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여름 지리산
스물 너머 인생을 막 시작할 때였다
입대를 앞둔 여름
시국은 어수선했지만
제주를 떠돌다가 친구를 떠나보내고
나는 밤새 12시간을 출렁이며 부산에 도착했다
태풍이 비켜 간다고 했다
서울로 가기엔 너무 아까웠다
이내 화엄사행 버스로 갈아타고 무작정 지리산 종주를 시작했다
청춘이 가기 전에 지리산 종주는 반드시 해야 했다
노고단에서 야영을 하고 이튿날
반야봉에 올랐다 비바람이 몰아쳤다
비틀린 나무와 미친 듯 나부끼는 풀들이
바위보다 단단했다
그 정적에 눈물이 흘렀다
길에서 만난 산동무들과 싸우듯 걸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착한 세석평전은 불야성의 난민촌같았다
탱탱한 발의 물집에 실을 꿰어 넣었다
신음 같이 청춘이 가는 게 서글펐다
걸음마다 쓰리고 걸음마다 아팠다
산꽃보다 고사목이 정다웠다
천황봉에서 고등학생과 건축과 대학생과 작별했다
허풍처럼 호탕하게 웃고 각자의 방향으로
그늘진 숲길을 한참 걸어 나타날 것 같지 않던
치밭목 산장엔 다람쥐만 놀고 있었다
애기엄마가 살았다
다람쥐와 아기를 키우며
언젠가는 저렇게 산에서 살고 싶었다
이튿날 아침 가지 말라 말리는 거미줄들 끊으며
이파리가 사람 몸둥이만한 시누대 숲을 지났다
무엇인가 거듭 베어지는 것 같았다
쉰내 진동하며 절뚝이며
청춘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