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한 자료가 없는거 같아서 며칠걸려 정리해 봤습니다.😣
「 조선 전기 한양 시내에는 하루에 잡는 소만 100마리고 하루에 소주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미곡만 백섬이다. 」조선의 뒷풍경 中
'밥힘'으로 살아온 우리 조상님네들의 상다리 부러진 일상속으로 빠져 봅시다.

여기 한 남자가 밥을 먹고 있습니다.
상을 받은 이 남자는 아마도 집이 아닌 주막 같은 곳에서 밥을 먹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검고 야윈 얼굴과는 달리 그가 받은 밥상 위에 놓인 밥과 국의 크기는 상대적으로 너무나 커 보인다.
밥 그릇은 요즘 우리가 먹는 냉면 그릇만 하고
국 그릇은 칼국수 대접 이상 되어 보인다. 그런데 이것조차도 이미 상당히 먹은 후의 사진인 듯 하다. 과연 이 마른 사람이 한 끼에 이렇게나 많은 밥을 먹을 수 있을까요?

◆ 다블뤼 주교 - 조선 후기 제5대 조선 천주교 교구장을 지낸 프랑스 신부
조선시대 食문화에 대한 다블뤼 주교의 글을 보면 다소 극단적이다 싶을 정도로 당시의 大食 문화가 묘사되어있습니다.
『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량은 1리터의 쌀밥으로 이는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울 수 있는 양이다.많은 사람들이 2~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 치운다.
큰 복숭아를 내어 놓을 때 가장 절제하는 사람도 10개 정도를 먹으며, 종종 30개, 40개, 50개를 먹는다.참외를 먹을 경우 보통 10개 정도 먹지만 때때로 20개나 30개를 먹어 치우기도 한다. 』

◆ 1911년 식사대접을 받는 베버신부 일행
조선시대 그리고 이전 고려, 고구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밥” 위주 식사를 해왔다.
主食의 개념을 넘어서 영양소의 대부분을 “밥”으로 충당하게 된 것이죠. 보릿고개를 제외하고는 늘 이렇게 大食을 했다고 한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따르면 조선시대 사람들의 보통 한끼 밥의 양은 5홉(오늘날 기준 1.5홉), 하루에 한 되를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먹는 밥 한공기가 약 100~120ml 임을 감안할 때 조선시대 사람들은 한끼에 270ml로 약 2~3배에 달하는 밥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위의 사진을 봐도 족히 3~4인분은 될 듯한 식사량입니다.
※ 한 홉 = 약 180ml, 1.5홉 = 270ml, 쌀 한되 = 1.8039리터

“김홍도”의 그림에서도 조선시대 밥,국 그릇의 크기를 짐작케 합니다.
맨 위쪽 남자가 들이키고 있는 국 그릇의 크기는 세숫대야를 연상시키며, 아이가 들고 있는 술병의 크기 또한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찬은 거의 없이 밥으로만 영양을 보충했기에 밥의 양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연대별 밥공기 크기 비교
※ 용량은 그릇에 물을 가득 채웠을때의 기준이다.


세조 시대 선비 홍일동이 하루는 진관사에 놀러갔다가 밥 3바리(스님이 쓰는 나무로 된 큰 대접), 떡 1그릇, 국 3그릇, 두부 9그릇, 청포묵 9그릇를 한끼 식사로 먹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마을에서 대접을 받게 되자 삶은 닭 2마리, 생선회 1접시, 생선국 3그릇, 술 40잔을 마셨다.

「 왕은 하루에 드시길 쌀 3말과 꿩 9마리를 잡수셨는데 경신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하였다. 그래도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이 6말, 술이 6말, 꿩이 10마리다.
성안의 시장 물가는 베 1필에 벼가 30석 또는 50석이였으니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말하였다. 」- 삼국유사 무열왕기
「 조선 사람은 하얗고 명랑하며 대식사들이다.」
-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1532년 ~ 1597년)

「 풍년이면 음식을 아끼지않고 중국인이 하루 먹을 분량을 한번에 먹어치우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 조선시대 문신 이극돈의 상소中
「 우리나라 사람들오 다식에 힘쓰는 건 으뜸이다. 유구국(지금의 오키나와)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고 "항상 큰 사발에 밥을 퍼서 쇠숟가락으로 퍽퍽 퍼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라며 비웃었다. 」 - 이익의 성호사설

조선의 사신 이상공이 명나라 재상의 식사 초대를 받고 방문했는데 마침 일이 생겨서 명나라 재상은 조정에서 퇴근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상공이 기다리고 있으니 명나라 재상의 가족들이 사정을 이야기하고 기다리면서 먹으라고 술과 안주를 내줬다. 술과 안주를 먹다가 아직 식전이라고 돌아가겠다고 하니까 떡과 과일들을 내줬다.
그걸 다 먹고 다시 밥 먹으러 가야한다니까 고기등등 음식들을 내줬다. 그렇게 4~5번 음식을 내줬는데 다 먹더니 도저히 안되겠다고 밥먹어야겠다고 돌아갔다.
명나라 재상이 돌아와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더니 조선 사람은 밥을 아니 먹으면 굶는다고 여기니 내 밥을 대접하란 말을 잊었노라"라고 후회했다고 한다. - 서유문의 무오연행록

「 한양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량이 얼마나 있는지 조선에서 첩자을 보내 알아왔다. 조선군의 식사 기준으로 계산하니 1달치 정도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1달만 버티면 왜군들이 물러가리라 생각하고 성앞에 진을 치고 한달을 기다렸는데 한달을 기다려도 왜군이 후퇴하지않자 결국 공격하여 쫓아냈는데 왜군 진영에서 나온 밥그릇이 조선군 밥그릇의 1/3 임을 알고 '이 놈들이 오래 버틸려고 김치 종지로 밥을 먹었구나.'라고 생각했다. 」- 오희문의 쇄미록

「 조선인들은 투박한 탐식과 식욕을 가진 대식가이다. 평소 그들의 식사 방법이 이를 잘 보여주지만 무엇보다 그들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점에서는 대신이건 평민이건 구별이 없다.
많이 먹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며 질보다는 양을 중시한다. 조선인들은 식사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식사하는데는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수다를 떨지 않는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량은 1리터의 쌀밥으로, 이는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운다. 각자가 한 사발씩을 다 먹어치워도 충분하지 않으며 계속 먹을 준비가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2, 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 치운다. 우리 천주인들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30세에 45세 가량되는데 그는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이것은 그가 마신 막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계속)

64세에서 65세가 다 된 어떤 사람은 식욕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5사발을 비웠다. 10사발을 감당할때 장사라고 말한다.
소를 잡을 일이 있어서 소고기가 마음껏 제공되면 아무도 고기로 꽉찬 접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일을 대접할 경우 예를 들어 큰 복숭아를 내놓을때에 가장 절제하는 사람도 10개 정도는 먹으며 종종 30개, 40개, 50개를 먹는다. 참외를 먹을 경우 보통 10개정도 먹지만 때때로 20개나 30개를 먹어 치우기도 한다.(계속)

누군가를 잘 대접해야 할 때는 닭 한마리를 통째로 내놓는다.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말할 필요도 없이 각자가 그것을 다 먹어 치운다.
쇠고기나 개고기도 큼직하게 실어서 양껏 내놓는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고기를 먹었다고 여긴다. 특히 곱창과 생선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이다. 」 - 다블뤼(Daveluy, 안돈이) 프랑스 주교

< 아래는 구다 소설가 '윤민혁'의 조선 시대의 대식 문화 관련 글이다. >
조선 시대의 1홉은 60cc로 현대의 1/3이하이다. 7홉은 420cc로 현대 한국인이 먹는 하루 쌀 분량과 거의 맞먹습니다.(현재 밥공기로 5공기에 해당)조선 시대 기록으로는 어른 남자 7홉, 어른 여자 5홉, 아이 남녀 3홉으로 한끼를 먹었습니다.
아이들이 먹는 양도 180cc로 현대 한국인의 일반적인 식사량인 120~150cc보다 많습니다. 근거 자료는 17~18세기 이후 나온 수많은 각 가문별 쌀 소모 기록들과 성호사설, 그리고 흥부전입니다.
선조때는 달랐지않을 수도 있느냐로 묻는다면 기근이 있을때마다 조선 조정 관원들이 개탄하는 지나친 대식 풍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계속)

심지어 극심한 식량난으로 수군 자체가 와해 직전에 있던 1594년에도 이순신은 "하루 쌀 5홉이하로 먹이고 있는데도 모자라니 이대로 가면 몇달 이후로는 식량 보급 불가"라고 보고하기도 했다.
즉 현대인의 두배 가까운 밥을 병사들에게 먹이고 있었는데도 병사들이 굶주려서 싸울수가 없었다고 한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조선은 생산력이 됐기 때문에 이런 기이한 현상을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고기를 디지게 먹고 살은 배가 찢어지게 먹어댔습니다.
가능했으니 먹는 건 당연하고 그건 흠이 아닙니다. 다만 그걸 전부 무시하고 "우리가 망한건 가난해서다" 타령을 하는 건 용납하기 힘듭니다. 가난의 범주를 제대로 지적한다면 모르지만 아니라면 우리는 적어도 굶주릴 일은 없었다는 말 한마디로 때려지우고 말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15~17세기에 있었습니다. 조선의 쌀 생산량은 19세기나 지름이나 같습니다. 농업 생산력의 강도가 3배까지 강화된 지금인데도 경지 면적면에서 조선 전체와 지금 한반도 경지 면적을 대비해보면 오히려 지금의 농업 생산 규모는 조선보다 작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정도의 생활 수준이였던 일본 농민들이 먹는 것에 비해서 조선 농민들은 거의 3배이상 먹었습니다. 그것때문에 서울 탈환이 어렵겠다고 투덜대는 조선군 탐보군관 이야기가 실록에도 실려 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임란전만해도) 그 대식성을 충분히 만족시킬만큼 생산력이 뒷받침되었다.
첫댓글 이야..정리잘해주셨네요 재밌게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밥 그릇 크기가 상상을 초월하는 군요. 저게 다 들어가니 먹었겠지요? 세 끼니를 다 저런 식으로 먹었다면 현대인 3일치 이상은 될 듯
근데 저 어릴때만해도 진짜 엄청 큰 스텐 밥그릇에 밥 먹었었어요...
흠... 우리의 옛 왕조국가들이 타국을 침략하지 않았던 것이 어찌보면 보급의 문제도 있었지않나 싶네요 ㅎㅎㅎㅎ;;; 국경을 넘기도 전에 준비한 군량이 다떨어졌....덜덜덜 ㅋㅋ;; 조상님들이 대식가들이셨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때놈들과 왜놈들은 이미 예전에 아주그냥 막그냥 ㅋㅋㅋㅋ 재밌게 읽으면서 별의별 상상을 해봅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기없이 반찬1-2개 정도 먹고 빡쎄게 노동하면 저렇게 밥이 들어가요.. 집반찬 귀찮어서 김치에 짱아치에 먹으면 3그릇먹고 배고퍼요 나가서 백반식당은 공기1.5개가 한계던데요..조상님들이 경운기도 없시 농사지을려니.... 채소반찬에 밥먹고 고생했겄네요..지금은 시골에도 수고했다고 놋그릇에 커피는 않타것죠
조선시대 문화는 기본이 각상 입니다. 겸상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죠.
해서, 아랫사람과 겸상하지 않는 것이 미덕으로 (예, 밥 먹을 때는 개도 안건드린다는 속담에서 보여지듯 먹을 때 만큼은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문화가 일반적이었다는 것이죠)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6.25 이후에도 한동안 이런 겸상하지 않는 문화가 일반적이었는데 60~70년대를 거치면서 한밥상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현재의 일반적인 같이 먹는 문화가 생긴거죠.
대식 문화가 딱히 좋은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요즘 우리나라 보면 다시 대식 문화가 생긴듯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