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78
11월18일[연중 제3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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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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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mP2kSluSyc
[서울대교구 박재득 테오도로 신부님 집전(청소년국 중고등부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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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집요하게 졸라대는 과부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자들과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가르침의 요지는 간단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
낙심(落心)이라는 단어가 참 재미있습니다. 떨어질 락에 마음 심자입니다. 마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뭔가 추구하던 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보니 맥이 풀리고 마음이 상함을 의미합니다.
그런 경우 많이 체험하실 것입니다. 한 가지 특정한 목표를 정해놓고, 9일 기도를 넘어 54일 기도를 바친다든지, 한 달 내내 새벽 미사를 다닌다든지, 정말 열심히 기도했지만, 목적했던 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을 때, 우리는 그야말로 낙심(落心)합니다.
지향이 적당한 것이면 청이 수락되지 않아도 그려러니 할텐데, 심각한 문제라면, 누군가의 일생이 달려있고, 생사가 좌지우지되는 문제라면, 낙심 정도가 아니라 마음이 산산조각 부서지고 깨어지는 느낌일 것입니다.
요즘 주변을 둘러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낙심하며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낙심을 넘어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하고 울부짖습니다. 더이상 한 발자국도 나아갈 힘도 없어, 엎어져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힘을 내어보라 초대하십니다. 지금 하루 두 시간 기도하고 있는 우리에게, 그것으로 부족하다, 밤낮으로 부르짖어보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루카 18,7)
따지고 보니 지금 우리가 바치는 기도에 조금 더 추구될 사항이 있습니다. 보다 간절함입니다. 보다 절박함입니다.
그냥 간절한 기도가 아니라 목숨을 건 간절한 기도입니다. 육체는 물론 지니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한 기도, 정신과 영혼, 일생 전체를 건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런 기도를 바치는 과정에서 주님께서 내 가까이 현존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내 기도의 지향이 정말 올바르고 순수한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청원의 수락 여부보다는 나와 하느님 사이에 주고받는 친밀한 대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이루어지는 진솔한 대화, 그것이 얼마나 좋은 기도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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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sxswaeTIz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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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있는지 알아보는 가장 손쉬운 방법>
오늘 복음도 예수님의 ‘믿음’에 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믿음이 있다면 우선 ‘주님의 종’이 됩니다. 계속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그다음엔 주님의 종이 된 것에 ‘감사’해 합니다. 사탄의 종인 줄도 모르고 살다가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이 얼마나 행복입니까? 그리고 오늘은 ‘꾸준히 기도’한다고 마무리하십니다.
기도는 무언가 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꾸준히 청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물건을 잃어버려 찾을 때 조금 찾다가 포기한다면 그 물건이 거기에 있을 것이란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끝까지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과부와 재판관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재판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과부가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고 끊임없이 청하자 무서워서가 아니라 귀찮아서 그 청을 들어준다는 내용입니다.
다른 복음에서는 이와 비슷한 내용을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신 다음에 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꾸준히 바쳐야 한다고 하시며 밤에 빵 세 덩어리를 얻으려고 친구의 문을 끈질기게 두드린다는 비유입니다.
세상의 것을 달라고 끊임없이 청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청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것들도 들어주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를 통해 청하게 되어있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를 꾸준히 한다면 반드시 그 사람에겐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있는지 알아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규칙적으로 기도를 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으면 배가 부른 것처럼, 기도하며 주님을 뵈면 나에게 영향이 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노인 신자분이 아침 일정한 시간이 되면 성당에 기도하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단 1분이라도 좀 앉아계시지’라고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병원에 입원하여 임종을 앞두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병자성사를 주기 위해 그 병원에 찾아간 신부님은 그 할아버지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신부님이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좋으신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기도를 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매일 성체 대전에 나가 ‘예수님, 저 왔어요’라고 인사만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당에 갈 수 없으니 그분이 매일 찾아오셔요. 제 이름을 부르며 ‘요셉아, 내가 왔다’라고 인사하고 가십니다. 아침마다 예수님께 이렇게 인사를 받는데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보상을 받습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그 보답이 ‘성령’입니다. 만약 그 보답을 받았다면 기도를 멈출 수 없게 됩니다. 성령은 기도 안에서만 오시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한 청년이 코로나로 성당에 나가지 못하다가 견딜 수 없어서 다시 미사에 다니기로 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주일미사에 빠진 적이 없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안 좋은 일도 있고 해서 한 달 정도 주일미사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일도 꼬여 화를 많이 내게 되고 어머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말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렇게 기도 안에서 받아오던 것이 끊어졌을 때 꾸준히 기도하던 사람은 대번 그 은총의 끊어짐으로 오는 고통을 체감합니다. 밥을 안 먹으면 배고 고프고 물을 안 마시면 목이 타는 것처럼 너무도 명확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를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보아 전쟁(1899-1902) 중에 한 사람이 아주 특이한 죄명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죄명은 ‘낙담시키는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군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적이 얼마나 강한가, 왜 방어하기 어려운가, 또 이 도시는 필경 점령될 거라며 여러 불안한 말을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그는 총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반역죄가 적용되었습니다.
우리 안에도 끊임없이 ‘기도하면 뭐해?’라고 반역을 일으키는 자아의 목소리가 존재합니다. 꾸준한 기도는 이 자아의 목소리를 이겼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게 만듭니다. 그러니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주님의 기도 꼭 한 번씩이라도 바치며 성령을 청합시다. 지옥에 가면 하루 단 2분도 꾸준히 기도하지 못한 것 때문에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청해서 은총을 받아보기만 한다면 절대 기도를 멈출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기도시간을 조금씩 늘려가면 됩니다.
기도가 꾸준하지 않다면 아직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루 가장 적게 기도한 시간이 나의 믿음의 정도입니다. 기도를 몰아서 많이 하는 것보다 짧더라도 꾸준한 것이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매일 최소한의 기도시간을 정하고 그것을 꾸준히 지켜나가도록 합시다. 믿음이 있는지 알아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꾸준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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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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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장례미사를 준비하면서 고인의 관을 닫으려 했습니다. 고인을 위한 미사에 집중하기기 위해서 그렇게 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족 중에 한명이 반대했습니다. 마지막 미사이고, 곧 땅에 묻히니 관을 닫지 말아달라고 하였습니다.
가족들의 바람을 듣고, 관을 열고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고인이 되신 분도 미사에 참례하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미사에 집중하려는 원칙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유족이 원하면 미사에 집중이 되지 않더라도 그 뜻을 존중해 주는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미사를 마치면서 다른 종교의 장례 예절을 잠시 해도 좋은지 물었습니다. 물론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 또한 유족이 원한다면 반대할 것도 없다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고인과 유족들의 청을 무시하시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모두 털어버리고,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순교자들의 영성을 강의하는 김길수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글의 제목은 ‘성삼문의 죽음과 김대건의 죽음’입니다. 성삼문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 중에 한 명입니다. 성삼문이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형장에서 그가 지었다는 절명시를 통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절명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回首日欲斜(회수일욕사) 黃天無一店(황천무일점)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둥둥둥 북소리 울려 내 목숨을 재촉한다. 머리 돌려 바라보니 해가 지려 하누나. 저승길에는 주막집 하나 없다는데 오늘밤은 내 어느 집에서 묵어갈까.”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성삼문에게 인생의 끝은 ‘허무’였습니다. 그의 죽음이 충절을 드러내는 죽음이었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죽음에 앞서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대들은 들으라. 이 환란과 고난도 주의 허락 없이는 있지 않으니 환란의 의미를 생각해서라도 삼가는 마음으로 주의 계명을 지켜라.”
주교님께는 이렇게 부탁합니다. “주교님, 우리 어머니를 부탁드립니다. 일찍이 어린 자식을 이국만리에 보내고, 믿음 때문에 지아비를 잃고, 의지할 곳 없어 거리를 헤매는 거지가 되었다고 하나이다. 어머니를 주교님께 부탁드리고 저는 편안히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우들에게 “나는 간다. 이제 환란도 고통도 박해도 없는 하느님의 기쁜 나라에서 다시 만나자.”
성삼문과 김대건은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허무’고 하나는 ‘새 출발’입니다. 하나는 자기 소신을 위해서 죽지만 그 소신이 준 것은 결국 인간의 한계인 허무입니다. 김대건의 죽음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새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출발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18,1-8)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이 세상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 남편, 내 자녀, 내 집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그것들을 상실하면 화가 나고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는 잠시 소유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잠시 나에게 맡겨 주신 것들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나와 함께 하는 가족, 이웃, 물건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함께 나눈다면, 우리가 말씀을 가슴 속에 담고 산다면 세상의 마지막 날 이 온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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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8,1-8: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1절). 예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계속 졸라 대어 결국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든 과부의 예를 드셨다. 과부가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정이나 동정심에 호소해서가 아니라, 지치지 않고 졸라댔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항구하게 기도하면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들어주신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스러운 사람들이다.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좀 더 고집스러웠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와 인간을 업신여기는 사악함을 과부의 끈질긴 청원이 이겼다. 불의한 재판관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여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우리도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은총과 정의가 우리의 본성에 맞는 열매를 얼마나 많이 맺게 하겠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간구하는 사람들의 청을 얼마나 잘 들어주실지 깨닫기를 바라신다. 가난한 과부의 끈질김이 사악하고 불의한 재판관조차도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른 척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당신께서 원하시고 더 좋은 때에 들어주실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부서진 마음과 꺾인 영을 안고 기도해야 한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더 좋은 방법으로 들어주실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절) 하신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갈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마지막 때에 옳고 흠 없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그분의 영광을 거스르는 자들의 사악함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항상 기도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고 그 기도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고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한다.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나에게 이루어주시도록 맡겨드리는 자세를 가지고 기도하여야 한다. 참된 기도는 나 중심의 기도가 아니다. 항상 하느님 중심으로 찬미와 감사가 선행되는 기도를 바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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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의 요점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입니다. 그런데 무턱대고 기도만 많이 하는 것이 언제나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복음에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달라고 청하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성경 전통에 따르면, 과부는 사회적 약자를 대표합니다. 한편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재판관은 과부의 청을 마지못하여 들어줍니다. 그는 과부가 자신을 계속 귀찮게 할 것 같아 이기심에서 청을 들어줍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이러한데, 하물며 정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자녀들의 청을 얼마나 잘 들어주시겠는가 하는 것이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자주 내가 바라는 것을,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내가 바라는 때에 이루어지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차려진 밥상 위에 숟가락 하나 얹듯이, 하느님께서는 내가 미리 정하여 놓은 답을 들어주시면 된다는 식입니다. 물론 하느님께 끊임없이 청하는 모습도 신앙생활에서 중요하지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청원이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맞는지, 내 기도가 이기심을 충족시키려는 수단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올바른 방향성 없이 열심히만 기도하는 것이 최고라고 판단하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잘못된 방향과 건강하지 못한 지향으로 무조건 많이 기도할 경우, 정상적인 길에서 더 빨리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할 때 두 가지를 명심하여야 합니다. 첫 번째로 올바른 지향으로 기도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기도는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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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지혜서 저자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전사처럼 땅 가운데로 뛰어내시어 만물을 죽음으로 가득채우신 사실을 전합니다.
또한 그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온 피조물이 본성마다 새롭게 형성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보호를 받게 된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이집트 군대에게 추격을 받을 때 어떻게 당신 백성을 이끌어 주신 기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영 위는 구름이 덮어 주고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땅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으며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지혜 19,7)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풀 뜯는 말들처럼, 어린양들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온 민족이 홍해를 건넜고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신 놀라운 일을 찬양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가 청원이며 그분과의 친교의 통로임을 알고 있습니다. 스승이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오만한 판관과 공정한 재판을 청하는 한 과부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한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을에 자신의 적대자와 시비가 붙었는데,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고 졸랐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의도가 그 재판관이 말에서 나타납니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루카 18.4-5)
예수님의 말씀의 논리는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도 우습게 보는 그 재판관도 그 과부가 와서 계속 청하면 귀찮아서라도 재판을 열어 판결해 내려주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 못된 재판관도 계속 청하며 소원을 들어주신데 ‘하물며 인자하시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야 사람의 청을 오즉 잘 들어주시겠느냐?’라는 뜻을 이끌어 내어 제자들이 알아듣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의도를 가지고 하시는 주님 말씀을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루카 18.7)
신앙인은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느님 나라에 희망을 두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잘 알지만 세상에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만만치 않습니다.
주님께서 수난 전 날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요한 17,14)
아버지께 기도하셨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고 살아가다보면 실망스런 일도 많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리 떼 가운데 양’을 보내시는 심정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시고 악에서 그들을 지키시기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도 스승이신 주님께서 아버지께 간구하신 것처럼 끊임없이 청하며 기도하는 사람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주님과 일치하며 세상의 여러 어려움에서도 올곧게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변함없이 청하라고 당부하시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가 되며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희망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도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18,8)라고 우려의 말씀을 하셨지만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간직하며 주님의 나라로 갈 수 있도록 성실하게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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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제1독서인 지혜서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말씀”이 행하신 업적을 노래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말씀이 육을 취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일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도 줄곧 졸라대며 매달리는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데,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지 않은 채 미적거리시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분명 제자들에게 낙담하지 말고 계속 간청하라고 권고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부가 청한 것은 다름 아닌 “올바른 판결”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올바른 판결이란 하느님 뜻에 맞는 판결을 뜻합니다.
재판관이 불의한 자, 곧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였지만, 과부는 그에게 하느님 뜻에 맞는 판결을 내려 달라고 청합니다. 결국, 불의한 재판관은 올바른 판단, 곧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들이 내리는 판결을 내려 줍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간청해야 할 것은 “올바른 판결”입니다.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로서 하느님의 뜻에 맞는 올바른 것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우리가 늘 올바른 것을 간청하였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나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한 것은 아닌지, 나에게 득이 될 것이라 여기지만 결국 나와 공동체에게 해가 될 무엇인가를 하느님께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연 나는 모두를 위하여 유익이 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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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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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고 바라고 사랑하자>
저는 기도에 관해 이야기할 때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하자!”하고 말합니다. 기도할 때는 무엇보다 믿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또한 믿는 바는 반드시 이루어 주시니 미리 감사해야 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입었으니, 그분께서 바라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그러므로 끈기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는 않기 때문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말까? 망설이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되고 그리하여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사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기도의 참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알베리오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기도하신 바와 같이 기도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법대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18,1)는 뜻으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재판관이 한 과부의 끈질긴 청을 못 이겨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는 자기의 기도가 받아 들어지지 않을 때나 지치고 싫증이 나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기도 하다가 “얼마나 더” 청해야 하는가? 할 때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야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끈기 있는 기도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끈기 있는 기도가 ‘꼭 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하되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한두 번이 아니라 천번 만번 거절을 당해도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열릴 때까지 두드리지 않으니까, 문이 안 열리는 것입니다. 문 안에는 반드시 그 문을 열어줄 하느님의 손이 있습니다.
모든 기도는, 그냥 한번 건성으로 해보는 기도가 아니라면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렇ㄴ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1,6-7) 시편에도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라고 적고 있습니다.
부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청하면 그 청을 반드시 들어 주신다는 확신을 지니고 하느님께 떼를 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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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안성기 배우를 잘 알 것입니다. 80년대부터 최고의 주연배우로 활동했었지요. 그러나 90년대 중후반부터 영화에서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솔직히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영화에 나오는 그의 모습이 너무 어색했습니다. 그렇다면 안성기 배우 본인은 어떠했을까요? 본인도 이 조연의 역할을 받아들이기가 전혀 쉽지 않았습니다. 이제 겨우 40대 후반인데, 벌써 뒤로 밀려났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역할을 맡은 것이 오히려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주연이 아니더라도 존재감 있는 배역은 얼마든지 있었으며, 역할의 크고 작음보다 작품 자체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꾸준히 연기 활동을 계속했기에,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국민배우 안성기 씨가 된 것입니다.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연이 되고 싶지만, 주연만 할 수 있는 세상이 절대로 아닙니다. 주연은 딱 하나밖에 없지만, 그래도 비중 있는 조연 역할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비록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멋진 역할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멋진 조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주연이 아니라고 포기하고, 겨우 조연만 한다면서 포기하고, 내가 엑스트라 역할을 할 사람이냐면서 포기하고…. 삶 안에서의 포기는 결국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는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면서 하나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재판관이지만, 귀찮을 정도로 계속 찾아오는 과부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하시지요.
하물며 하느님께서는 어떠하시겠냐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만 있다면, 그래서 삶 안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약간의 노력만 있어도 하느님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올바른 판결을 곧바로 받게 됩니다. 또한 믿음은 세상의 것과는 많은 차이를 드러냅니다. 즉,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할수록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갖추기란 쉽지 않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에 함께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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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늘 그렇게>
루카 18,1-8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나 늘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8)
내 님께서
내 편 들어주시도록
나 늘 그렇게
곧으신 내 님께서
내 편 들어주시도록
나 늘 곧게
바르신 내 님께서
내 편 들어주시도록
나 늘 바르게
착하신 내 님께서
내 편 들어주시도록
나 늘 착하게
부드러우신 내 님께서
내 편 들어주시도록
나 늘 부드럽게
따뜻하신 내 님께서
내 편 들어주시도록
나 늘 따뜻하게
맑으신 내 님께서
내 편 들어주시도록
나 늘 맑게
밝으신 내 님께서
내 편 들어주시도록
나 늘 밝게
깨끗하신 내 님께서
내 편 들어주시도록
나 늘 깨끗하게
내 님께서
내 편 들어주시도록
나 늘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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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때에 대한 믿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오늘 복음에서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청을 들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여러 차원에서 믿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전능하신 하느님입니다.
우리의 사도신경 첫마디가 바로 ‘전능하신 천주 성부’이잖습니까? 그리고 사도신경에는 없어도 하느님이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것이 우리 믿음이고, 그밖에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이요 진실하신 하느님이라는 것도 우리 믿음이지요.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을 못 들어주실 리 없으시고, 우리의 청을 아니 들어주실 리도 없습니다.
복음에서 한번은 “하실 수만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라고 했다가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꾸지람을 주님께 듣고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뒤늦게 믿음의 부족을 고백하고 도움을 청한 아비가 있었지요.
그런가 하면 복음 다른 곳에서는 능력의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며 고쳐주실 의향이 있는지 조심스럽게 청하는 나병 환자 얘기가 있지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때 나병 환자는 아무런 꾸짖음을 듣지 않고 치유를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믿음과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선의를 믿고 청한 다음에는 겸손하게 처분을 기다리고 끝까지 때를 기다리는 자세 말입니다.
제 생각에 재판관에게 줄곧 졸라대어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과부의 비유는 적절치 않고 엄마의 비유가 적절할 것입니다.
자식을 너무도 사랑하는 엄마가 자식의 올바른 청을 들어주지 않으실 리 없습니다. 그렇지만 엄마가 들어주는 데는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식이 원하는 것이 좋은 것이어야 합니다. 자식이 나쁜 것을 청하면 절대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와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때입니다. 그러니까 둘째 조건은 때가 맞아야 합니다.
자식은 청하고 즉시 들어주기를 원하지만 엄마는 더 좋은 다른 때를 염두에 둡니다.
자식은 지금 놀겠다고 하지만 엄마는 공부한 다음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청하지만 주님은 그것보다 더 좋은 것과 더 좋을 때를 예비하고 계신다는 그런 믿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는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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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18,8)
<절망이 기쁨으로!>
오늘 복음(루카18,1-8)은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과부는 가장 불쌍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대변합니다. 불의한 재판관, 곧 힘있는 이들의 편에 서서 판결하는 그 불의한 재판관이 끈질기게 매달리는 '힘없는 과부의 청'을 들어줍니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 나를 괴롭힐 것이다."(루카18,5)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18,6-8)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비유 끝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18,8)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얼마나 청을 들어주시는 분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끈질기게 청하고 있는가?'
'적당히 믿고 적당히 청하면서, 청한 것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드러내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절망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화답송 후렴)
오늘도 굳은 믿음 안에서 '절망이 기쁨이 되는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어제 저녁에 신.구약성경 필사를 끝마쳤습니다.
하느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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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D7zBXCguu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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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 8)
올바른 판결처럼
얼마만큼
세상을 향해
올바로
실천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가치입니다.
시간의 소중함과
사람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는
기도의
위령 성월입니다.
기도는
있어야 할
우리의
믿음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참된 기도는
참된 실천에
달렸습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기도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입니다.
기도의 자세는
다름 아닌
삶의 자세입니다.
삶의 자세는
삶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삶도
삶의
의식 전환이
필요하듯
기도도
기도의
의식 전환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올바른 판결처럼
우리 영혼을
해방시켜 줍니다.
그래서
믿음이 가고자
하는 길은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맡기는
기도의 길입니다.
기도는 이렇듯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며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태도이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입니다.
마땅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쁘게
받들어 실천하는
기도의 소중한
날 되십시오.
인내와
끊임없는 기도의
여정이 바로
인격의
보편적인
여정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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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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