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삶 자체만 가지고도 버겁고도 황홀해 하는데.. 이런 환경에서도 또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가를 고민하고 사는데.... 치기어린 푸념만 하고 사는게 아닌 가 하는 깨우침을 주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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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의 삶의 여정
경북 안동 카톨릭 상지대학 사회복지과 1학년 노 지 숙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미숙아로 태어났다.
엄마는 나를 키울 능력이 안되어 지금의 가정으로 입양되어 졌다.
1.6kg이라는 언제 생명이 끊어질 줄 모르는 자그마한 그 몸으로...
미숙아로 태어난 이유는 바로 엄마의 술과 담배 때문...
엄마로 인하여 선천성얼굴기형으로까지 태어난 나에게 정말 수술이란 대단했다.
태어날 당시 나는 코뼈도 없이 태어나고 입술이 양쪽으로 갈라지고 윗 앞쪽 잇몸이 없이 태어나 우유를 먹어도 먹는 양보다 흘러내리거나 잇몸이 구멍나 있는 틈 사이로 우유는 코로 다 나와 매일매일 허기진 날을 보내며 나는 생명이 다 해갔다. 그래서 2살 때와 3살 때는 갈라져 있던 입술을 꿰메는 수술을 3번이나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2학년 1학기가 시작되던 해였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유치원 놀이터에서 사고가 터졌다.
일요일 날 엄마가 성당가신 틈을 이용하여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초등학교 유치원 놀이터로 향했다.
거기에는 친구들이 배그네 근처에서 놀고 있었는데 내가 거기 끼어들어 밀어주겠다고 해놓고 밀다가 그만 골반 뼈가 금이가고 대퇴골 뼈가 부러지는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나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목이 터져라 크게 울었다. 잠시 후...
어떤 오빠가 찾아와 나를 자전거에 태운 뒤 집에까지 바래다 주곤 그냥 가버리고, 엄마는 빨래를 하시던 도중 너무 놀라 긴급히 병원으로 전화를 하셨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울고만 계셨던 어머니...
병원에 도착하여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200만원 선금을 걸고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을 해도 정상으로 돌아오기는 어렵다는 의사의 말에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털석 주저앉고 말았다.
마산에 있는 더 큰 병원으로 가서 다시 엑스레이를 찍었지만 내가 처음 갔던 병원의 말과 똑같았다. 그래서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며 검사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집에서 통기부스만 하고 있다가 아는 사람을 통하여 선금을 걸지 않고도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 황급히 차를 타고 달렸다. 그 곳은 마산파티마병원.
입원하자말자 하루 후에 수술에 들어갔고, 마침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엄마는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리셨다. 퇴원 후 1년이 지났을까...
조금씩 다리가 뒤틀리는 느낌이 들어 병원을 다시 찾았는데 이게 웬 일인가?...
다리가 뒤틀리고 5cm정도가 짧아져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얼마 후 뼈가 붙어 있었던 다리를 다시 부러뜨려 쇠를 박는 수술을 한 차례 더 받아야만 했고, 수술은 끝이 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땐 집에서 가까운 병원을 찾아 박혀 있던 쇠를 빼내는 수술을 받았다. 그렇지만 나에겐 성형수술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부터 코뼈가 없었던 나는 그 동안 코로 숨쉬는 게 약간 어려웠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술을 빨리 서둘러야만 했다.
하지만 내가 입양되어온 가정은 그리 넉넉치 않은 가정에다 부모님까지 나이가 많으셔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찰라에 어떻게 한국심장재단이라는 곳을 소개받아 중학교 땐 코수술비 모두를 지원받아 무사히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고등학생 일 때다.
앞 잇몸이 없었던 나는 그 동안 물을 마시거나 양치질 후에 입을 헹구면 코로 다 나와버리는 현상이 일어나 대구가톨릭대학병원에서 얼마간의 치아교정치료 뒤 밑에 있는 잇몸을 떼어내서 구멍난 곳에 잇몸을 붙이는 잇몸이식수술을 받았다.
잇몸이식수술 후... 치아전체를 교정을 해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자라면서부터 턱이 서로 심하게 뒤바뀌어 있었고, 치아의 모양도 고르지 못하여 무려 교정치료를 4년간이라는 긴 시간동안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너무나 놀랐다. 그 뒤에는 돈이 문제 였기 때문이다.
교정치료비를 4년동안 한 달에 5만원씩 꼬박꼬박 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었다. 왜냐면 보험이 안되기 때문이다.
만약 돈을 미룰 경우 그 숫자는 엄청난 숫자로 늘어날 것이 분명하였고, 내가 교정치료를 하지 않으면 비정상적인 얼굴형태로 평생을 살아가고 사회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돈을 빌려서라도 교정장치물을 붙여서 시작하여야만 했다.
드디어 4년 후 교정장치물을 제거하고 교정치료를 끝내게 되었다.
며칠 뒤 치아가 없던 자리에 보철치아를 해 넣기 위해 윗 치아 전체를 깎아서 가공된 치아를 끼웠다.
"이제 나도 일반 사람처럼 치아가 있구나!"
원래 치아가 없을 때에는 큰 음식이나 딱딱한 음식은 전혀 비어 먹질 못했던 난데 보철치아를 해넣고 나니 모든 음식을 내가 원하는 크기만큼이나 조절해서 먹을 수 있었고, 딱딱한 음식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며칠을 거울을 보면서 보철치아는 나에게 소중하고도 신기한 존재였다.
2,30년 뒤에 다시 보철치아를 바꾸어야 하지만 그래도 이만큼이나 씹는 것에 대한 가치가 아주 컸기 때문에 치아에 대한 걱정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원인을 알 수 없는 눈의 통증과 함께 시력은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 같아 엄마한테 말했더니 안과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자고 권유하셨다.
교정치료를 마친 뒤에 안과로 향해 검사를 해본결과 녹내장과 시신경의 이상으로 인한 약시와 야맹증이 나를 너무 놀라게 했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실명할 뻔 했다는 의사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안과를 계기로 레이져 치료와 검사를 몇 달 정도 받고 있던 도중 조금씩 참을 수 없을 정도 아랫배의 통증이 한 달간 지속된데다 가슴에서 유즙이 흐르고 월경이 멈추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치과진료, 안과진료를 마친 뒤 산부인과로 향했다.
검사결과 왼쪽 난소가 없는데다 그 곳에 난소종양이 자라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2000년 7월 달을 마지막으로 월경이 없어져 버렸다.
그 이후 주기적으로 호르몬대체요법을 쓰며 약제를 날짜에 맞추어 복용해 나갔다. 이 약을 복용하면 월경도 하고 당분간 눈과 배의 통증이 가라앉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호르몬제를 복용하며 조금씩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여전히 월경은 하지 않아 산부인과담당의사도 병이 나타나는 원인을 찾지 못하겠다며 내분비내과로 가봐라고 하였다.
내분비내과 진료를 끝낸 뒤의 의사소견은 입원을 하라는 이야기를 했다. 내분비검사를 해보자는 이야기였다. MRI검사와 CT검사, 호르몬 검사, 화학반응검사...
일주일에 걸친 검사가 끝이나고 얼마 후 검사결과가 나왔다. 검사결과는 이러했다.
안과 : 녹내장, 약시, 야맹증
산부인과 : 왼쪽 무난소증+난소 종양, 무월경과 유즙분비
이비인후과 : 일반 사람보다 냄새 맡는 것과 듣는 것이 좀 부족
내분비내과 : 뇌선천성기형(태아알콜증후군, 뇌하수체-시상하부 호르몬에 종양이 있음) 성장부진
뇌 속에 있는 뇌하수체 쪽 시상하부에도 호르몬 조절이 되지 않아 성장부진이 있는 걸로 진단이 내려 졌다.
이 병은 100명 중 3명이 걸리는 꼴로 흔하지 않은 희귀한 병으로 알려져 있다고 담당의사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원래부터 나를 낳아준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알콜중독이셨다.
그래서 나는 선천적으로 자궁안에서 이런 병을 가지고 태어났던 것이다.
내분비내과에서 주는 약을 계속적으로 복용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하게도 약의 효과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내분비내과에서도 더 이상 손을 놓아버린 상태였다.
더 이상 확실한 병명도 나타나지 않는데다 학회에 올릴만큼 미스테리한 병이라 그런지 담당의사는 자신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복용하던 호르몬제를 중단과 함께 안과를 다니던 것도 중단하고 평생 이 병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제 엄마도 대학등록금도 그렇고 가정형편상 돈도 없는데 다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으니 이젠 그 상태로 평생 살아가자는 이야기를 하셨다.
2001년 6월.
나는 이 날을 시작으로 내 자신과의 병과의 사투를 이겨나가야만 했다.
대학을 입학하고 기숙사 생활을 하고...
너무나 힘들었다.
내가 내 몸을 지체 못할 정도의 아픔의 고통의 나날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가까운 병원을 가봤지만 큰 대학병원으로 가라는 말 밖에는 하지 않았다.
계속적인 고통을 힘겹게 이겨내며 얼마 후 나는 성형수술을 받기 위해 한국심장재단에 서류를 해 넣고 대구동산의료원을 가서 여름방학 때 수술 받을 것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대학을 들어와서 처음 맞이하는 방학이 시작되었다.
며칠 뒤 수술을 위한 검사는 시작되었고, 수술 하루 전 의사 여러명이 와서 물었다. 몸에 이상이 있는 부분이 있냐고.
선천적으로 태아알콜증후군이 있다고 말을 하니까 의사는 그 날밤 아주 심각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만약 이 상태로 수술을 하다가 잘못되면 사망할 가능성이 70%라 아주 위험하고, 이 수술은 굉장히 어려운 수술이라서 수술을 하기가 겁이 나서 도저히 못할 것 같다며 다시 대구가톨릭병원에서 받았던 모든 검사를 다시 받아서 수술 유무를 가리자고 하였다.
얼마 후 입원을 해서 검사를 했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니까 수술을 받아도 된다는 판정이 나와서 기분은 좋았지만 덜컥 겁이 났다.
겁을 먹은 바람에 병원에 가기 2일 전부터 설사와 구토, 식욕부진, 어지러움증, 복통과 함께 탈진증세가 나타났다.
그래도 마음을 굳게 먹고 입원을 하고 수술실을 들어가고...
긴장을 해서인지 수술실을 들어갔는데 혈압도 점점 상승해 가고 탈진이 또 일어나고 말았다.
그래서 다시 병실로, 또 겨울방학으로 수술을 연기해야만 했다.
내가 수술을 받고자 하는 곳은 바로 코. 저번에 수술을 받았었지만 나이가 들면 들어갈수록 살이 늘어나 콧대가 쑥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그것을 위한 수술이지만 절차는 복잡했다. 한 달이라는 기간과 함께 말이다.
이마에서 살을 아랫쪽으로 벗겨내려 그 살을 꺾어 코에 붙이는 수술 한 번을 한다음 2주 후에 다시 이마를 당겨 꼬매어 주는 수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입원기간은 한달이고, 그 것을 다 회복할려면 오랜시간이 걸린다고 하였다.
물론 이마의 수술 상처는 남고...
이 정도라면 누구나 무서워 할만 하다.
수술을 위한 전신마취가 3번이나 이루어지기 때문.
그러고는 퇴원해 버렸다.
얼마 후 방학이 끝나고 개강은 시작되었다.
겨울방학 때가 되면 실습 후에 번의 수술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고, 또 내가 견뎌나가야 할 과제이기에 나는 오늘도 병과의 사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알코올중독으로 지금 현재 병원에 계신 엄마를 생각하니 죄송하기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하다.
비록 엄마라는 존재가 알코올중독자라는 이유로 어릴 때부터 원망도 많이 하고 속상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 것은 쓸 때 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비록 엄마 때문에 선천적인 병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엄마와 나를 지금까지 키워주신 입양가정 가족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렇다.
한 편으론 내 인생이 불행할지 모르나 이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의 선물일지도 모르고, 평생 봉사하는 삶을 살라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사회복지과를 지원하게 된 거고, 또 합격의 기쁨과 함께 지금의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알콜중독자 엄마와 입양가정과 가족들, 그리고 도움 주신 분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나의 지금의 삶은 정말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앞으로의 내 삶에 있어서 지금보다 더욱더 심한 고통의 시간들이 밀려올 것이다.
대학을 졸업 후 나는 나보다 더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평생동안 봉사하며 살아갈 계획이다.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그 만족감으로 말이다.
삶의 여정...
영겁의 시간에서 보면 한 생의 삶이란 그저 한 순간이 아니라 어쩌면 무한의 시간 위에 점 하나 찍는 일이 삶인지도 모른다.
삶은 여행이라고 한다. 억겁의 세월을 통하여 이승의 정거장에 잠깐 머물다 가는 그런 여행.어쩌면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실로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스쳐갔다. 그들 중의 대부분은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는 찰나의 인연 속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고 더러는 오랜 세월을 살 부대끼며 지내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운명이 다 하는 날, 억겁의 세월동안 일어서고 누울 풀 속에 우리 고단한 육신을 누이게 될 것이다. 우리들 삶의 시말, 그 여정의 무대였던 이 땅이 바로 자기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지임을 알아차
린다면 말이다.
결국 언젠가 우리 곁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고 이제 내가 다른 것을 잃어 속임을 당한 느낌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것은 우스운 일 일 것이다.
왜냐면 마치 동전을 소유하듯이 내가 그 것을 소유하였을 때에만 잃어버릴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 것은 누구나처럼 삶의 여정을 밟아 나가는 하나의 인격체인 것 같다.
비록 잠시나마 이렇게 남들처럼 마음대로 다닐 수 있고 공부할 수 있고, 일반인과 같은 정상생활을 할 수 있다는 그 것 하나만으로도 내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2002년 1월 7일.
복지관 실습이 시작되었다.
1월 중순.
겨울방학 때 하기로 했던 코수술의 계획 때문에 다시 동산의료원을 갔다.(한국심장재단에 수술비 요청->수술비 100%지원)
드디어 수술계획이 잡히고, 원래 수술날짜가 2월 4일로 되어 있었지만 실습 때문에 2월 8일로 바뀌어 1월 말에 실습을 마친 뒤 집에서 쉬다가 5일날 입원을 했다.
하지만..
수술 후에 흉터는 이마 뿐만 아니라 코에도 남는다 해서 할 수 없이 수술을 포기해야만 했다.
저는 지금까지의 고통을 겪으며 20년간을 살아왔습니다.
앞으로의 제 인생에 있어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길만이 살길이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