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이후 처음으로 대폭 개각을 단행했다. 전체 각료 22명(부총리 5명, 무임소 장관 1명 포함) 중 6명(각료급 인사 1명 포함 총 7명)을 바꿨다. 공석이었던 장관직 2자리도 채웠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각료 임면(任免, 임명과 면직) 동의권을 갖고 있는 '베르호브늬이 라다'(최고 라다, 의회)는 5일 전날 해임 가결에 실패한 드미트리 쿨레바 외무장관 등 장관 3명에 대한 해임을 승인한 뒤, 9명의 신임 장관 임명을 추인했다.
대통령 중심제 국가의 대통령이 임기 중 개각에 나서는 이유는 대략 비슷하다. 국면전환용, 문책및 보은용, 친정체제 구축, 궁여지책 인사 등이다.
내각을 개편한 뒤 독일 람스타인으로 가 오스틴 미 국방장관과 회담하는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우크라 대통령실 사이트
◇ 대대적인 개각의 의미는?
우크라이나의 이번 인사는 어디에 속할까?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 중에 '장수 격'인 알렉세이 레즈니코프 국방장관(2023년 9월)과 발레리 잘루즈니 군총참모장(합참의장 격, 2024년 2월)을 경질한 바 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인사에는 과감한 '국가 원수'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인사의 대외적 명분으로 젤렌스키 대통령은 "가을은 우크라이나에 지극히 중요하기 때문에 행정부를 재개편해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이루기 위해서"를 꼽았다. 나아가 "조만간 단행될 (대러시아) 전략 때문에 행정부 전면 개편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향후 전략이 구체적으로 (제 2차 평화 정상회담을 통한) 휴전이나 평화협상을 뜻하는지 불분명하지만, 지난 2월 잘루즈니 총참모장을 경질할 때 내세운 명분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당시 그는 대국민연설(2월 5일)에서 "국가 주요 인력의 '재부팅'(컴퓨터의 재설정)이 필요하다"면서 잘루즈니 총참모장을 해임했다. 이후 국가안보회의 서기(우리의 대통령실 안보실장 격) 등 대통령실의 일부 진용을 재편했고, (2020년 3월 임명된) 데니스 슈미갈 총리의 경질설 등 내각 개편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 사이, 도네츠크주(州) 방어의 핵심 지역인 아브데예프카(아우디우카)가 러시아군에 함락당하는 등 돈바스(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지역 방어선이 계속 무너져내렸다. 잘루즈니 총참모장이었으면 당연히(?) 반대했을 러시아 쿠르스크주(州) 기습 공격을,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알렉산드르 시르스키 신임 총참모장을 통해 성공시켰지만, 국면전환용으로는 2% 부족했다. 전략적으로는 쿠르스크 공격이 우크라이나군 지휘부의 패착이었다는 평가가 서방 언론에서도 슬슬 나오는 판이다.
시르스키 총참모장 등 군 수뇌부로부터 작전 보고를 받은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개각의 핵심은 쿨레바 외무 교체?
이번 개각에서 가장 눈에 띈 인물은 역시 쿨레바 외무부 장관이다. 2020년 3월, 39세의 나이에 외무부 수장으로 발탁된 쿨레바 장관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서방측의 군사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앞장서 왔다. 거의 대통령 임기(5년)에 가까운 4년 6개월이나 장수한(?) 그의 경질은 일단 문책성으로 보인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날 쿨레바 장관의 해임 동의를 꺼리는 집권여당 '인민의 종' 의원 총회에 참석해 "(서방으로부터) 무기 공급을 추진할 에너지가 그에게 부족하다"고 질타했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도 쿨레바 장관의 경질 이유중 하나로 동맹국에 대한 '과감한 대시'(접근)의 부족을 들었다. 쿨레바 외교는 “서방 측에 대한 대통령의 과감하고 격정적인 발언 수위와 맞지 않았다”는 것.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코노미스트 측에 "쿨레바 장관은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것을 피했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물러난 쿨레바 전 외무장관(위)와 신임 시비가 장관/사진출처:페북
일각에서는 신임 장관으로 발탁된 안드레이 시비가(Андрей Сибига) 차관이 지난 4월 대통령실에서 외무부로 옮겨갈 때, 쿨레바 장관의 운명은 이미 결정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현지 언론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당시 미 국무부의 압력에 밀려 시비가를 (차관이 아닌) 장관으로 밀어붙이지 못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기회는 바이든 미 행정부가 11월 대선에 '올인'하는 사이에 찾아왔고, 젤렌스키 대통령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미국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쿨레바 장관의 경질 요인을 안드레이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과의 '갈등설'에서 찾았다. 대통령실은 쿨레바 장관이 블링컨 미 국무장관 등 주요 국가 지도자들과 소통 채널을 독점하고, 개인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데 불만을 가졌다는 것. 한 소식통은 폴리티코 측에 “그가 300% 충성스럽다고 해도 대통령실은 자신의 사람인지 완전히 확신할 수 없는 사람의 손에 중요한 의사 소통 채널을 맡길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다른 소식통은 "쿨레바가 지난 1년간 키예프(키이우)와 워싱턴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군사적 지원을 확보하는데 노력하기는커녕, 그의 책을 홍보하고 다녔다"고 비판했다. "무기 공급을 추진할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발언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시비가 신임 외무장관은 대통령실의 주문을 외교 일선에서 충실히 수행할 장관으로 여겨진다. 군 총참모장을 잘루즈니에서 시르스키로 바꾼 지난 2월의 인사를 떠올리게 한다. 1997년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시비가 장관은 주폴란드 대사관을 거쳐 2016년~2021년 주터키 대사로 근무한 뒤 대통령실에서 예르마크 실장의 외교적 활동을 뒷받침했다.
외무부 차관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동맹국에 대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헝가리와 외교적 마찰이 생기자, 헝가리 국회의장을 대놓고 '저급한 정치인'이라고 비판했고, 폴란드를 향해 "우크라이나와의 국경을 폐쇄하는 것은, 우리가 안락사에 동의하도록 강요하는 것과 같다”고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또 우크라이나의 해외 공관이 군 동원 대상 남성들에게 여권 갱신 등 외교적 문서 발급을 금지하도록 지시하는 등 해외 체류 자국민들의 전쟁 동원을 압박했다.
◇권력 장악에 앞장선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
데니스 말류스카 법무장관을 올가 스테파니시나 유럽 통합 부총리로 바꾼 것도,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의 작품으로 지적된다. 말류스카 장관은 그의 전임인 안드레이 보그단 실장이 발탁한 인물이다.
안타깝게도 스테파니시나 신임 법무장관에 대한 비판은 벌써부터 나온다. 그녀가 부패 사건으로 기소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범죄 혐의로 기소된 사람이 법무부 장관을 맡은 첫 선례를 남길 것이라고 스트라나.ua는 썼다.
이번 인사에서 대통령실에서 내각으로 자리를 옮긴이는 니콜라이 토치츠키 문화및 전략 커뮤니케이션부 장관과 알렉세이 쿨레바 지역사회 개발부 장관이다. 사비가 신임 외무장관과 함께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이 내각을 장악하기 위한 시도로 보기에 충분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친정 체제' 구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를 위해 젤렌스키 대통령은 2024년 4월부터 대통령실 부실장을 맡아온 토치츠키와 2023년 1월부터, 2020년 3월부터 각각 대통령실에서 근무했던 쿨레바,소콜로프스카야를 해임했다. 도치츠키와 쿨레바는 장관으로 발탁됐고, 소콜로프스카야는 다음 자리를 기다리고 있다.
예르마크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장/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이번 인사에 대한 미 폴리티코의 부정적인 평가는 젤렌스키 대통령에게는 뼈아프다. 지난 5월 공식적으로 임기가 끝난 젤렌스키 대통령이 '권력 장악'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내각 개편으로 큰 반발에 직면해 있다고 썼기 때문이다. 실제로 집권 여당 소속 의원들의 반발로 (해임한) 7명의 각료급 인사중 3명에 대한 의회 추인이 불발됐고, 젤렌스키 대통령이 직접 의원 총회에 참석해 인사의 당위성을 설명해야 했다.
야당인 (포로센코 전대통령의) 유럽연대당의 이반나 클림푸시-친차제 의원은 폴리티코 측에 "젤렌스키 대통령과 대통령실에 의한 조직적인 권력 집중화"이라며 "심각한 통치 위기를 보여준다"고 이번 개편을 비판했다.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정부 요직에 측근과 충성파들을 점점 더 많이 앉히고 있다는 것이다.
또다른 야당인 홀로스당의 야로슬라프 젤레즈야크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젤렌스키 대통령은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정작 새로운 인물은 보이지 않는 '회전문 인사'"라고 비판했다.
경질된 스테파니시나 부총리가 법무장관으로, 비탈리 코발 국유재산기금 대표(장관급)가 농업 정책 장관으로 각각 자리를 옮겼고, 이리나 베레슈크 부총리겸 재통합부 장관과 알렉산드르 카미신 전략 산업부 장관이 대통령실에 합류할 것으로 확실시되니, '회전문 인사'라는 비판이 나올 만하다.
순수하게 물러난 사람은 쿨레바 장관과 루슬란 스트렐레츠 환경 보호부 장관 등 2명에 불과하다. 새로운 인물은 전략 산업부 장관에 발탁된 게르만 스메타닌 군수산업협회(Укроборонпром) 협회장과 나탈리야 칼미코바 보훈부 장관(당초 공석), 스베틀라나 그린추크 환경 보호부 장관이다. 마트베이 베드누 청소년 스포츠부 장관은 이미 장관 대행 중이었다.
◇ 개각으로 국민지지 다시 얻을까?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정부 개편을 '국면전환용 인사'라고 규정했다. 제목도 “인기가 떨어지자 블라디미르 젤렌스키가 내각을 바꾸고 있다”고 썼다. 이 잡지는 "젤렌스키 대통령은 최근 몇 달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정부의 지지도가 크게 하락했다는 점을 인식할 수 밖에 없었다"며 "전쟁 중에는 선거를 치를 수 없기 때문에 내각 개편은 그가 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이코노미스크의 우크라이나 개각 관련 기사 웹페이지/캡처
그러나 이번 개각이 (인기가 하락하는) 정부와 무너지는 돈바스 전선의 전황을 바꿀 수 있다고 보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스트라나.ua도 개각에 대한 서방 외신의 논평도 조심스럽지만 부정적이라고 전했다. 특히 바이든 미 행정부는 우크라이나의 구조적인 부정부패와 나토(NATO)를 전쟁으로 끌어들이려는 우크라이나측 시도를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서부 지역 폴타바와 르보프(르비우)에 대한 러시아군의 대규모 공습에 따른 우크라이나 사회의 공포도 이번 개각으로 치유하기 쉽지 않다.
극단적인 해석도 있다. 지정학 전문가인 투오마스 말리넨 핀란드 헬싱키대 교수는 'X'(구 트위트)에 "우크라이나 각료들의 사임은 중요한 신호"라며 "전환점이 다가오고 있다. 가라앉는 배에서 쥐들이 도망치는 격"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