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가을의 끝무렵에 한해 운동의 결실을 맺는 행사로 전북역전마라톤이 있다.
어느덧 15년 연속으로 참가를 하게 되어 더없이 큰 영광인데 언제까지 이렇게 선수로 뛸 수 있을런지는 알수가 없다.
어쩌면 올해가 그 마지막이 될수도 있고...
이 대회는 누구하고 친분이 있거나 영향력이 있다고 나갈수 있거나 돈으로 신청해서 참가하는 그런 성격이 아니고 철저히 달리는 실력에 의해서만 좌우되기 때문에 기량을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자 유일한 요소이다.
그런데 올해부터도 선수로서의 지위는 흔들흔들 곡절이 많았다.
김제팀에서 새로운 맴버를 영입해 온 바람에 처음부터 코치로 강등(?) 된다는 얘기가 나돌았는데 적어도 올해는 나름 준비를 많이 했기에 그런 소리를 들을때마다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고향이지만 현지에 연고가 말라버린 터라 이럴때마다 비가비 신세가 되는건 아닌지 하는 피해의식도 들고... 그렇다고 실력이 출중해서 그런 논란을 완전히 잠재울만한 처지도 아닌지라...
첫날 6개 소구의 맴버로는 끼지를 못하고 둘쨋날도 그냥 어지간하면 계속 선수들 코치나 하게 된 판이었는데 정말로 곡절끝에 첫소구를 얻어서 달릴 기회가 주어졌다.
이번이 마지막일수도 있다는 절박함과 역전마라톤 특유의 긴박감이 겹치며 여름내 흘렸던 땀방울이 다 말라붙는다.
탄천에서 5Km지속주를 30차례나 이어오며 기반을 다졌고 가장 최근엔 런닝머신에서 최고속도로 5Km까지 수월하게 지속을 할 정도까지 몸을 만들어놓지 않았던가!
첫날 김제팀은 종합합계로 6위를 기록했다.
군산, 전주, 순창, 임실, 익산, 김제, 장수, 정읍, 남원 등의 순서인데 앞서가는 익산과는 불과 12초 차이이고 뒤따라오는 장수와 정읍은 각각 1분30초와 2분 내외로 우리팀을 추적해오는 상황.
앞으로 따라잡을 가능성은 적어도 뒤에서 추월당할 위험이 높다보니 둘쨋날 9개나 되는 소구간 어느 한곳만 문제가 생겨도 와르르르 입상권 밖으로 밀려날 터라 상황이 아주 긴박해졌다.
당초 짜왔다던 오더에서 일부를 수정하게 되었고 그 덕에 경험이 많고 실패가 없었던 내가 투입이 될 수 있었던 것. 휴~!
순창군청에서 출발해 인계면사무소까지 5.5Km의 구간인데 시군별 선수를 보니 일단 최악은 면한 듯.
순창에는 밤새 가을비가 내리고 아침까지 이어져 길바닥은 다 젖어 있고 운무가 짙게 끼어 습도는 높지만 기온은 달리기엔 적당한 10℃ 남짓을 가리키고 있다.
군청 앞 뚝방 인도 투수콘길에서 워밍업을 20분 남짓 하는 동안 완주의 전준수를 비롯한 타시군 선수들과 어울리게 된다.
다들 한때는 시대를 풍미했던 대단한 고수들인데 달리는 사람들이 늘 만날때마다 하는 얘기가 그렇듯 어디가 부상이니 운동을 못했느니 조깅만 해도 다행이니... 죽는소리들이 많지만 하나도 믿을게 못되지.
출발 총성만 울리면 방금전까지 피우던 엄살은 어디로 사라지고 불꽃투혼을 사르며 질주해 나가는 이들이 아니던가!
내가 믿을건 단지 나 하나밖에 없고 그 믿음은 여름내 흘린 땀과 가벼워진 몸 밖에 없는데 15년을 뛰었으면서도 왜이리 떨린다냐!
공부를 아주 많이 한 수험생이 시험을 보러 가면서 '어떤 문제가 나와도 죄다 맞춰줄테니 두고보자! 오늘이 나의 축젯날이다!'라고 생각을 하겠는가?
순창군수의 격려사에 이어 드디어 총성이 울리고 군청앞 뚝방길을 14명의 선수가 달려나간다.
읍내의 중심도로를 가로질러 임실 전주로 가는 국도 사거리에 이르는 동안 후미그룹에서 머물며 전체적인 상황을 살피고 내 컨디션을 점검해보는데 일단 모든 요소들이 다 좋다.
4차선 국도에서는 중간과 후미그룹의 예닐곱명 선수들의 맨 앞에서 끌고 가는 모양새가 되었는데 나를 꼭데기에 두고 양쪽으로 늘어서서 따라오는 주자들의 모습이 철새가 날아가는 모양을 떠올리게 하고 이순신 장군이 즐겨 썼다는 학익진과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넓은 27번국도를 벗어나 인계면으로 향하는 옛날 2차선길로 꺾일때 즈음이 이미 3Km이상 달려온 상황일텐데 여기까지 후미그룹을 떨치지 못하고 달렸던 것이 안전빵으로는 주효했으나 기록은 상당히 희생을 한 결과가 됐다.
여기까지 해서 장수(박*목), 진안(진*철), 부안(김*근), 임실(박*수), 남원(전*섭), 완주(전*수)까지를 뒤로 하고 면사무소까지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2Km남짓 달리는 동안 앞서가는 선수를 찾아 피치를 올렸다.
저만치 보이던 선수가 점점 가까워지는데 남은 거리가...
무주의 고교선수인데 맹 추격 끝에 면소재지가 시작될 무렵 따라잡았다.
하지만 이 선수도 만만치가 않아서 결승점을 50미터도 안 남긴 상태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10미터 가량이나 앞서버린다.
허탈해지는 순간 나 또한 내 자신도 놀랄만한 울트라캡숑 스피드가 터져나오며 스퍼트, 결국 동타임으로 결승테잎을 지나게 되었다.
순위는 공동7위가 되었고 기록은 20:37가 나왔다.
당초 예상치로 잡았던 20:20에 미치지 못한 것과 레이스 운영에서 조금만 더 판단이 빨랐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역대 최고의 순위를 기록했으니 기쁘기 그지없다.
무엇보다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을 안고 배번을 붙였는데 주변 역전의 용사들을 뒤로 하고 먼저 들어왔다는 점에서 내일의 희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