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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능원묘를 몇 년 다니고 나서는 조금씩 신라 왕릉에도 관심이 갔으며, 만약 경주에 능원묘 답사를 간다면 제일 먼저 가 보고 싶었던 왕릉이 능역 입구에 문·무인석과 호석이 서 있다는 괘릉이었습니다. 구정리 방형분에서 괘릉가는 버스를 타려고 했습니다만,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는데다가 정류장에 안내판도 없어서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서 30여분을 기다리다가 결국은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 운전사와 이야기를 하던 끝에 자기가 잠시 기다릴테니 싸게 다른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해서 급히 괘릉을 둘러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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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괘릉 입구 전경 |
▲ 봉분은 매표소를 들어서서 전방 좌측으로 들어감 |
보물 1427호인 괘릉 석상 및 석주 일괄은... 사적 제26호 경주 괘릉을 중심으로 좌·우 입구에 한 쌍씩 석조상들이 배치 되어 있으며 수량은 문·무인 4점, 사자상 4점, 석주 2점으로 총 10점이다. 무인상은 서역인 또는 서역풍을 나타내고 있어서 동서문화의 교류적 측면에서 크게 중시되고 있는 자료이며, 통일신라시대 절정기의 사실적인 조각인 성덕대왕 능 석인상을 계승하여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된 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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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에서 바라 본 석인상과 사자상 그리고 괘릉 전경 |
괘릉 입구에서 매표를 하고 안으로 들어서니 안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입구에서 바라보면 괘릉 주변은 소나무들로 둘려져 있었으며, 좌측 안쪽으로 괘릉의 능역이 보입니다. 그리고 정면에는 석상들이 좌우로 나란히 서 있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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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상의 늠름한 모습 |
▲ 석상 앞에서 바라 본 괘릉 원경 |
매표소를 들어서서 50여미터 전방에서 방향을 좌측으로 틀면 괘릉이 멀리 보이고 좌우로 석물이 한 쌍씩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맨 앞에는 석주가 그 다음으로 무인석, 문인석, 사자 두 마리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사자 두 마리는 암수로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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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괘릉 입구 좌측편에 세워진 석상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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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괘릉 입구 우측편에 세워진 석상 전경 |
괘릉을 가기 전에 자료를 보면 석인들이 서양인 같다고 하더니 무인석이라고 하는 석인은 아라비안 상인이나 소크라테스 흉상을 보는 듯 했으며, 문인석의 얼굴 생김도 제 눈에는 중국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의복들도 특이한 모습들이고... 좌우에 한 쌍씩 서 있는 석 사자들의 모습들은 늠름하며 살이 토실토실 찐 것이 근육질도 생동감있게 조각이 되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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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괘릉 전경 |
▲ 괘릉 앞의 상석(?) |
석물에서 100여미터전방 정면에 괘릉이 있으며, 봉분 앞에는 키가 높은 상석이 놓여 있습니다. 괘릉의 봉분은 호석을 두루고 사방에 난간석을 둘러 놓았습니다. 호석에 새겨진 12지신상의 조각들은 돋움을 많이 주었으며, 몇 개의 지신상을 제외하고는 조각들이 선명하니다. 12지신들은 전투복에 손에는 무기 같은 것을 하나씩 쥐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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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괘릉 방향에서 바라 본 입구 전경 |
인터넷에서 괘릉을 검색하면 답사기의 대부분이 사진 몇 장만 달랑 있어서 관심이 있는데, 못 가본 사람들에게는 감질 나더라구요. 그래서 아래에 괘릉 석물을 자세히 보실 수 있도록 사진을 많이 올려 놓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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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괘릉 좌측 전경 |
▲ 괘릉의 둘레석(호석)과 난간석 |
괘릉 둘레석의 12지신상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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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릉 석인상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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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무인석 모습 |
▲ 우측 무인석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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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문인석 모습 |
▲ 우측 문인석 모습 |
괘릉 사자상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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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첫 번째 사자상 앞뒤 모습 |
▲ 좌측 두 번째 사자상 앞뒤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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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첫 번째 사자상 좌우 모습 |
▲ 좌측 두 번째 사자상 좌우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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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측 첫 번째 사자상 앞뒤 모습 |
▲ 우측 두 번째 사자상 앞뒤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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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측 첫 번째 사자상 좌우 모습 |
▲ 우측 두 번째 사자상 좌우 모습 |
괘릉은 낮은 구릉의 남면 송림 사이에 있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掛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피장자에 대해서는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으로 보고 있다. 원성왕은 본명이 김경신(金敬信)이고, 내물왕의 20세손이며 박씨 계오부인(繼烏夫人)의 아들이다. 재위기간에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신설하고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98년 12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원성(元聖)이라 하고,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성 왕릉이 토함산 서쪽 동곡사(洞鵠寺)에 있으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崇福寺)라 한다고 전하는데, 지금 괘릉 인근에 숭복사지(崇福寺地)가 있어 괘릉이 원성왕릉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괘릉은 원형봉토분으로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다. 봉분 밑의 호석은 지대석 위에 높이 95㎝, 길이 120㎝ 크기의 판석으로 된 면석을 올렸다. 면석의 사이에는 봉분 내부로 뿌리가 길게 뻗어 있는 탱석을 배치하였는데, 탱석의 전면은 면석보다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탱석에는 두 칸 건너서 하나씩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였으며, 그 조각수법은 자유롭고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십이지신상의 조각품 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손꼽힌다. 봉분의 바로 앞에는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사각형 상석이 놓였고, 봉분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위치로부터 시작하여 동서로 약 25m 사이를 두고 북쪽으로부터 석사자 두쌍, 문인석 한쌍, 무인석 한쌍과 화표석(華表石) 한쌍이 얼굴을 마주 대하고 차례로 늘어서 있다. 또한 현재는 없지만 최치원이 비문을 쓴 석비가 있었다 한다. 석사자는 각각 자세와 표정이 달라 능숙한 석조기술을 보여주고 있고, 감정표현이 매우 풍부하고 세련되었다. 문인석은 각선이 분명하고, 관복이나 근엄한 안면 처리가 매우 우수하다. 무인석은 의복이나 안면의 모습이 신라인이 아니다. 깊은 눈, 넓은 코, 숱이 많은 수염 등 서역인(西域人)의 얼굴을 하고 있어 주목되는데 페르시아 무인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괘릉의 무덤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둘레돌에 배치된 12지신상과 같은 세부적인 수법은 신라의 독창적인 것이다. 또한 각종 석물에서 보여지는 뛰어난 조각수법은 신라인의 예술적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
경주 괘릉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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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 |
또 다른 곳에서 스크랩 해 온 글
무언의 증인, 무인석
△ (위로부터)괘릉 무인석의 좌, 우, 중앙 얼굴모습. ·경주 외동면 괘릉리에 있는 괘릉의 전경 (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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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에서 동쪽으로 35리쯤 가면 외동면 괘릉리에 자리한 괘릉에 이른다. 사적 제26호인 괘릉은 신라의 수많은 능 중에서도 둘레돌이나 돌사람, 돌짐승 등의 외호석물을 골고루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돌새김기법 또한 뛰어나서 신라 능묘의 대표적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능묘의 주인공 문제를 비롯해 능 앞에 배치되어 있는 외호석물로서의 무인석상의 외래적인 모습이나 돌사자의 이례적인 위치 등 일련의 문제에서 이론이 분분하다. 그 중에서도 무인석상을 에워싼 논란이 가장 많다.
괘릉이란 이름의 유래부터가 아리송하다. 물이 고여있는 연못 자리에 능을 쓰다보니 왕의 관을 돌 위에 걸터놓고 흙을 쌓았다고 하여 ‘걸괘’자를 붙인 ‘괘릉’이라 이름하였다는 속설이 있다. 왕릉터라면 명당 중의 명당일 턴데, 굳이 물 고인 연못지를 그런 곳으로 택했다는 것은 유례 드문 기문이다. 그래서인지 능비도 없어, 그 주인공을 38대 원성왕(785~798년 재위)으로 어림잡고 있다. <삼국유사>에 보면, 원성왕릉은 토함산 숭복사(일명 동곡사)에 있다고 했는데, 그 절터가 괘릉 부근에서 발견됨으로써 그러한 추측의 근거로 삼고 있다.
소나무숲이 주변을 두텁게 둘러싸고 있어 청신하고 고고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괘릉은 크게 봉분과 그 전방에 배치된 몇 가지 석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봉분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곳에서부터 동서 25m 사이에 돌사자 2쌍, 문인석과 무인석, 화표석이 각각 1쌍씩 있다. 그중 화표석은 없어져 버렸다. 주목을 끄는 것은 이색적인 용모와 복장을 하고 있는 한 쌍의 늠름한 무인석이다. 우리가 흔히 절에서 보는 수호 담당의 사천왕이나 역사상 같은 험상궂고 우락부락한 상징적 존재와는 달리, 너무나 사실적인 인물 형상으로 능을 지키고 서있다. 경주의 고분군과는 좀 동떨어진 이곳에 통일신라 시대의 가장 완벽한 능묘형식으로 조영된 괘릉에 나타난 이 이방인은 과연 누구이며, 왜 당당한 외호석물로 등장했을까? 지난 80여년간 구구히 논의해 오던 문제다.
△ (왼쪽으로부터)서역 모자인 고깔모를 쓴 남자 토용(7세기, 경주 황성동 돌방무덤에서 출토)·두 손으로 홀을 잡은 서역 남자 토용상(경주 용강동 돌방무덤에서 출토, 신장 17㎝)<국립경주박물관 소장>·두 문명의 융합을 상징하는 괘릉 무인석에 달린 복주머니(필자 제공) |
어깨가 넓으며 목과 허리에서 한번씩 꺾여 몸의 중심이 한쪽 다리에 실리면서 자신있게 버티고 서있는 자세와 양팔의 위치, 그리고 넉넉한 얼굴의 표정 등은 실로 외호담당자로서의 무인 형상으로는 손색이 없다. 이러한 외모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심목고비(深目高鼻)한, 즉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높은 서역인상이다. 동양사에서는 흔히 아리안계나 터키계의 인종상을 심목고비로 묘사한다. 그런데 무인상임에도 불구하고 의상은 의외로 갑옷 같은 딱딱한 복장이 아니라, 장식이 별로 없는 부드러운 느낌의 옷이다.
용강동·황성동 고분에선
문관용 패물을 든 토용,
꼬깔모 쓴 남자상도 출토
7~8세기 신라에는
서역인이 많이 살았었군
이러한 심목고비한 무인석상은 괘릉 뿐만 아니라, 경주시 도지동에 있는 성덕왕(33대, 702~736년 재위)릉과 경주 북방 안강에 있는 흥덕왕(42대, 826~835년 재위)릉에서도 발견된다. 성덕왕릉의 무인석은 머리부분만 남아있으며 얼굴의 파멸이 심하여 형태를 가려내기가 어려우나, 흥덕왕릉의 무인석상은 괘릉의 것과 엇비슷하여 그 실체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사향길에 접어든 후대 신라사회의 퇴조를 말해주듯 새김기법에서는 둔화와 부진을 보여주고 있다. 즉 눈이나 코, 입 등 얼굴 형상에서 선이 뚜렷하지 않고, 한 손은 무기를 들고 다른 손은 주먹을 쥔 채로 직립해 있는 부동자세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며, 목이 바르고 어깨가 으쓱 올라붙어 부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별로 없다.
△ 경주 용강동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15점 남자 토용상(8세기,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
이렇게 신라인들이 별난 서역인 형상을 능의 외호물로 취한 것은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호인용(胡人俑, 흙으로 만든 서역인상)을 본받았다는 것이 지금까지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그 근거는 괘릉이나 흥덕왕릉의 무인석상 모습이 중국의 명기용 호인용을 닮았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서역 무장들의 장대한 체구와 색다른 용모를 모델로 하여 무인상의 호인용을 만들어 능묘의 명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으로부터의 문물을 섭취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던 신라 귀족들이 지킴역의 명기로 사용되는 호인용 형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싸한 논리다. 그러나 당나라의 능에서 출토된 호인용과 신라의 무인석을 구체적으로 비교해 보면, 그것은 차원을 달리한 서역문물의 수용임을 발견하게 된다. 명기인 호인용의 크기는 30㎝ 안팎에 불과하지만 괘능이나 흥덕왕릉의 외호물인 무인석은 그 8배에 달하는 대형조각물이며, 기법에서도 선명성이나 생동감이 훨씬 더 넘쳐 흐른다. 뿐만 아니라 호인용은 갑옷을 입고 있으나 무인석은 평범한 복장(호복) 차림으로 크게 다르다.
이러한 수용은 서역인에 대한 직관, 즉 현장의 서역인을 직접 모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무인석에 나타나고 있는 얼굴의 형상이라든가 터번, 복장은 분명히 서역인의 특색 그대로이며, 그 선명성과 정확성 또한 놀라울 정도다. 이것은 서역인의 용모나 복식에 관해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 조공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중국 호인용의 무사복과는 달리 민간복을 입히고 체구나 형상 자체를 크게 확대시킨 것은 바로 이러한 파악과 지견에 기초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서역인에 대한 현장모델화가 없이는 이토록 정확한 형상 조각은 도무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현장모델은 바로 일찍이 이상향 신라를 찾아온 서역인들이었을 것이다.
움푹들어간 쌍꺼풀 눈
메부리코에 팔자 수염
괘릉 무인석은 분명 서역인
복주머니를 찬 것 보니
신라 사람이 다 됐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괘릉 무인석이 오른쪽 옆구리에 지름이 10㎝ 가량 되는 복주머니를 차고 있는 모습이다. 복주머니는 동양, 특히 한국의 고유한 장신구로서 신라 땅에서 서역인이 복주머니를 차고 있다는 사실은 그 어떤 조각상의 예술성보다는 서역인의 신라 내왕이나 정착에 바탕을 둔 두 문명의 융합 결과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밖에 1986년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서역인 토용(土俑, 흙으로 형상을 만들어 구은 것)상은 여러 가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만들어진 이 무덤에서는 채색된 인물 토용들이 나왔다. 이것은 순장하는 풍습이 사라진 뒤에 그것을 대신해 무덤의 주인공을 수호하도록 토용을 만들어 부장한 것으로 짐작된다. 무덤의 주인공은 진골 왕족으로 추정되며, 인물 토용은 남자상이 15점, 여자상이 13점으로 모두 28점이다. 그런데 남자상 중 용모가 괘릉의 무인석과 매우 비슷한 한 인물(키 17㎝)이 손에 홀(笏)을 잡고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서있다. 그 말고는 홀을 잡은 사람이 한두명밖에 안된다. 홀은 임금을 만날 때 신분을 상징하는 조복에 갖추어 손에 쥐는 패물이다. 조복으로 보아 그는 지체 높은 문관임이 틀림 없다. 7세기로 추정되는 경주 황성동 돌방무덤에서도 여러 점의 토용이 나왔는데, 그 중에도 서역인들 고유의 모자인 변형모(弁形帽, 고깔형 모자)를 쓴 이색적인 남자상이 끼어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무인석이나 토용은 단순한 형상적 기능을 노린 상징물이 아니라, 늦어도 7세기 경부터는 서역인들이 신라땅에 와서 살면서 무장이나 문관으로까지 기용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상당한 정도의 사실성이 투영된 증거물이다. 기나긴 세월의 풍진 속에서도 의연히 서있는 저 의인화된 무인석이나 토용은 우리와 서역인들 사이에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주고받으면서 삶을 함께 해 온 그 옛날의 만남과 어울림의 역사를 오늘도 변함 없이 무언으로 증언하고 있다.
정수일 교수
첫댓글 이렇게 덕분에 신라의 모습을 보게되었네요,,감솨~!!
신라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 볼 수있는 기회가 많을 듯..ㅎㅎ괘릉~~길따라 가볼까합니다....*^^*
똑같아요 ~~~~ㅎㅎㅎㅎ 괘릉 초등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