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가나 평가전이 치러진 4일 밤 KBS, MBC, SBS는 일제히 경기를 생중계했다. 5.31 선거 이후의 국가적 핫이슈들은 몽땅 월드컵에 함몰되었다. 집권당의 참패원인을 놓고 당과 청와대가 책임공방을 벌이는 사이 국가의 진로는 암흑 속으로 표류하고 있다. 당은 부동산을 비롯한 주요 경제정책을 수정할 움직임을 보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방선거 결과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기존정책을 고수하겠다고 나왔다. 당의장과 최고위원들이 모두 사임한 우리당은 선장을 잃고 좌왕우왕하고 있다.
하지만 공중파 3사의 톱뉴스는 온통 월드컵으로 도배질을 했다. 선거뉴스는 기타 단신으로 전락했다. 월드컵의 마력은 대단했다. 선거로 분열되었던 나라가 하루 밤 사이에 하나로 뭉친 듯 했다. 2002년 4강 진출의 짜릿한 추억이 재생되었다. 흥분과 환호가 강산을 뒤덮었다. 2002년 4강 신화는 1%의 GDP 성장에 기여했다고 경제학자들은 말한다. 한쪽 면만 보면 월드컵은 좋은 것이다. 그것은 국민을 단결시키고 국력을 결집하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월드컵은 두 얼굴의 스포츠이다. 순 기능 못지않게 가공할 역 기능도 있다. 월드컵 열기에 취해 국가적 과제의 초점을 흐린 대표적 사례는 남미에서 볼 수 있다. 브라질은 월드컵에서 4번이나 우승하고도 개도국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선진국도 예외는 아니다. 독일은 1990년 아르헨티나를 꺾고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승리에 너무 취한 나머지 동독과의 통일에 따른 구조적 문제에 대처하는 일을 소홀히 하다가 큰 낭패를 보았다. 월드컵 우승 후 10년간 경제성장은 1.3%에 머물러 OECD 평균 성장수준에도 미달했다. 한국이 2002년 영광을 재연하기를 소망하지 않는 국민은 없다. 그러나 4강 혹은 16강에도 가지 못했을 때 나타날 후유증은 거의 망각하고 있다. 가나에 3대1로 패배한 후 벌써 실망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월드컵 열기는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스포츠 채널 ESPN과 록 밴드 U2는 월드컵이 평화를 가져온다고 법석이다. 한 광고는 “월드컵이 학교와 상점과 도시의 문을 닫고 전쟁을 끝낸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워싱턴 포스트가 의문을 제기했다. 월드컵은 평화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전쟁과 분열을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축구의 공격적 특성이 전쟁본능에 대리만족을 주지만 동시에 공격성을 고취한다고 주장한다. 하긴 영국과 독일은 1차 대전 중인 1914년 크리스마스 휴전을 선포하고 축국경기를 하기도 했다. 이 경기에서 영국은 독일을 3대2로 이겼다.
브라질의 축구황제 펠레가 출전하는 날 나이지리아는 비아프라 내전을 휴전하고 병사들로 하여금 펠레의 경기를 보게 했다. 축구 열기가 지나쳐 전쟁을 유발한 사례도 있다.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1969년 축구분쟁으로 전쟁을 일으켜 100 시간의 전쟁 끝에 2,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1990년대 발칸전쟁은 축구 때문에 일어났다. 베오그라드와 세르비아 축구팀의 경기과열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축구에서의 패배는 경제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패배소식에 주가가 폭락한 경우도 허다하다. 콜롬비아 수비수 안드레스 에코바르는 1994년 월드컵에서 미국에 지고 귀국하던 중 피살되었다.
모든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축구 월드컵도 스포츠이다. 스포츠는 본래의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면 비극을 초래한다. 군사정부 시절 스포츠, 섹스, 스크린 3S가 국민을 마비시킨다는 얘기가 있었다. 지금 국가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상식을 초월하는 대통령의 언동으로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는 가운데 월드컵이 진짜 이슈를 혼동시키는 역 기능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무엇보다 공중파 방송 3사가 월드컵 보도에서 도를 넘고 있다. 월드컵 뉴스에 열광하는 군중을 바보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월드컵 결과가 기대대로 나오지 않았을 때 마취에서 깨어난 군중의 반작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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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민심을 다른방향으로 돌리기위한 월드컵방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