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8]아름다운 사람(37)-근봉槿峯, 그대 이름은 서예가
고교때 스토리텔링의 귀재였던 한문선생님 영향을 유난히 많이 받은 듯하다. 동양고전에 유별나게 취미가 있더니, 졸업 후 급기야 붓을 잡았다. 그로부터 30여년의 성상이 흘러 어엿한 서예가가 되었다. 대한민국서예대전 특선도 했으니, 가히 일가를 이뤘다해도 과언이 아닐 터.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은근과 끈기, 역시 ‘한 우물’을 파는 직심直心의 인간에게는 방궈댈('버티다'의 방언) 수가 없다.
그는 내로라하는 건설사에 입사, 해외 근무만도 25년, 귀국하여 다른 건설사로 스카우트까지 돼 중역으로 정년퇴직했다. 외국에 살면서도 고향 남원에 내려와 번듯한 집을 ‘내 손’으로 짓고, 사랑하는 서울 출신의 동갑 아내와 오순도순 '나이를 익어가겠다'는 꿈까지 이뤘다. 게다가 국궁國弓까지 옆지기와 취미생활을 함께 하니, 그 더욱 보기 좋았더라.
그의 아담한 저택(?)은 유난히 뷰가 좋다. ‘산첩첩山疊疊’이라는 한시의 구절이 생각난다. 지리산 자락의 산봉우리가 하나도 아니고 3개나 겹쳐 보이는 볕바른 남향, 집터 한번 기막히다. 5개월도 넘게 지었다던가? 건설사 밥만 30여년을 먹었으니 오죽 잘 지었으랴. 아무튼, 그가 오늘 점심(30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에 친구 3쌍과 솔로친구 2명을 불렀으니 모두 10명. 형수(친구의 부인)에게 이렇게 큰 민폐를 끼쳐도 되나? 몸둘 바를 몰랐지만, 상다리가 휘게 차린 밥상에 메인메뉴가 여수에서 막 올라온 명물 ‘하모(갯장어)’였으니 입이 딱 벌어졌다. 사실인즉슨, 여수에서 최근 오랜 직장(40여년)을 한 친구가 드뎌 밥숟가락을 놓더니, 고맙게도 ‘하모’를 직송시키고(1년 전의 약속), 일산에서 KTX로 직행하여 이뤄진 모임이었다. 허나 자리를 내주고 온갖 수고로움을 기꺼이 한 친구부부에게도 새삼 감사를 드린다. 막걸리를 조금 섞은 수제 홍어무침은 또 얼마나 별미였던가. 술이 그야말로 술, 술, 술, 목젖을 타고 달음박질을 해도 부족할 판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식사 후 펼쳐졌다. 취송헌趣松軒 주인 근봉槿峯 친구가 서재에서 꺼내온 족자 3개. 1탄은 미국인 반-한국인 반 친구(호 휴암休岩)에게 주려고 행서로 쓴 당송 팔대가 한퇴지韓退之의 한시 족자.
草樹知春不久歸/초수지춘불구귀
봄이 오래 가지 않음을 풀과 나무가 아는지라
百般紅紫鬪芳菲/백반홍자투방비
홍색 자색 백색 어울려 다투어 피어나네
楊花楡莢無才思/양화유협무재사
버들꽃과 느릅나무는 열매 생각할 재주가 없어
惟解漫天作雪飛/유해만천작설비
오로지 온 하늘에 원망 어린 눈송이만 날리고 있네
호스트인 글쓴이가 직역과 의역을 하는데 그 의미가 자못 심장하다. 생각지 못한 선물을 받은 친구는 말을 잃고 얼굴을 붉히며 고마워했다. 휴스턴이나 LA친구들에게 자랑거리가 또 하나 생긴 것.
1탄에 이은 2탄은 남원에서 30여년간 인술仁術을 펼치고 있는 의사친구(호 남악)에게 준 선물. 이 친구는 전북에서 전라고6회 주치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서울의 주치의는 장안동의 코리아병원 정형외과 의사(호 원촌. 그는 조기축구의 달인으로, EBS의 <명의名醫>에도 출연한 ‘인간 목수’). 그에게 써준 족자의 내용은 포은 정몽주 선생의 시 <춘흥春興>.
春雨細不滴/춘우세부적(하더니): 봄비가 가늘어 물방울이 되지 않더니
夜中微有聲/야중미유성(이라): 밤중에 그래도 가느다랗게 비소리 들리네
雪盡南溪漲/설진남계창(하니): 이 눈이 녹아 남쪽 개울물이 불어나면
草芽多少生/초아다소생(고): 풀의 새순이 (다음날) 얼마나 솟아날고?
그의 호의를 여러 번 받은 느낌의 시를 골랐으리라. 어찌 풀의 새순만 돋아나겠는가? 이쯤 되니, 그의 집에 초대받은 친구들에게 호스트는 성심誠心을 다해 그 친구의 인품이나 특징에 맞는 한시를 선택해 쓰고 족자까지 만들어 선물하는 미풍양속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소생도 3, 4년 전에 도연명의 <귀원전거歸園田居> 글씨를 받아 크게 감격했었다.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편지 19신]기조연구림羈鳥戀舊林 지어사고연池魚思故淵 - Daum 카페
이어서 3탄. 남원 아영에서 포도농장 하는 동생의 일을 돕는, 소위 지리산 약초쟁이(호 고룡)을 위한 선물도 준비했다. 중국시인 도홍경을 들어보셨는가? 고룡와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山中何所有/산중하소유: 산중에 무엇이 있던가요
嶺上多白雲/영상다백운: 산마루에 흰 구름이 많지요
只可自怡悅/지가자이열: 다만 나 홀로 즐기고 좋아할 뿐
不堪持贈君/불감지증군: 그대에게 가져다 줄 수 없는 게 유감이라오
이 백주대낮 더운 날에 이렇게 귀한 선물을 주는 친구가 있다니요? 대체 우리는 얼마나 해피한가요? 좋은 집 초대에, 좋은 음식에, 좋은 친구에, 값을 따질 수 없는 선물까지라니요? 그날 담소가 여간 유쾌한 게 아니었습니다. 영양가 있는 만남. 그 친구는 붓 한 자루로 ‘세상을 따땃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게 틀림없습니다. 럭셔리한 취미가 유별난 특기가 돼 제 돈을 들여서까지 많은 친구를 기쁘게 해줍니다. 이제껏 몇 명에게 이렇게 귀한 작품을 선물했을까요?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에게는 진작에 선물했다더군요. 그 내용도 궁금합니다. 안봐도 비디오, 무릇 기하였겠지요. 참으로 대단한 성의입니다. 아무렴,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이 '웬수'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한 친구가 “무가지보無價之寶”라는 유식한 말을 했습니다. 가보로 물려줘 십 수년 후 진품명품에서 고가로 경매될 수도 있지요.
또한 친구는 친구들에게 저렇게 귀한 선물을 못주지만, 글쟁이라면서 졸문들을 엮은 책자를 한 권씩 안겼다나요. 참 유별난 전라고출신 인간들입니다. 아름다운 밤이 아니고 더운 여름날조차 아름답게 보이게하는 아름다운 선물이었답니다. 한자와 한문을 보니까 골치가 벌써 지끈거리나요?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찬찬히 한번 뜻풀이도 하면서 감상해 보심이 어떠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