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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1. 묵상글 (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 새로운 성소를 사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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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1.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새로운 성소를 사는,
오늘 복음에는 여인들과 남자들이 나오고,
주님의 부활을 알리려는 여인들과 그것을 감추려는 남자들이 나옵니다.
남자들은 왜 감추려고 합니까?
보통은 악행을 감추려 하는데
이들은 자기들이 한 짓이 악행이라고 생각하기에 감추는 것일까요?
제 생각에 이들은 여전히 자기들이 한 짓이 악행이라고 생각지 않았을 겁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는 예언자도 메시아도 아니고,
사회적으로는 위험한 인물이고 자기들에게는 위협이 되는 자,
그래서 죽어 마땅한 자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니
자기들이 예수를 죽인 것은 결코 악행이 아니라 정당한 행위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주님의 부활 사실을 숨기려고 한 것은
자기들의 오판을 숨기려고 한 것이고,
자기들의 권위와 권력이 손상되는 것이 두려워 숨기려 한 것일 겁니다.
어쨌거나 이들은 하느님께서 하신 것에는 관심이 없고,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들의 권력이지 하느님의 능력이 아니고,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지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들의 권력이지 진실이 아니며
하느님의 사랑도 백성들의 구원도 아닙니다.
자기들은 언제나 옳고
옳지 않은 짓을 했어도 그것이 드러나거나 드러내서는 안 되고
옳지 않음이 드러나 자기들의 권력이 위협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권력자들에게서도 똑같은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진실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백성을 사랑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더더욱 무리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권력만 중요하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자들과 달리
오늘 여인들은 오로지 사랑의 존재들이고 사랑을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여인들은 주님께서 부활의 능력을 보이시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여 살아계신 것을 보고 싶어서 무덤에 간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사랑 때문에,
보고 싶어서 사랑하는 이의 무덤을 찾은 것뿐입니다.
이들은 제자들과도 다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능력을 보고 따랐고 권력을 보고 따랐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권력을 잡으려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목격한 것은 주님의 능력도 권력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본 것은 권력자들 앞에서 주님의 무력함과 무기력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크나큰 좌절과 허탈감 속에 있었는데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십니다.
갈릴래아는 그들에게 어떤 곳입니까?
그들이 성소를 처음 받는 곳 아닙니까?
그러니 갈릴래아로 가라는 것은 다시 성소를 받으라는,
새로운 성소로 다시 출발하라는 새로운 성소일 겁니다.
세상의 권력이 아닌 하느님의 능력을 다시 체험하고,
아니, 주님의 능력보다도 주님의 사랑을 더 체험하고
오늘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주님의 사랑을 당당하게 전하는
용감한 증언자들이요 주님의 형제들이 되라는 성소일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배반한 제자들을 당신의 형제들이라고 하시며
여인들에게 가서 이렇게 전하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우리도 죄지은 우리를 형제라고 하실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새로운 성소를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어제 또 제목만 올라가는 일이 있었는데
제가 뒤늦게 알아서 조처를 취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이 재발할 경우
어떻게 하셔야 하는지 내일 정확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저희 관구 홈페이지에서 문제가 있을 경우,
여기선교협동조합 홈페이지에 올릴 예정인데
그곳에 들어가는 것을 정확히 알려드리겠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너무 죄송하고
하루 늦게 오늘 부활 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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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1.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하버드대 우등생 공부 비법이 있다고 합니다. 우등생들은 평소에 설렁설렁 노는 것 같은데 성적은 기가 막히게 나온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숙사 사감이었던 교수가 이들을 눈여겨본 것입니다. 그러면서 잘 드러나지 않는 공부 비법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예정보다 열흘 먼저 해치우기.’
읽어야 하는 책이 있으면 열흘 먼저 읽습니다. 제출해야 하는 에세이도 열흘 전에 다 씁니다. 발표할 자료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단순히 하버드대 우등생만 그러했을까요? 소위 성공했다는 말을 듣는 결정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 모두가 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이가 뒤로 미룰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벼락치기를 해야 자기의 뛰어난 능력이 나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미리 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늘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나중에 힘이 생기면,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나중에….’
그런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나중에 구원해 줄게.”라고 하시면 어떨까요? 자기의 일은 늘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하고, 그 외의 것은 언젠가 이루어져도 된다는 이기심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공평하심을 믿는다면, ‘나중’이라는 말보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자들은 실제로 제자들에게 곧바로 찾아갑니다. 뒤로 미루지 않고 곧바로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너무나 기뻤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너무나도 기쁜 일이 있으면 그냥 비밀로 간직하지 않습니다.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그만큼 여자들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컸기에 기쁨을 가지고 곧바로 찾아갑니다.
이 사랑을 아셨기에 여자들에게 가장 먼저 부활하셨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경비병들도 무덤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람들이 아닌,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했던 수석 사제들을 찾아갑니다. 경비병들에게 예수님 부활은 전혀 기쁘지 않고 오히려 두려움의 이유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사랑을 전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만큼 주님의 뜻인 사랑을 전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행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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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모든 것을 인내로 대하는 사람만이 모든 것에 도전한다(바우베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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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1.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다.”(마태 28,7)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제자들을 극심한 두려움으로 몰아넣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승의 죽음이라는 당혹스런 사실 앞에서, 믿음의 흔들림과 의혹과 허탈감으로 절망과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자신들도 붙잡혀 죽게 될까 봐 불안에 떨어야 했고, 불투명한 미래가 걱정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숨어서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는 그 깊은 어두움 속에서도 결코 갈망이 식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두려움보다 컸던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이 깊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리움이 되어 이른 새벽 스승의 무덤을 찾아가게 했고, 거기서 그들은 천사를 만나 놀랍고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다.”(마태 28,7)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면서 ‘평안하냐?’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천사를 통해 사명을 주었건만, 굳이 열절하신 사랑으로 직접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주 오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향하여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인간을 향하여 계신 분”(본 훼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찾아 나서기만 하면 “나 여기 있노라.”(이사 58,9;66,1) 하시며, 이미 찾아와 우리 앞에 계십니다. 항상 우리를 향하고 계셔서, 우리가 찾기 전에 먼저 우리를 향하여 찾아오십니다. 그러니, 더 이상 예수님을 붙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께 붙잡혀 있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를 찾으시는 당신 앞에, 항상 “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당신 면전에 있어야 할 일입니다.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시어, 막달레나에게서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당신 부활을 선포하는 첫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켜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당신을 부인하고, 배반하고, 달아나버린 제자들을 말입니다. 비록, 그들이 당신을 떠났어도 진정으로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이미 그들을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내 형제에게로 가라” 바로 이것이 당신께서 부활하시어 첫 사도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형제들 안에서 예수님을 뵈올 것입니다. 척박한 땅 갈릴래야, 우리가 머물고 있는 바로 이 땅, 바로 여기, 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뵈올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께서는 형제들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형제를 사랑할 때 부활 생명이 우리 안에서 피어오르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형제를 사랑하게 하소서. 형제들 안에서 당신 얼굴을 뵙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주님!
그분을 뵙는 일, 이보다 기쁘고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가는 곳에 항상 먼저 와 계신, 먼저 오시어 나를 기다리시는 분,
결코 저를 떠나지를 못하시는,
그 보고 싶은 분을 보는 일, 그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찾으면 ‘나 여기 있노라’ 하시고,
제가 숨으면 ‘너 어디 있느냐?’고 제가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고,
먼저 제 안에 들어와 ‘어서 가자’고 이끌어 주시는.
그 보고 싶은 분을 보는 일, 그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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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1.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부활은 믿음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돈은 사람을 사고 음모를 꾸밉니다. 헛소문이 전해집니다. 시기와 질투가 사람을 죽입니다. 돈과 속임수가 손을 잡고서 거짓을 퍼뜨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총선을 앞두고 후보자들의 실상을 보게 되는 데 물질에 지배당한 어리석은 모습도 봅니다. 여당도 야당도 표를 사려고 헛공약을 남발하며 현혹합니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서 결코, 속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빈 무덤에 관해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마태28,13).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습니다. 돈이 좋긴 좋은가 봅니다.
그러나 빈 무덤의 부활 사건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28,10).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두려워하면서도 기뻐하며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간 여인들은 “평안하냐?” 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본 여인들이 그분의 부활을 맨 먼저 목격한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권력과 돈으로 무덤을 덮으려 하였지만, 무덤은 덮을 수 있어도 살아 나오신 주님을 가릴 수는 없었습니다. 돈과 권력이 사람을 움직일 수는 있어도 결코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랑과 정의가 살아있고, 사랑의 희생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진리를 일깨워 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흩어졌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내 형제들” 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과의 관계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여전한데 늘 우리가 주님을 외면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약속된 갈릴래아로 가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게 되고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악의 어둠을 밝게 비추시고 새로 나게 하시어 어려운 환경과 처지 안에서도 진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도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기에 매일 매 순간이 한 점 부끄럼이 없는 거룩함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성 끌레멘스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헛된 수고들, 즉, 불화와 질투심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간절히 청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생각, 불화, 질투, 탐욕까지도 그분의 십자가 앞에 굴복시키며 오로지 십자가의 사랑과 자비를 청하십시오. 반드시 부활의 은총을 얻어 누릴 것입니다.”하고 권고하였습니다. 결국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인 믿음의 생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삶입니다. 약속된 주님의 말씀을 믿고 자비와 사랑에 의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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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1.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노래방이 생기면서 전 국민이 가수가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에 전화번호를 저장하면서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듯이, 내비게이션에 의지하면서 몇 번을 간 곳도 내비게이션 없이는 찾아가지 못하듯이, 노래방에 가사가 나오면서 예전에는 외우던 노래들을 외우지 못합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지지만, 예전에 우리의 몸과 마음이 기억하던 기능들은 점차 약해지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이 있습니다. 새것을 알기 전에 예전의 것들에서 배우자는 것입니다. ‘Old is but Good'이라는 말도 이와 비슷합니다. 요즘의 음악도 좋지만 예전에 들었던 노래가 가슴에 더 깊이 와 닿는 때가 있습니다. 그 노래에 나의 기억과 나의 삶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18번으로 부르는 노래 중에 최성수의 ’해후‘가 있습니다. 애잔한 멜로디와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을 아파하면서도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소망하는 가사가 좋았습니다. 또 하나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기도를 성가로 만든 ‘아무것도 너를’이 있습니다. 성가가 곧 기도가 된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성가입니다. 가사 중에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 만으로 만족하도다.’가 있습니다. 이 두 노래는 제가 그 가사를 온전히 기억하는 노래입니다.
부활 팔일 축제를 지내면서 문득 성가를 묵상하고 싶어졌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성가 329번 ‘미사시작’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기쁨이 넘쳐 뛸 때 뉘 나와 함께 나누리./ 슬픔이 가득할 때 뉘게 하소연 하리/ 영광의 주 우리게 기쁨을 주시오니/ 서러운 눈물 씻고 주님께 나가리/ 당신이 아니시면 그 누가 빛을 주리/ 인생은 어둠속에 길 잃고 방황 하리/ 희망의 주 내 삶의 길 인도 하시오니/ 나 언제나 주 안에 평화를 누리리./ 부당하온 이 영혼 주 앞에 어찌 가리/ 주께서 살피시면 결백함 있을런가./ 사랑의 주 우리의 뉘우침 굽어 보사/ 불쌍히 여기시어 받아 주옵소서.” 멜로디가 장엄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숙연하게 만들어 줍니다. 예수님께서 몸과 피를 내어 주시면서 제정하신 성체성사의 깊은 뜻을 느끼게 해 줍니다. 먼 길 떠났다가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오는 나그네의 심정이 느껴집니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의 심정이 느껴집니다. 젊은 날 객기를 부리면서 방황하던 아들이 어느 날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미사시작은 바로 그런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잔치를 벌여 주는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쉽고, 야속하고, 화가 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믿었던 제자들이 자신을 배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안하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있었습니다. 걱정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변화된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슬픔을 다 떨쳐버리고, 주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한 주간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편안한 하루 되십시오. 저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오늘부터 메주고리, 파티마, 루르드 성지순례를 갑니다. 주님의 사랑에 깊이 머물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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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1.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찾는 것이 가까이에 있다는 말로 풀이됩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행복을 찾아 온 삶을 바칩니다. 이곳에 행복이 있을까? 혹은 저곳에 행복이 있을까 하고 두리번거립니다. 그리고 행복을 찾았다 싶으면 그것에 모든 것을 바칩니다. 그러나 이내 외부에서 찾은 행복은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안에 그리고 나와 함께하는 가족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지금 당장 만나면 안 됐을까요? 제자들을 그렇게 사랑하신 주님이신데 주님은 왜 굳이 갈릴래아에서 제자들과 조우하고 싶으셨을까요?
그 뜻을 다 헤아릴 수 없지만 마지막까지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듯합니다.
주님은 갈릴래아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처음 만남이 시작된 곳, 제자들과 먹고 마시고 울고 웃었던 그 작은 시간이 모여있는 갈릴래아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맞습니다. 지금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이곳이 바로 갈릴래아입니다. 우리 가정이 갈릴래아이고 지금 이 시간이 갈릴래아입니다.
이곳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그리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평화라는 꽃다발을 들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삶의 갈릴래아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평안하기를…. 평안 안에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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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부활 체험
늘 그런 것처럼
해가 지고
주변이 고요해지면
동네를 걷기 시작한다.
그날도 그랬다.
밤공기를 헤치며 걷기 시작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속이 부글거리며 지옥으로 변하고 있었다.
사방은 트여있었고 본능적으로 집은 너무 멀다는 것을 직감했다.
순간 머릿속에 작은 공원 화장실이 스쳤다.
간절한 마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속은 점점 지옥이 되어갔지만 그럴수록 부활을 더욱 열망했다.
무사히 도착
그리고 계획대로 부활을 맞이했다.
모든 것이 캄캄했던 순간 빛이 내렸다.
지옥은 멀리 있지 않다.
그리고 부활도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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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1.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 부활
-사실인가? 또는 가짜뉴스인가?-
“예수님은 살아나셨다!(Christ is risen!)”
어제 3월31일은 3월 성 요셉 성월의 끝날이자 주님 부활 대축일이었고 오늘 4월1일은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에 이어 4월 한달은 만개한 파스카의 봄꽃들과 함께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부활시기가 펼쳐 집니다. 옛 어른의 4월 말씀과 오늘 말씀도 참 좋습니다.
“거피취차(去彼取此); 이상에 취하지 말고 일상에 몰두하자”
다산이 노자를 인용한 4월 주제 말씀입니다.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 부활을 체험한 우리들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냉철한 삶의 자세입니다.
“사자는 갈기가 없더라도 사자다. 선비는 궁한 처지에도 비굴하지 않다.”
다산 어른의 말씀입니다.
“부귀함도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비천함도 이 뜻을 바꾸지 못하며, 위험도 이 뜻을 굽히지 못하니, 이래야 대장부라고 할 수 있다.”
맹자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님 부활을 체험한 자라면 모름지기 다산 어른의 선비의 자세가, 맹자 어른의 대장부의 자세가 마땅하겠습니다. 어제, 성주간 동안 수도원에 머물다간 제 옛 고향, 대전교구 원로신부의 유머스런 말씀도 힘이 되었습니다.
“수도원 도서실에서 <요셉수도원 설립 25주년(1987-2012)> 화보집에서 당시 원장이던 ‘신부님의 회고사;이제 다시 시작입니다’를 읽었습니다. 초창기 수도원을 일궈 놓으신 대단한 분이더군요. 그분이 누굴까 유심히 살펴 보니 신부님이었습니다. 절로 말하면 수도공동체의 원로가 되는 신부님은 방장이고, 원장신부님은 주지가 되는 셈입니다. 신부님은 불암산의 ‘산중(山僧)’이라면 저는 세속의 ‘들중(野僧)’입니다.”
정말 평생 분투의 노력을 다해 불암산 성 요셉수도원의 산승(山僧)답게, 수도공동체의 겸덕(謙德)과 학덕(學德)을 겸비한 출중한 영적지도자 방장답게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했습니다. 어제는 참 많이 부활 축하 카톡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주님 참으로 부활하셨나이다! 신부님, 주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요지의 축하글이었습니다. 너무나 자명한 부활의 기쁨을 전하는 글이었습니다. 교황님의 부활성야강론시 “예수님과 함께, 무덤은 더이상 삶의 기쁨을 압도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주제로 말씀하셨고, 부활절 메시지에서는 “그리스도는 살아나셨다! 모든 것은 새롭게 시작한다!(Christ is risen! All begins aneu!)” 희망찬 주제를 택하셨습니다. 부활의 희망, 부활의 기쁨이 우리를 살게 하는 참된 내적힘입니다. 정순택 서울대교구장의 부활메시지도 적절했고 일부 인용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자주 ‘반대자들을 사랑하고 우리를 험담하는 이들을 축복합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치지도자들은 국가의 발전과 국민들의 행복에 큰 책임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곧 치르게 될 총선에서 민주국가의 국민으로서 권리를 잘 행사해서 국민의 참 봉사자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과 사회의 어려움을 넘어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나라의 명운이 달린 총선입니다. 나라의 좋은 일꾼을 택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후보의 배경인 당과 삶을 역사를 봐야 할 것이고, 무수한 쓰레기 가짜뉴스들에 휘둘리거나 속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분명 부활하셨고 일부 제자들은 너무나 생생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는데, 이에 당황한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은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며 매수하니 종교지도자들이 가짜뉴스의 진원지가 됩니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자기들이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고 그들이 시킨대로 했고, 이 가짜뉴스 유언비어가 유다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합니다. 정말 믿음의 없는 이들에게는 예수님 부활이 유언비어 가짜뉴스처럼 들렸을 것이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정말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참 분별하게 난감합니다.
무엇이 유언비어요 가짜뉴스인지 오늘 복음을 보면 분명합니다. 종교지도자들과 경비병들이 유언비어 가짜뉴스의 진원지입니다. 총선을 앞두고 유언비어 가짜뉴스가 만연된 세상에서 이에 속지 않도록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좋은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배경의 당과 인물의 과거 행적을 꼭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살아온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회개가 아니곤 사람은 결코 고쳐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너무나 자명한 진리입니다. 부활의 희망, 부활의 기쁨이 우리를 험난한 광야여정 중에도 무너지지 않고 독야청청 살게 하는, 샘솟는 내적 힘의 원천이 됩니다. 도대체 부활한 파스카의 예수님이 아니곤 어디에다 참 희망과 기쁨을 둘 수 있을런지요! 바로 그 생생한 부활의 증인이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베드로 사도입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그대로 베드로의 주님 부활체험을 반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서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어 예로 드는 다윗 시편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의 고백을 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고백을 여러분의 내 고백으로 삼으셔서 바쳐도 은혜롭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시는 참 좋은 선물이 시편16,8-11절입니다. 저는 오늘 부활절 다음날 4월1일 오늘 파공은 주님 부활의 희망과 기쁨을 관상하며, 또 교황님의 부활 강론과 메시지를, 아래 시편을 묵상하며 행복한 하루를 보내려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고백이자 주님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우리의 행복한 고백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시편(16,8-11)을 그리스도화하여 렉시오디비나 하는 경지가 참 놀랍습니다. 과연 렉시오디비나의 모범입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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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1.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쁨>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마태 28,9)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마태 28,10)
참으로
기쁨이라면
붙잡지
않는 겁니다
나누어야
기쁨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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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1.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9-10)
생명의 말씀을 가장 먼저 받은 사람
여자 몇이 가장 먼저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인사를 받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사도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지시를 받는 이 사건들은 세상이 생겨났을 때와 순서가 거꾸로입니다.
죽음이 세상에 들어오게 한 여성이라는 성(性)이 영광과, 주님의 모습과, 열매와 부활의 소식을 받는 데에서도 먼저였습니다. 모든 것을 본 경비병들은, 그리스도의 시신을 도둑맞았다고 거짓말을 하는 대가로 돈을 받음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외면했습니다(마태 28,12-15 참조). 그들은 부활에 관하여 침묵함으로써 이 세상의 영예와 즐거움을 샀습니다. 이 세상의 영예는 돈에 있기 때문입니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 세계가 “얼마나 놀라운지”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은총이 가득한 창조계를 보고 놀란다. 실로 그는 창조계를 “일차적인 은총", “창조의 은총", “창조의 선물", “은혜롭게 주어진 은총”이라고 부른다. 그는 창조계의 아름다움과 충만함에 놀라고, 무엇보다도 항상 존재하는 창조의 법칙, 즉 밖으로 흘러 나옴과 동시에 안에 머물러 있는 것에 놀란다. 그는 사람이 존재와 모든 피조물을 감싸는 원의 일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더 깊은 영적 의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창조계를 억누르라거나. 창조계에서 벗어나라고 충고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우리에게 창조계를 보는 방식을 바꾸고, 우리의 의식을 바꾸라고 충고한다. 앞의 설교 3에서, 그는 음식과 포도주를 그저 음식과 포도주로서만 맛보는 사람, 음식과 포도주를 하느님의 선물로 여기고 맛보는 사람, 그리고 음식과 포도주를 영원의 암시로 여기고 맛보는 사람에 대하여 말했다.(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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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교황 프란치스코의 찬미받으소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10. 저는 매력적이고 감탄을 자아내는 한 인물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 회칙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로마 주교로 선출되면서 저는 그분의 이름을 저의 길잡이요 영감으로 삼았습니다. 저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취약한 이들을 돌보고 통합 생태론을 기쁘고 참되게 실천한 가장 훌륭한 모범이시라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생태 분야에서 연구하고 활동하는 모든 이의 수호성인으로 비그리스도인들의 사랑도 많이 받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피조물과 가난한 이들과 버림받은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을 하셨고, 또한 그 기쁨, 관대한 헌신, 열린 마음으로 큰 사량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이웃과 자연과 자기 자신과 멋진 조화를 이루며 소박하게 사셨던 신비주의자이시며 순례자이셨습니다. 그분은 자연 보호,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의, 사회적 헌신. 내적 평화가 어떠한 불가분의 유대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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