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5일(목)
* 시작 기도
주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좇아다니면서 흠을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는다고 지적했습니다.
그것도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때 주님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너희들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구나,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곧 너희가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 것이라고 일갈하신 것입니다.
제가 바로 그런 자입니다.
장로들의 유전인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린 자입니다.
나를 주의 공의로 심판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심판이 나를 살리는 기회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오늘도 주안에서 살기 원하오니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허락하소서.
아버지와 아들 안에서 영생의 교제를 통하여 그 나라를 바라보기 원합니다.
세상의 것 의지하지 않고 성령 안에서 주님만 붙들게 하소서.
지금 안성 사랑의교회 수양관에서 복음생명캠프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참석한 분들의 영안을 열어주시고 그 눈이 만물 안에서 만물 위로 올라가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도우소서.
섬기는 스탶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부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하 15:27-38
제목 :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27 유다의 왕 아사랴 제50년에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20년간 다스리며
28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9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30 웃시야의 아들 요담 제20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31 베가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32 이스라엘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 제2년에 유다 왕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니
33 나이가 25세라. 예루살렘에서 16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루사라. 사독의 딸이더라.
34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35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
36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37 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38 요담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나의 묵상
북이스라엘 왕 므나헴이 죽고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그는 2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나 그 역시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
그는 베가에 의해 살해당하고, 베가가 그를 이어 왕이 되었다.
베가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20년간 다스렸는데, 그도 역시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
베가 당시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그 땅을 침략하여 여러 성읍을 점령하였다.
곧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가 점령당했다.
그리고 그 땅의 거민들이 앗수르의 포로로 끌려갔다.
여기서 이욘, 아벨벳 마아가, 야노아, 게데스, 하솔은 북부 갈릴리에 위치하였고 길르앗은 요단 동편에 위치하였다.
유다 왕 웃시야의 아들 요담 20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베가를 살해하였다.
그리고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 된다(왕하 17:6).
한편 유다에서는 이스라엘 왕 베가 제2년에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었다.
그는 25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16년간 다스렸다.
요담은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
그러나 산당을 제거하지 않아 백성이 여전히 그곳에서 제사하고 분향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였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를 보내어 그를 치셨다.
요담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었다.
34절에는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역대기 기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상술하고 있다.
(대하 27:2)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
이 말은 요담의 아버지 웃시야가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직접 분향하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나병이 발병한 것을 요담이 보았다.
그 일로 인하여 아버지 웃시야는 별궁에 거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담은 아예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고 제사장 직분을 침해하는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부왕 웃시야의 범죄로 인한 고난이 요담에게는 범죄를 막는 요소로 작용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웃시야가 하나님의 징계로 걸린 나병은 웃시야 본인에게는 물론 그의 아들인 요담에게도 분명 고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담에게는 이 고난이 오히려 약이 된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웃시야가 망령된 죄를 저지르는데 하나님이 이를 간과하셨다면 요담도 얼마든지 동일한 죄를 저지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웃시야의 죄에 대해서 엄히 벌하시자 요담은 그것이 무서운 죄인 줄 알고 감히 성전에 들어가서 분향하는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죄에 대하여 항상 깨어 있고 경각심을 가지는 자가 그렇게 할 수 있다.
북이스라엘의 열왕들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하나 같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다고 성경은 고발한다.
여로보암의 길을 걷는 것은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시는 것을 그들은 알면서도 굳이 그 길을 걷는 것은 그 걷는 길이 주는 거스를 수 없는 매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매력이란 다름 아니라 지금 당장 나의 육신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매력이다.
여로보암의 길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유사신앙의 길이다(왕상 12장).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고 굳이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는 편의주의 신앙을 제공하였다.
또한 제사장은 반드시 레위 자손으로 삼아야 하는데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다.
어쩌면 일반 백성들도 제사장이 되어 그 거룩한 일을 수행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그런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일이 여로보암의 죄악 중에서 큰 죄에 속하였을 것이다.
또한 절기를 비슷하게 지정하여 분향하게 하였다.
이런 여로보암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거역할 정도로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19명의 왕들이 모두 그 길을 걸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담은 부왕인 웃시야가 받은 징계를 통하여 그가 자기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걸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인 징계가 임할 때 그것이 반드시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된다.
아니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증언한다.
인생 말년에 온갖 추한 일을 저질렀던 솔로몬이 잠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잠 3:11-12)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또한 시편의 한 무명의 시인 역시 이런 고백을 한다.
(시 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 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사도 바울도 성도들이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한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롬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는 고난 받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신앙을 정화시키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르게 하는 방편은 없다는 말이다.
오죽하면 히브리 기자는 솔로몬의 말을 빌려 이렇게까지 이야기 하겠는가?
(히 12:5-11)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영생)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를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고난의 길을 결코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얼마든지 그 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주시는 고난의 쓴잔을 그대로 받으셨다.
이는 당신이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다 뒤집어쓰시고 친히 죄가 되셨기 때문이다(고후 5:21).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주님께 다 전가시켰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죄만 배출시키는 죄인들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법정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하셨고 또한 그 의인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은 것은 분명히 맞다.
하지만 우리는 죄만 내어놓는 죄인이요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우리의 실상을 알고 주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고백은 이것이다.
“주님, 나는 주께서 지금 지옥으로 던지셔도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 나를 살리셨고 그 은혜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살고 있음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무슨 큰 일을 해서 당당함이 아니라 면목 없음과 죄송함으로 나아가되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 품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는 파레시아로 나아갈 뿐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이것이 나의 실상이요 나의 현재의 모습입니다.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요 지금 당장이라도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마땅한 자입니다.
그런 나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나의 모든 죄를 사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진정한 뜻을 알지도 못한 채 내 마음대로 자행자지했던 자임을 고백합니다.
그런 나를 영생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징계를 보내셨습니다.
그 징계를 통하여 나는 복음을 알게 되었고 생명으로 나아갑니다.
오늘도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납작 엎드리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이 교제와 사귐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