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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의 고개]
여우목고개와 문경
여우목을 중심으로 한 문경(聞慶)의 인문학·2
오상수(吳尙洙, 길 위의 인문학)
문경의 신북천 — 영강의 상류
대미산은 백두대간의 정기(精氣)가 문경 땅으로 뻗어가는 시발점이요, 여우목은 바로 그 목줄기이다. 그리고 여우목을 경계로 하여, 백두대간 남쪽의 산곡에서 발원한 영강(穎江)과 금천(錦川)은 문경인의 생명과 모든 삶의 터전이며, 문화와 역사가 발흥하는 근원이다. — 금천은 그 경관이 아름다워 일찍이 구곡원림이 경영되었고, 문경의 신북천에도 그 계곡물이 청정하고 주변의 경관이 빼어나 구곡원림이 경영되었다. — 이제 신북천(영강) 유역과 금천 유역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신북천 ― 옥소 권섭의 화지구곡(花枝九曲)
조선조 유학자들은 자연에 귀의하여 자연과 물아일체가 됨으로써 학문을 궁구하고 본성을 깨닫고자 하였다. 그들은 자연을 풍류의 대상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천리(天理)를 체득하고 마음을 수양하는 철학적 공간으로 인식하였다. 청정한 승지(勝地)에 자리를 잡아 초가나 정자를 짓고 산수를 즐기며 도(道)를 체득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특히 송나라 주자(朱子)를 높이 존숭하여 그의 학문과 철학은 물론, 도락의 풍류까지 추종하였다.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으로 삼아 자신의 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하면서 주자의 무이구곡가의 차운시를 짓거나 자신들이 경영하는 구곡원림을 대상으로 시를 읊었다.
신북천(身北川)은 그 북쪽에 우람한 백두대간이 이어져 나가고 남쪽에는 기암고봉의 성주봉을 비롯한 운달지맥이 솟아 있어, 그 사이의 깊고 맑은 계곡이 선계와 같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 ‘화지구곡(花枝九曲)’은 옥소(玉所) 권섭(權燮)이 문경군 신북면 화지동(지금의 문경읍 당포리)을 중심으로 신북천에 경영했던 구곡원림이다.
권섭(權燮, 1671~1759)은 본관은 안동이고, 자가 조원(調元)이며, 호가 옥소(玉所)이다.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권상명(權尙明, 1652~1684)이고, 큰아버지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는 송시열의 수제자로 우의정, 좌의정 등의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학문과 교육에만 정진한 학자이고, 작은아버지 권상유(權尙遊)는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아우는 대사간 권영(權瑩)이다. 영특하였지만 14살에 아버지를 여읜 권섭은 백부인 수암 권상하의 보호와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권섭은 좌의정을 역임한 외조부 이세백(李世白), 이조참판을 지낸 장인 이세필(李世弼), 백부 권상하, 윤이건, 우홍성, 채막 등 고관 대학자들로부터 체계적으로 글을 배우고 수준 높은 학문을 전수 받아 방대하면서도 빼어난 문학창작의 기반을 닦았다.
1686(숙종 12)년 16세의 나이로 경주 이씨 이조참판 이세필(李世弼)의 딸과 혼인하였다. 젊은 시절(19세) 인현왕후 폐출 사건에 소두(疏頭, 집단상소의 우두머리)로서 죄를 받아 창성(昌城)으로 유배를 당한 이후 벼슬길의 뜻을 접고, 오로지 탐승과 창작 활동에 매진했다. 옥소는 25세에 첫 부인 경주 이씨가 별세하자, 중종의 4대손 중의대부 대원군 이광윤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60년을 함께 해로하였다.
30세 이후 경향 각처를 탐승·유람하던 옥소(玉所)는, 54세에 황강리(지금의 제천시 한수면, 남한강 가)에 정착하여 살다가, 하늘재 너머 70여 리 떨어진 부실(副室) 전주 이씨 부인이 살고 있는 문경 화지동(현 문경읍 당포리)에 머물며, 화지구곡(花枝九曲)을 경영하고 〈화지구곡가〉를 지었다. 그리고 관음리에서 하늘재를 넘어 송계계곡을 따라 황강리를 왕래하였다.
知是斯區有地靈
溪流九曲此澄淸
幽深洞裏昭明界
到處名村自舊聲
이 구역에 땅의 신령이 있음을 알겠으니
계곡물 아홉 구비 이렇게 맑고 깨끗하네.
그윽하고 깊은 골짜기에 밝고 환한 세상 열어
곳곳마다 이름난 마을 예부터 명성이 높았네.
〈화지구곡가(花枝九曲歌)〉 서사(序詞)이다. 화지구곡은 문경의 신북천과 조령의 조령천이 합류하여 영강(潁江)으로 흘러드는 마원(馬院)에서 시작하여 신북천 상류인 하늘재[大院]에 이르는 아홉 굽이인데, 제1곡이 마포(馬浦), 제2곡이 성교(聲校), 제3곡이 광수원(廣水院), 제4곡이 고요성(古要城), 제5곡이 화지동(花枝洞), 제6곡이 산문계(山門溪), 제7곡이 갈평(葛坪), 제8곡이 관음원(觀音院), 제9곡이 대원(大院)이다.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과 같이 일반적으로 구곡은 강의 하류에서 상류로 이어진다.
* 제1곡 마포(馬浦)
— 마포는 신북천과 조령천(초곡천)이 합류하여 넓은 시내를 형성하는 굽이에 자리한다. 지금의 문경시 마원리이다. 이 굽이의 특징은 지형이 확 트였다는 점이다. 넓은 들과 시내가 어우러져 한 굽이를 형성하는 이곳을 옥소는 제1곡으로 설정하였다.
一曲何無泛釣船
中間澄闊似江川
官居坐倚晨昏閣
野色村光靄靄烟
일곡이라 어찌하여 고깃배 띄움이 없겠는가.
중간이 맑고 넓어 강이나 내와 같네.
관아의 신혼각에 기대 앉아 있노라니
들판과 마을 빛이 안개 속에 아련하네.
옥소(玉所)는 문경 관아의 누각에 올라 마원의 넓은 들을 바라보며 강물에 배를 띄우는 광경을 상상하며 시를 지었다. 지금은 들판 가운데를 도로가 가로지르고 강물도 예전 같지 않아 그 옛날의 운치는 상상으로서 새겨볼 뿐이다.
* 제2곡 성교(聲校)
— 성교는 ‘명성이 자자한 문경향교(聞慶鄕校)’를 말한다. 마 문경읍 교촌리 언덕 위에 있다. 우뚝 솟아 있는 건물의 위용만큼이나 지역의 인재를 양성하는 훌륭한 교육기관이다.
二曲高臨主屹峰
明宮揖遜好儀容
元來七事瞻先後
左海文風仰九重
이곡이라, 그 뒤로 주흘봉이 높이 솟아
명궁(향교)에 공손히 읍을 하는 모습이네.
예전에 일곱 가지 일 선후를 따져 보니
동방의 문풍(文風)은 천자를 우러러 보았네.
권섭은 학문을 통하여 유가(儒家)의 도(道)를 지향한다. 문경향교는 1392년(태조1)에 창건되고 1620년에 중건되었다. 향교에는 중국 주나라의 5성, 송나라의 4현 , 우리나라의 18현을 배향하고 있다. 옥소가 향교를 구곡의 한 굽이로 설정한 것은 성현을 통하여, 학문과 윤리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향교 뒤에 높이 솟은 주흘산도 고개를 숙이고 절[揖]을 한다고 노래한다.
* 제3곡 광수원(廣水院)
— 광수원은 문경읍 문경향교와 고요리 사이에 있다. 신북천에 신리천이 합류하는 곳이다. 광수원의 북쪽 주흘산 동남쪽 산리천 산곡에 문경읍 팔영리*가 있다.
三曲如浮萬斛船
村名廣水幾何年
然疑自古滄桑事
葛畝鋤歌又可憐
삼곡이라 만곡을 실은 배가 떠 있는 듯하니
광수(廣水)라는 마을 이름 얼마 되었나.
그 옛날 창해의 변화 있었는지 없었는지
칡 우거진 밭에 김매는 노래 애틋하다.
☞ 신리천 산곡의 * [팔영리]는 마성의 봉명광산을 경영하며 승승장구하여 봉명그룹을 이루고 문경에서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서봉(瑞鳳) 이동녕(李東寧, 1905~1992) 선생이 이곳 팔영리 출신이다. 1958년 학교법인 문경학원을 설립하여 문경여자중·고등학교, 문창고등학교를 개교하고 영남대학교·성균관대학교 법인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기여를 많이 한 기업인이다.
* 제4곡 고요성(古要城)
— 고요성은 지금의 문경읍 고요리이다. 전주 이씨 효령대군 후손들의 집성촌인 고요리는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어 오래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마을은 전쟁의 참화도 피해간 안전한 곳이었다.
四曲川橫臥立巖
亂松覃葛影毿毿
幽村軋軋鳴前碓
斷麓蒼蒼照下潭
사곡이라 시냇물이 선바위 돌아 흐르니
우거진 소나무와 칡 그림자 길고도 기네.
고요한 마을 삐걱삐걱 옛 방아소리 들리고
가파른 산기슭 푸른 빛이 연못에 비치네.
고요리는 광수원과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둔 마을이다. 요순시대처럼 순박하게 사는 마을이라 하여 ‘고요(古堯)’라고도 했다. 옥소는 이 마을에 들어 방아 찧는 소리를 들으며 정중동(靜中動)의 평화로운 정경을 그리고 있다.
* 제5곡 화지동(花枝洞)
— 화지동은 우뚝 솟은 ‘성주봉’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의 문경읍 당포리이다. 옥소(玉所) 권섭(權燮)이 이곳에 초가를 짓고 거처하였다. 주자(朱子)가 무이구곡 중의 제5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건립했던 것처럼 옥소도 자신의 거처 ‘화지동’을 제5곡에 설정하였다. 마을의 제일 위쪽에 있다.
五曲花枝洞壑深
百籬千柿翳如林
村耕雨露僧鍾月
不盡斯翁詠讀心
오곡이라 골짜기 깊고 깊은 화지동
감나무 울타리가 숲처럼 마을을 가리네.
밭에 이슬비 내리고 달밤 절간의 종소리 들리면
늙은이의 솟아나는 시심(詩心) 다할 수 없네.
¶ 옥소영각(玉所影閣) ☞ 화지동(당포)에는 조선시대 대문장가 옥소(玉所) 권섭(權燮)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영각(影閣)은 권섭(權燮, 1671~1759)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1895년에 건립된 건물이다. 영정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9호로 지정되었다.
[당포리] ☞ 해발 912m의 성주봉과 수리봉이 감싸고 있는 당포1리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사기명장 도천(陶泉) 천한봉(千漢鳳, 1933~2021)의 문경요(聞慶窯)가 있었고 지금〈도천도자미술관〉이 있다. 도천은 문경의 관음리 출신이다.
* 제6곡 산문계(山門溪)
— 산문계는 화지동에서 4km 정도 올라간 위치에 있다. 청정·수려한 경관이 한 굽이를 이루는 계곡이다. 화지동에서 갈평으로 가는 길목이다. 강 건너에 ‘시루봉’이 있는데, 우뚝 솟은 3개의 바위봉우리를 사람들은 ‘삼문(三門)’이라 하였다.
六曲孤亭出小灣
千峰回複作重關
何時施設朝家議
目在幽人早夕閑
육곡이라 외로운 정자 여울가에 솟아있고
수많은 산봉우리 겹겹이 둘러 있네.
언제일까 조정에서 의논을 마친 다음
은거하여 조석으로 한가롭게 지낼 날은.
산문계는 높은 산과 흰 바위가 맑은 시냇물과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옥소가 이곳에 휘영각(輝映閣)을 짓고 석실에 암자를 만들어 화지동을 오고가며 유락했다. 현재는 댐 건설로 ‘문경저수지’가 되었다.
* 제7곡 갈평(葛坪)
— 갈평*은 산문계에서 3km 정도 상류에 위치한 아담한 산골 마을이다. 갈평은 관음리 ‘하늘재’로 가는 길과 동로 ‘여우목’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이다.
七曲松風吼似灘
誰人來入是中看
鷄鳴犬吠皆仙境
白屋蕭疎分外寒
칠곡이라 솔바람이 여울소리 같으니
그 누가 찾아와서 이곳을 보았을까.
닭 울음 개짓는 소리 모두가 선경이고
조촐한 초가는 분수 넘는 청빈함이네.
갈평은 옥소가 청풍에서 하늘재를 넘어 이씨 부인이 살고 있는 화지동을 왕래할 때 지나던 길목이다. 이 마을을 제7곡으로 설정한 것은 ‘솔바람이 여울소리 같다(松風吼似灘)’고 노래한 것처럼 울창한 소나무 숲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 [갈평] ☞ 산곡의 작은 마을 갈평은 문향이 깊은 마을이다. 갈평은 전 연세대 교수이며, 국제퇴계학회 회장을 역임한 도학자 우로(于魯) 이광호(李光虎, 1948~ ) 박사의 출신지이다. 우리나라 퇴계학 분야의 최고 권위지이다. 갈평에서 여우목 쪽으로 가다보면 길목에 정갈한 정자가 있다. 퇴계 이황선생의 선대인 진성 이씨 집안의 유서 깊은 ‘경송정(景松亭)’이 있다.
* 제8곡 관음원(觀音院)
— 관음원은 갈평에서 관음천을 따라 3km 정도 올라간 위치에 있다. 관음리(觀音里)는 하늘재를 넘어 중원(충주)—한양으로 가는 길목이다.
八曲山門一閉開
倒碕殘咽水縈洄
依崖小店棲生計
盡日行人斷去來
팔곡이라 산문이 한 번씩 열렸다 닫히고
여울목 굽이굽이 세차게 흐르며 요란하네.
언덕 위의 작은 가게 생계가 처량하니
하루 종일 오고가는 행인 없네.
옛날에 관음사가 있어 관음리라 했다. 지금은 석불만 남았다. ‘관음원(觀音院)’은 하늘재를 오고가는 나그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마을[院]이었다. 2009년 농촌진흥청에서 ‘살고 싶고 가보고 싶은, 전국 100대 마을’을 선정하면서, 문경에는 마성의 ‘못고개마을’, 동로의 ‘오미자마을’과 더불어 이 마을을 뽑기도 했다.
*제9곡 대원(大院)
— 대원은 관음원에서 2km 정도 올라가면 당도하는 곳, ‘하늘재’이다. 이 재를 넘어가면 충청도 충주 미륵리-송계(松溪)로 이어진다.
九曲登高始豁然
不知斯處是窮川
千山在下千峰立
日月雲烟是別天
구곡이라 높이 오르니 눈앞이 확 트여
모르겠네, 여기가 시냇물 시작하는 곳인지
발아래 수많은 산봉우리 즐비하니
해와 달, 구름과 이내 끼는 이곳이 별천지라.
대원은 ‘계립령(鷄立嶺)’, ‘지릅재’라고도 부른다. 옥소는 ‘이곳이 별천지(日月雲烟是別天)’라고 노래한다. 경북 문경시 관음리와 충북 충주시 미륵리와 경계를 이룬다.
옥소는 청풍-황강(남한강)에서 화지동을 오가는 길에 빈번히 오르내렸을 이 하늘재에서 세상을 한 눈에 내려다보며 화지구곡(花枝九曲)의 감회를 노래하고 있다. * [참고 자료] ☞ 김문기, 강정서. 『경북의 구곡문화(2)』.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2. 415∼422쪽.
영강(潁江) ; 진남교에서 낙동강까지
문경읍 하리에서 조령천을 받아들인 신북천이 마성의 진남교[龍淵]에서 농암-가은에서 내려오는 영강의 본류를 만난다. 하나 된 영강(潁江)은 오정산 남쪽에 자리한 호계(虎溪 舟坪)를 지나는데, 그 건너편에는 문경시멘트공장이 있었던 신기동(新基洞)이 있다. 지금 신기동은 문경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새롭게 도약하고 있다. 신기동 아래는 우지리의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강물이 영강대교(점촌—안동 34번 국도)를 지나 산양면 반곡리 앞을 내려가면 용소, 그 오른쪽에 너른 영신들과 문경의 중심인 점촌(店村) 시가가 있고 좌측에는 영순면 포내이다. 영순대교 아래쪽은 좌측이 영순(永順)의 의곡리이고 그 아래 우측이 상주시 함창(咸昌)이다. 영강은 상주시 함창읍 금곡리에서 ‘이안천’을 받아들여, 퇴강리 앞에서 낙동강(洛東江)에 유입된다.
영남대로(嶺南大路) ; 조령천—영강—낙동강
문경의 영강—조령천을 따라 새재를 넘어서 한양으로 가는 길을 조선시대 영남대로(嶺南大路)라고 했다. 문경새재의 ‘초점(焦點)’에서 발원하는 ‘조령천’은 문경읍 하리에서 신북천에 합류하여 마성 진남교에서 농암-가은에서 내려오는 영강의 본류(本流)에 합류한다. 낙동강(영강-조령천) 발원지 ‘초점(焦點)’은 백두대간의 마패봉과 조령산 사이의 안부, 새재[조령관] 아래의 산곡에 있다.
영남대로(嶺南大路)는 조선 초 태종(太宗) 14년(1414)에 개통되어, 약 600여 년 동안 영남과 충청도[충주]-경기도[용인]-한양을 잇는 관로(官路)였다. 영남대로는 한양—충주[남한강]—문경[새재]—상주[낙동강]을 경유하여 부산 동래부에 이르는, 한강유역과 낙동강유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였다.
청운의 뜻을 품은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이 길을 다녔으며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으로 가기 위해 이 길을 지나고, 보부상들이 무거운 봇짐을 짊어지고 힘겹게 지나던 길이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왜군이 서울로 향해 진격하였던 길이기도 하다. 문경 ‘새재’는, 영주의 죽령(竹嶺), 영동의 추풍령(秋風嶺)과 함께 조선시대 3대 고개로 꼽히는데, 조령산의 안부(鞍部)를 넘는 고개라고 해서 '조령(鳥嶺)', 즉 ‘새재’로 불린다. 삼국시대-고려시대까지 ‘계립령’[하늘재]*이 주로(主路)였다.
☞ [하늘재 옛길] ▶ 하늘재 [鷄立嶺] 는 문경현에서 7km, 조령관에서 동북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 있다. 백두대간 포암산과 주흘산(부봉) 사이 해발 525m의 안부이다. 새재가 개통하기 전, 삼국시대—고려시대까지의 관로(官路)는 하늘재였다. 문경의 관음리에서 충주의 미륵리로 이어지는 하늘재[鷄立嶺]는 백두대간을 넘는 최초의 고갯길이었다. 하늘재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제8대 왕인 아달라왕(阿達羅王, 154~184) 3년(서기 156)에 북진을 위해 계립령을 개척했으며, 죽령 옛길보다 2년 앞서 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천 년 사직 신라가 망하자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그 누이 덕주공주와 함께 서라벌을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하늘재를 넘고 미륵리에 당도한 마의태자는 그곳에 미륵입상을 세우고, 덕주공주는 월악산 덕주사에 마애불을 새기고, 오랜 세월을 수도하며 신라의 부흥을 기다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문경새재] — 청운의 뜻을 품은 수많은 선비들이 지나던 길
새재는 조선시대 과거(科擧) 길이었다. … 조선시대의 사림(士林)의 중심은 영남의 선비들이었다. 고려가 망하자, 고향인 경상도 구미로 낙향하여 금오산 아래 채미정(採薇亭)을 짓고 제자를 길러낸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위시하여, 그 계보에서 용출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그리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문하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등이 모두 이 길을 오고가면서 관직에 나아갔다. 그래서 문경새재를 ‘과거길’이라고 한다.
문경은 신라시대에 ‘관문현(冠文縣)’이었다. 그러다가 고려 현종 때에 ‘문희군(聞喜郡)’이라 불렀고, 공양왕 때에 이르러서야 ‘문경(聞慶)’이 되었다. 이렇게 문경은 ‘문희경서(聞喜慶瑞)’의 고을이라 ‘(과거급제의)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듣게 된다.’ 하여,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도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하여 상경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전기 대문장가 서거정(徐居正)도 대구의 양친을 그리워하며 이 고개를 넘었고,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암행어사의 소임을 받아 이 길을 넘어서 영남의 민정을 살피러 갔다.『구운몽』을 쓴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을 비롯하여 새재를 지나는 선비들마다 새재를 넘으며 시를 남겼다. 제2관문 조곡관 위쪽의 새재옛길에 시비(詩碑)들이 즐비하다.
* [문경새재] — 왜군과 맞선 의기(義氣)와 장렬한 순국(殉國)의 현장이었다!
임진왜란 때,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주력부대 18,000여 명이 밀양-대구-상주를 거쳐 한양으로 진격하던 곳도 바로 이 길이었다.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고니시 부대는 부산에서 열흘 만에, 척후병들이 그렇게도 경계한 문경 새재 입구에 도착했다.
임진년 4월 26일, 문경현감 신길원(申吉元)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이 접근해오자 피하지 않고 대적했다. 몇 안 되는 군사마저도 다 달아나고, 총상을 입은 신길원 현감은 홀로 적장 앞에 섰다. 북상하는 왜군의 길을 막았다. 적장이 칼을 빼어들고 속히 항복하고 길을 비키라고 협박하자, 공(公)은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내가 너희를 동강내어 죽이지 못함을 한탄하니 빨리 죽여서 나를 더럽히지 말라” 하며 꾸짖었다. 적병이 성내어 먼저 한 팔을 자르고 계속 위협을 가해 왔으나, 공은 얼굴빛도 바꾸지 않고 꾸짖기를 계속하니, 마침내 살을 도려내는 모진 죽음을 당하였다. …
왜란 끝난 후, 숙종 32년(1706년) 조정에서는 공(公)의 장렬한 순국(殉國)을 기리어 ‘縣監申侯吉元忠烈碑’(현감신후길원충렬비)를 세워 그 충혼(忠魂)을 기리고 있다. ‘충렬비’는 새재 초입 <옛길박물관> 입구 오른쪽 길목에 있다. … 이렇게 문경새재는 비장(悲壯)한 충혼(忠魂)이 어린 곳이다.
* [문경새재] — 청정한 조령천의 아름다운 명품길
영남대로 문경새재에는 세 개의 관문이 있다. 관문(關門)은 적의 방비를 위해 국경이나 군사요충지에 세운 성문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조정은 문경새재에 3개의 관문을 축성했다. 제1관문이 주흘관(主屹關)이요, 제2관문은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은 조령관(鳥嶺關)이다. 가장 높은 곳이 백두대간의 안부인 새재[鳥嶺]에 조령관이 있다.
제1관문에서 제3관문까지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길은 영강의 최상류인 조령천(鳥嶺川)을 따라서 나 있다. 조령천은 동쪽으로 주흘산 연봉이 솟아있고, 서쪽에는 조령산 연봉이 우람하게 솟아있다. 그야말로 심산유곡이다. 새재의 길은 이 조령계곡(鳥嶺溪谷)을 따라 이어진다. 영남대로 그 새재 길목에 교귀정(交龜亭)이 있다, 교귀정은 신임 경상감사가 한양에서 내려와 경상도 입구인 문경새재에서 신·구 감사가 만나 관인(官印)을 교환하는 곳이다.
길 따라 흐르는 계곡물은 수정처럼 맑다. 여름이면 싱그러운 숲이 터널을 이루고 가을이면 고운 단풍이 환상적인 풍경을 이루고 겨울이면 하얀 눈이 쌓인 설송(雪松)이 장관을 이룬다. 그래서 새재 길은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10대 명품 길의 하나로 선정되었고, 2013년 한국관광공사가 실시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 조선일보 2013년 9월 5일자 보도
* [제3관문 조령관] — 백두대간 마루금, 한강과 낙동강의 분수령
제3관문 조령관(鳥嶺關)은 세 개의 관문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새재[鳥嶺]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이 지나가는 마루금 안부이며, 낙동강과 한강의 분수령이며,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룬다. 이곳은 한양의 문물을 접하는 영남의 첫문이요, 남쪽에서 올라오는 왜적을 방어하는 천혜의 요새이다. 도순변사 신립 장군이 이곳 새재의 험난한 지형을 적극 활용하여 왜군을 맞아 싸웠더라면, 야만적인 왜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을 것이요, 도성으로 가는 한양 길을 그렇게 허무하게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계 속〉 ☞ 여우목을 중심으로 한 문경(聞慶)의 인문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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