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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리더십] [3]
이순신 전라좌수사 발탁의 진상
역모 연루된 정언신 문안 뒤 일시 좌천 이어 전라좌수사로
파격적인 등용 지시한 선조는 사간원이 반대하자 엄하게 지시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이순신에 바다 맡기고 신임 과시
임진왜란, '준비 없이 맞은 전쟁' 아니었다
"세종대왕, 회의 때마다 싸움 붙였더니… 조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창의적 인재 쏟아진 시대
장영실·성삼문·이천…
한글·농사직설·측우기…
최고 인재와 발명품 나와
- '박스 사고' 밖으로
경험이 만든 박스 사고
틀 벗어난 생각 어려워
박스 밖을 보는 게 '창의'
- 세종이 창의적인 이유는
늘 문제를 찾아다니고
신하들 반대의견에 관대
회의마다 마찰 만들어
더 좋은 방안 마련 고민
이런 질문 해본 적이 있는가?
왜 세종조에는 유독 창의적 인재가 많았을까?
과학으로는 이천과 장영실, 학문으로는 성삼문 같은
집현전 학자들, 음악에는 박연, 관료로는 황희,
그리고 국방으로는 대마도와 여진족 정벌에 성공한 최윤덕과 6진을 개척한 김종서….
하늘은 이 시대에만 창의적 인재를 쏟아부어 주신 것일까?
'박스 사고'에서 벗어났던 리더 세종
이런 의문은 조직의 창의성을 도대체 무엇이 결정하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결론은 리더의 창조 습관에 있다. 리더가 나서서 창조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주위를 창의적이 되도록 하는 리더의 사고 습관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세종조에만 인재가 특별히 많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세종이라는 임금만의 창조 습관이
당시의 사람들을 창의적으로 변모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면 리더의 창조 습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여기에 대답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그래서 반대로 질문을 해보자.
리더의 창조 습관은 어떤 경우에 사라지는가?
바로 '박스(box) 사고'를 할 때다.
우리는 누구나 라면 박스 같은 것을 머리에 하나씩 이고 산다.
그런데 이것은 투명하다.
그래서 마치 아무것도 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누구나 이것을 하나씩 이고 있다.
박스는 왜 생기는가?
자신의 경험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 밖으로 나가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창의적인 사람은 바로 이 박스 밖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런 리더가 있으면 국가나 기업의 창의성은 폭발한다.
도대체 박스 밖을 무슨 수로 보는가?
세 가지가 있다.
이 세 가지에 가장 능숙했던 사람이 바로 세종이다.
1. 창조적 요동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라
창조적 요동이란 '문제'를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 같이 생각해 볼 것이 하나 있다.
여러분은 이런 경우 어떤 선택을 하는가?
커피 믹스도 있고 컵도 있다.
그리고 뜨거운 물도 있다.
그런데 커피를 저을 막대나 스푼이 없다.
10명이면 8~9명이 커피 믹스 봉투로 저어서 먹는다.
이때 세 종류 사람이 있다.
아무 문제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이 사람들은 절대 창의적일 수 없다.
두 번째 부류는 저어서 먹지만, 찝찝하게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창조에 2% 부족하다.
세 번째 사람이 있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를 느끼고 다른 대안이 없을까 골몰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관찰한다는 것이다.
실제 커피 믹스 봉투로 저어보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본다.
이제 그는 봉투를 안 써도 약간의 물을 넣고 컵을 돌려 커피를 섞은 뒤
물을 더 넣으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사람이 창의적인 사람이다.
이런 사람만 창조적 요동을 경험하고 있다.
왜 세종은 그토록 창의적인 리더가 되었는가?
'문제'를 보는 눈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왜 세종이 아닌 다른 왕들은 한글을 못 만들었을까?
세종조 이전의 어느 왕도 우리말이 한자와
맞지 않는다는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세종의 하루 일과는 특이했다.
오전 5시에 기상한 후 9시에서 11시까지 한 일이 있었다.
바로 윤대(輪對)다.
누군가와 돌아가면서 독대를 하는 거다.
영의정 또는 우의정 같은 고위층과 독대한 것이 아니다.
지금으로 치면 사무관 이하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 1시부터 3시까지는 경연을 했다.
신하들이 임금을 가르치는 자리다.
이때 특이한 방법을 사용했다.
나이 든 관료들과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을 동시에 참여시켰다.
만날 "아니 되옵니다"만 외치는 고위 관료들과 달리
젊은 학자들은 세상을 어떻게 볼까 궁금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세종은 고위 관료와 젊은 학자 사이에 갭(gap)을 발견했다.
이게 바로 문제를 보는 눈이다.
'갭=문제'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저녁 10시에서 12시에는 구언(求言)을 했다.
백성으로부터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세종은 지독히도 문제를 찾아다니는 사람이었다.
왜일까?
내 생각이, 그리고 당대에 통용되던 방법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는 내가 진짜 문제를 못 보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 즉위 후 수년 동안 나라는 가뭄에 시달렸다.
보통의 왕 같으면 아마도 기우제를 지내 자신의 부덕을 고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종의 처방은 달랐다.
문제의 근원은 중국의 역법(曆法)이 조선의 상황에 맞지 않으며
농사짓는 방법이 잘못된 데 있다고 생각했다.
전혀 다른 시각에서 문제를 본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집현전 학자들에게 새로운 역법을 만들 것을 주문했고,
동래현 관청의 노비였던 장영실을 등용해
하늘을 관찰하는 천문 기구를 만들게 하였다.
그는 농사직설이란 책을 짓게 했다.
책의 내용은 전국의 베스트 농부들의 노하우를 정리한 것이다.
가뭄이 극성을 부리던 강원도를 그는 수시로 방문하면서 농부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고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이를테면 전라도 지역의 아무개가 농사를
기가 막히게 잘 짓는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이런 것을 모은 것이 농사직설이다.
어떤 리더는 자신의 조직에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는 걸 무진장 싫어한다.
항상 문제 '프리(free)' 상태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박스 사고다.
창의성이란 문제를 보는 사고에서 시작한다.
창조적 요동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창의적인 사람들은 없던 문제도 만들어 낸다.
그런데 문제를 싫어하는 박스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문제가 드러나면 야단부터 친다.
이런 기업에서는 구성원들이 문제를 숨긴다.
당연히 기업은 집단적인 박스 사고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문제는 숨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드러내 해결하는 대상이다.
이것을 앞장서서 하는 사람이 바로 리더다.
2. 창조적 다양성을 수용하라
세종의 다음 박스 사고 탈출법은 반대 의견에 관대하기였다.
역사상 세종조만큼 반대를 많이 한 신하들이 득실거리던 때도 없었을 것이다.
사소한 문제부터 큰 것까지 그는 온통 반대를 이고 살았다.
그의 반대에 대한 관용은 도(道)의 경지에 이르렀다.
한글 반포 후 최만리가 반대했을 때는 도가 지나쳐 세종도 화가 났던 모양이다.
그런데 죄를 묻는 방식이 귀엽다.
하루만 상징적으로 옥에 가두고, 다음 날 빼주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가 가끔 듣는 말 중에 "참 고약한 사람이야!"가 있다.
일설에 의하면 세종조에 있었던 고약해(高若海)라는
신하 때문에 만들어진 말이라고 한다.
이후 반기를 드는 사람들을 세종은 "고약해 같은 놈"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실록에 의하면 고약해의 반기를 드는 정도가 지나쳤다.
눈을 부라리며 세종을 노려보는 행동은 차라리 귀여운 것이었다고 한다.
보란 듯이 휑하니 나가기도 했다.
그래도 세종은 그를 대사헌이라는 자리까지 올려주었다.
왜 그랬을까?
그래야 다른 신하들도 용기를 내어 말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종은 반대가 주는 다양성의 의미를 깊이 알고 있었다.
3. 창조적 마찰을 활용하라
셋째 방법이 재미있다. 그는 회의를 하면 꼭 싸움을 붙였다.
창조적 마찰을 조장한 것이다.
사용한 방법은 '견광지(絹狂止)'였다.
'견'은 '하지 말자'라는 뜻이 있다. 반대라는 것이다.
'광'은 '해보자'라는 뜻이 있다.
찬성이라는 말이다.
둘 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지'는 잠깐 쉬어 다시 생각해 보자는 뜻이다.
경연에서 고위 관료들은 대체로 "아니 되옵니다"를 외쳤다.
집현전 학자들은 "해 봅시다"라고 우겼다.
세종은 어느 한쪽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왜 안 된다고 하는지,
그리고 왜 해볼 만하다고 하는지,
그래서 이 둘을 통합할 방법은 없는지를 고민했다.
창의적인 기업이 되기 위해 무엇이 중요할까?
구성원들이 창의적일수록 당연히 좋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리더의 창조 습관이다.
"다 버려라… 핵심만 빼고"
바쁜 건 나쁜 것… '에센셜리즘' 저자 그렉 맥커운의 조언
삶에서 직장이 가장 중요한 한 남자가 있었다.
아내가 병원에서 딸을 출산하던 때도 그는 안절부절못한 채 복도를 서성였다.
그의 정신은 다른 곳에 있었다.
아내가 지친 팔로 아기를 안고 있을 때조차
그는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는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직장 상사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미안한 얼굴로 아내를 한 번 쳐다보고, "바로 가겠다"고 답했다.
상사는 그를 칭찬했다.
"고객들이 자네를 대단하다고 여길 거야."
하지만 그는 회의에 참석한 어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오히려 안절부절못하던 자신을 고객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는 화가 났다.
직장을 위해 헌신하려고 했지만, 결국 가족의 마음에는 상처를,
고객과의 관계에서는 불편함을 남겼다.
대신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삶의 우선순위를 스스로 정해놓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내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게 된다.
컨설턴트인 그렉 맥커운(Mckeown·38)은 그날 이후
왜 똑똑한 사람들이 일과 삶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지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됐다.
그리고 지난해 '에센셜리즘(Essentialism)'이란 책을 썼다.
글로벌 리더 150명의 특징을 분석한 전작 '멀티플라이어'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그는
이번 신작을 통해 성공하기 위해선 '본질적인 소수'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에센셜리즘은 '더 적게, 하지만 더 좋게'의 사고방식을 실천하는 삶을 의미한다.
그는 "삶의 지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데 있다"고 조언한다.
캘리포니아주 팰러앨토의 한 호텔 로비에서 맥커운 씨를 만났다.
고향 런던을 떠나 미국에 산지 10년이 지났지만,
대화 중간에 섞인 약간의 영국 억양이 매력적이었다.
―에센셜리즘이 무엇인지 설명 부탁 드립니다.
"가장 중요한 일들을 선별적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다 하려는 생각, 모든 사람의 요청을 수용하려는 생각을
멈추어야 정말로 중요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시간 관리 방식을 바꾸거나,
읽지 않고 지우는 이메일의 숫자를 늘리는 것 정도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나는 제대로 된 중요한 일에 나의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고 있는가?'라고
자신에게 계속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은 일과 기회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중 대부분은 사소한 것일 뿐, 정말 중요한 것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에센셜리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많은 일과 기회 중에서
정말로 중요한 소수를 가려내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부인이 딸을 낳을 때 많은 것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다음과 같은 의문들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우리는 저마다 지닌 잠재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선택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과 잠재력을 더욱 크게 활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고민은 너무나 크고 중요해
저는 스탠퍼드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새롭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책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는 비(非) 에센셜리스트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모든 일을 억지로라도 일정에 끼워넣어 해내면
다 해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 진실이 아닙니다.
이런 식의 삶을 지속하다 보면 첫 번째로 스트레스를 받고,
두 번째로 지치고, 세 번째로 원치 않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살다 보면 결국 생각할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고,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궁리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50년간 이런 인생이 옳다고 믿어 왔습니다.
사회가 계속 그렇게 말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인생은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매우 바쁘게 삽니다. 우리는 비 에션셜리스트인가요?
"이 세상 어느 나라보다 한국 사회는 열심히 일하면
뭐든지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든 국가가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사회는 '바쁨'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합니다.
저는 최근에 한 여성을 만났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자 그녀는 활짝 웃으면서
'요즘 너무 바빠 죽겠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치 바쁘다는 걸 자랑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어 그녀는 '나는 2주 동안 매일 밤 4시간밖에 못 잤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가
바쁘다는 사실로 증명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
그는 마치 강연을 하듯 속사포 같은 열변을 이어갔다.
"이것은 일종의 버블(bubble)입니다.
인터넷 버블과 부동산 버블이 터지면서
2000년과 2008년 경제를 망가뜨린 적이 있듯
오늘날에는 '바쁨의 버블'이 존재합니다."
―'바쁨의 버블'은 무슨 뜻인가요?
"모든 버블은 사람들이 실제보다 높은 가치로 어떤 대상에 대해 평가할 때 발생합니다.
그린스펀이 말한 비이성적 과열이죠. 하지만 모든 버블은 언젠가 터지고,
그동안 숨겨져 왔던 비용이 드러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은 '그동안 의미 없는 것에 내 인생을 바쳤구나.
그동안 평생 힘들게 살았는데,
진정 행복한 게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살기 힘들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만약 제가 게으르다면 어느 정도 수준의 삶도 영위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한계점이 있습니다.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열심히 일한다 해도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저 피곤하고 불행해질 뿐입니다."
―책에 '성공의 역설'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에 대해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왜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들이
그다음 단계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할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했습니다.
성공하기 전까지 소수의 선택만 주어지기 때문에 몇 가지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뒤에는 '일을 믿고 맡길' 사람이라는
좋은 평판을 얻기 때문에 많은 기회가 생깁니다.
처음에는 긍정적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기회가 많아진 만큼 에너지가 분산되고,
포기하지 못하는 일이 많아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맨 처음의 성공이 결과적으로
성공을 방해하고 실패로 이어지는 촉매가 되는 겁니다.
성공은 자칫 '규율이 없는, 많은 것에 대한 추구'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무리한 요구는 우아하게 거절하라
―책에서 쓸데없는 요구는 거절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직장 상사 요청에 '아니오'라고 말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거절의 기술이 있나요?
"물론 거절하는 게 언뜻 이기주의나 방종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나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고요.
이를 위해 저는 '아니오'라고 말하기보다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아한 거절(graceful no)'법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가 지나친 업무를 줄 경우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요.
'지금 5가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 잘(good) 할 수 있지만,
4개의 업무라면 훌륭하게(great)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걸 원하시나요?'라고요. 태도와 말투도 중요합니다.
망설일 필요 없이 간결하게 의사를 전달해야 상대방도 기분 상하지 않고
당신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낳는 아내의 곁을 지켜주지 못해 '실패'를 경험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일이 더 에센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일을 선택하는 게 맞나요?
"한 호스피스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임종을 앞둔 사람들에게 '무엇을 후회하나요?'라고 물었을 때
대답은 대부분 비슷했다고 합니다.
사회가 원하는 일만 했을 뿐 스스로 진정으로 원하는 일은 못한 것과
이 때문에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친구는 생일날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포기하고 일을 했습니다.
그런 결정을 할 당시에는 그게 맞는다고 느끼겠지만,
버블이 터지면 결국 후회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책에서 이런 주장에 대해 강조하진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가치관은 다르니깐요."
―하지만 성공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희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일 이외의 가치를 우선시하면서 일에서 성공을 거두기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성공이란 건 상당히 주관적이고 불안한 개념입니다. 인생을 놓고 보았을 때
사회적인 성공이 얼마나 큰 행복을 주는지에 대해
우리는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화목한 가정과 좋은 친구가 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담론은
아직 우리 사회에서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자신이 세운 컨설팅 회사 대표인 맥커운 씨는 네 명의 아이의 아버지다.
기자와의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걸음을 재촉하며 빠르게 걸어나갈 정도로 치열하게 살지만,
매일 아침 반드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인문학 서적이나 성경을 읽는다.
"제게 가장 에센셜한 가치는 가족과 종교입니다.
이 두 가지를 지키기 위해 오늘도 바쁘게 살 뿐, 바쁜 삶 자체가 제 우선순위는 아닙니다."
"18세기 스웨덴… 중국까지 항해 한 번으로 국가 GDP만큼 벌었다는데…"
"이봐 김 마담, 이번에 인천에 배만 들어오면 말이야, 내가 다이아 반지 하나 해 줄게."
50년대와 60년대,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허장강의 명대사다.
허풍쟁이라면 한 번쯤 따라 했던 복고풍 작업 코멘트의 전설, '인천에 배만 들어오면….'
하지만 무역의 역사는 이런 대사가 결코 헛소리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돈은 배와 함께 들어왔고, 배는 대박의 설렘을 안고 거친 바다를 오갔다.
기원전 450년경 고대 아테네는 시칠리아와 이집트에서 곡물을,
스페인과 흑해에서는 염장(鹽藏) 생선을 수입했다.
와인과 생활용품, 각종 공예품을 가득 싣고 나간 배가
밀 400t을 싣고 입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니
해양 무역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무역은 선주와 무역상 그리고 투자자라는
세 주체가 컨소시엄을 이뤄 주도했다.
무역상은 배의 일정 면적을 빌려 수출입을 동시에 진행했는데,
화물을 담보로 투자자로부터 돈을 빌렸다.
아테네의 무역 거래는 증인 입회하에
구두 형태로 이뤄져 그 전모를 파악하기 쉽지 않지만,
다행히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란 투자자가
원고로 나선 송사(訟事) 기록이 남아 있다.
뉴욕대학의 라이오넬 카슨(Lionel Casson) 교수는
그의 책 '고대 무역과 사회(Ancient Trade and Society)'에서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아테네의 투자자는 선주나 무역상의 배나 화물을 담보로
(저당가는 시가의 50%) 돈을 투자했는데,
이자율은 3개월에 평균 67.5%였고 100%가 넘는 경우도 허다했다.
당시 아테네에서 부동산 투자는 연 8%, 예금은 약 10%, 우량 채권은 10~12%,
비우량 채권은 16~18%, 제조업 수익률은 20%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무역에 100을 연초에 투자했다면 1년에 네 번 무사히 배만 들어온다면
연말에 무려 787이라는 엄청난 원리금을 기대할 수 있었다.
물론 배나 화물이 사고로 사라지는 경우엔 전액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피소된 무역상은 와인 단지 3000개를 담보로 돈을 투자받았는데,
조사 결과 3000개가 아닌 450개만 싣고 떠났으며,
해외에서 물건을 싣고 와서는 다른 곳에 하역하고
그 화물이 태풍 때문에 사라졌다고 거짓 진술한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이 송사 기록에는 또 데모스테네스 부친이
돈을 어떻게 굴렸는지에 대한 대목이 자세히 나오는데,
당시 아테네 부자들은 유동 자산의 약 20%를 해양 무역에 투자하고
'아테네항에 배 들어오길…' 학수고대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18세기 초, 프랑스로 배경을 바꿔 보자.
여행가이자 작가였던 장 로크(Jean de la Roque)는
프랑스 동인도사 소속의 배 3척을 이끌고
1년 항해 끝에 1708년 예멘의 모카(Mocca)항에 도착한다.
그는 아프리카를 돌아 홍해로 가는 항해 길을 연 첫 프랑스인이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예멘에서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프랑스로 수입되는 커피를
중간 상인 없이 예멘 생산자와 직거래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 의사들은 커피가 인체에 해롭다고 경고하면서
정부에 수입 금지를 요구하는 상황이었지만,
로크는 오히려 커피 시장에서 유럽의 미래를 보았다.
그는 세계의 커피 독점 공급 기지였던 예멘에서
인도 중간 상인에게 사기당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지만,
6개월 동안 현지에서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마침내
커피 600t을 구입해 프랑스로 금의환향하게 된다.
그의 배가 마르세유항에 들어오면서 프랑스의 카페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단 한 번 거래로 그는 엄청난 돈방석에 앉았다.
2년 뒤 그가 다시 모카를 찾았을 때 그는 예멘의 왕과 식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인 1743년 3월, 스웨덴의 범선 예테보리호는
예테보리항을 떠나 중국으로 세 번째 항해를 시작한다.
자바섬을 지날 때 선원 21명이 괴혈병으로 숨졌지만, 남은 선원 120명은
1744년 9월 마침내 중국 광저우(廣州)에 도착한다.
이들은 배에 실어온 약 250만 스페인 은원(백은)을 들고 중국 무역상에게 달려가
차, 도자기, 비단, 진주 등 유럽인들이 꿈에 그리는 상품 700t을 사고는
다시 9개월 항해를 거쳐 고향 앞바다에 도착한다.
가족들의 환호성에 뒤덮인 부두를 불과 1㎞ 앞둔 예테보리호는 그러나 암초를 들이받고 침몰한다.
리궈룽(李國榮)의 저서 '제국의 상점'에 따르면 배가 가라앉자
선원들은 화물의 일부(약 3분의 1)를 급히 건져 탈출했는데,
그것만으로도 항해에 든 모든 비용과 심지어 선박 건조 비용까지 남겼다고 한다.
이 배가 1차 항해에서 번 돈이 당시 스웨덴의 GDP와 비슷했다고 하니
'예테보리항에 배만 들어오길…' 기다렸던 스웨덴 사람들의 기대와 염원이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무역은 세상을 바꾸었다.
질병과 풍랑, 해적과 싸우며 거친 바다를 누볐던 무역상들이야말로
오늘의 우리를 있게 만든 역사의 주역이다.
오늘 인천에 배 들어오는 모습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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