솎아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
냥 두었다. 누가 와서 좀 솎아 가면 좋으련만. 가면서 그냥 잘 먹겠다는 말 한 마디만 건네
고 가면 되는데.

다 다듬어 소금에 절여놓고 간쳐지는 사이 짬 내어 컴퓨터를 켰다.
이제 무엇을 해야하나. 찹쌀가루 꺼내어 풀을 쑤어야 할  테고, 마늘을 갈아야할 테고, 생강
다진 것을 냉동실에서 꺼내어놓아야 할 테고, 또 부추를 다듬어 씻어놓아야 할 테고, 아, 새
우젓도 갈아야하고, 액젓에 고춧가루를 개어 미리 불려놓아야 할 테고.
이번에도 김치가 맛있게 담가져야할 텐데. 그래야 애들이 그나마 밥을 뜰 텐데.
자, 나는 이제 기도 들어간다.
맛난 김치를 위한 기도. (김치 담그기 전 일기)


와서 간 좀 보라고 했더니, 김치가 맛있다며 아이들이 맨입으로 어찌나 집어먹는지 물켤까
봐 말렸다. 성공이다.
내일은 소영이 현장학습 가는 날이다. 김밥을 싸려는데 정작 김이 없다. 김밥 속에 들어가는
재료 중에 무엇 하나라도 빠뜨릴까 봐 신경 곤두세우느라 제일 중요한 김을 놓쳤다. 내 사
는 꼴이 이렇다. 자잘한 것에 신경 쓰느라고 정작 큰 뼈대를 놓친다. 늘 그렇다. 크고 굵게
정리하면서 살자 싶다.
하는 수 없이 야채 고기 다져 볶아 넣고 비벼서 주먹밥을 만들었다.
곁에 오렌지와 치자단무지, 햄을 곁들였더니 볼만하다.

[행인]

홀아비 생활이 아무리 궁상이라해도 아이들 악다구니 왁자지껄이 있는 한 초라하지 않다. 텅 빈 공간만큼이야 속절없지 않다. ....아름답다.

[아해]

히히, 저번에 펭귄님이 작은애 지내는 일기 올리라는데 내가 너무 야박하게 굴었나 싶어 올렸지요. 볼 사람 몇만 보라고. 아래에다. 올리자 마자 조회수 올라가길래, 누가 이 아래에까지 내려와서 봤을까 했더니 행인님이셨구만. 그러지 말고 즐겨요, 홀몸!

[파도]

마자마자 행인 님, 말쌈!! 참, 아름다운 아해 님과 그 아이들!!!

[사월이]

오렌지, 치자단무지, 햄, 주먹밥 도시락 정말 예쁘고 맛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