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없네, 나는 화장실 문의 헛도는 손잡이를 달칵거리며 중얼거렸다. 영화 '베테랑'의 명대사가 현실이 되었다. 기사님, 맷돌 손잡이 알아요? 맷돌 손잡이를 어이라 그래요, 어이. 맷돌에 뭘 갈려고 집어넣고 맷돌을 돌리려고 하는데 손잡이가 빠졌네? 이런 상황을 어이가 없다 그래요. 조태오에겐 어이가 없고, 나에겐 제대로 된 화장실 손잡이가 없는 것이다.
신축 오피스텔의 첫 입주자였던 나는 사방팔방 새것들로 가득 찬 집에서 행복하기만 했다. 새 벽지, 손때 묻지 않은 전등스위치, 잘 닦으면 얼굴이 비치는 새 데코타일, 주방의 새 인덕션과 기름때 없는 환풍기, 보호 비닐이 다 벗겨지지 않은 창문틀. 친구와 보증금을 합쳐 전망이 좋은 오피스텔의 임대계약서를 쓴 날부터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행복하기만 했다. 그래서 더더욱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 기물 파손이나 고장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나려면 모름지기 낡고 오래된 건물이 배경이어야 마땅할 게 아닌가.
세상은 우연한 사건으로 가득 차 있고 잦은 우연은 운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와 맺어진 인연도 우연이고, 어떤 상황에 놓인 것도 우연이고, 개 한 마리 키우는 것도 우연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억 개의 문손잡이 중 하나가 불량이었고, 그 불량 손잡이는 내 집 화장실 문에 달렸고, 내 집 화장실엔 창문이 없었고, 내 룸메이트는 남자친구와 일본 여행을 갔고, 휴대전화는 옷장 속에 걸린 코트 속에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던 사건 초반에는 우습기만 했다. 아무리 손잡이를 돌려봐도 요지부동인 화장실의 '새문'에 가로막혀 서선 피식피식 헛웃음만 흘렸다. 20분쯤 지나자, 여기서 나가면 이 사건을 라디오에 사연으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했고, 30분쯤이 지나자 공포를 과장해서 써 보내겠다고 생각했다. 40분쯤이 지나자 나는 현실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이번엔 문손잡이가 쾅쾅 부서져라 잡아당겼지만 손잡이와 문의 구멍이 맞물린 사이가 조금 벌어졌을 뿐,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50분쯤 지났을 땐 비로소 50분이 아니라 몇 시간이 흘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의 상대적 흐름을 자각할 땐 주로 좋지 않은 사건에 휘말렸을 때다. 휴대전화는 확실히 쓸 수 없고 룸메이트는 다음 날 오후에 돌아올 것이다.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나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혼자이며 죽을 때도 혼자이지만 어딘가에 갇힌 채 혼자일 수는 없다. 나는 세상의 모든 중국제 부속을 저주했다. 어깨로 문을 퉁퉁 쳐봤지만 안으로 열리는 문엔 아무 소용이 없었다.
14시간23분. 나는 정확히 14시간23분 동안 화장실에 갇혀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룸메이트가 날 구해줄 때까지, 내가 이 세상에 14시간 동안 부재했다는 사실을 알아준 사람은 없었다. 환풍구 쪽에다 대고 힘껏 소리도 질러봤지만 입주민이 많지 않은 건물에서 내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없었다. 만약 나에게 룸메이트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거기서부터는 웃을 일이 아니다. 내가 설사 140시간을 갇혀 있었다 해도 내 생사를 굳이 확인하려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직장도 없는 프리랜서에, 주변 사람들은 물론 가족들과도 통화를 자주 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장실에서 탈출하자마자 냉장고에 있는 만두를 구워 실컷 먹은 후 나는 내가 아는 모든, 혼자 사는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잘 지내지? 딱 네 글자. 답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잘 지내든가 못 지내든가. 하지만 메시지가 왔다는 것만으로 나는 안심했다. 적어도 화장실에 갇혀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 아닌가. 세상 모든 사고가 우연이라고 해도 '연'으로 이뤄지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화장실에 갇힐 운도 있다면 누군가 날 구해줄 수 있는 연이라도 만들기 위해 경우의 수를 늘리는 수밖에. '잘 지내지'에 대답하지 않는 누군가가 있다면 관계의 불안정성이 아니라 그의 안위를 걱정해야 한다. 나는 타자의 안위에도 무관심했지만, 무관심으로 역풍을 맞을 나 자신에게 더더욱 무관심했다. 수돗물로 목을 축이며 나는 화장실 안에서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더불어 살리라. 변기에 걸터앉았다가, 마른 바닥에 누웠다가, 찬 바닥에서 선잠이 들었다가 작은 소리에도 놀라 깼던 14시간 동안 울었다 웃었다를 반복하며 내 자신과 약속했다. 나의 소외 따위를 살펴주지 않는 이 풍진 세상, 어이없이 고독할 수는 없다. 에라이, 더불어 살리라.
첫댓글 어머나~~~!!!
길치에 손으로 만지는 것이 남들보다 떨어지는 사람인지라...
특히 외부의 화장실 갈 때는 필수조건이 휴대폰입니다.
혹 이런 '고립'의 두려움에 대한 대비 ~~~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에
휴대폰 없었을 때요?
좀 민망하기하지만
문을 꼭 닫지않는 것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