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회 대구 단편 영화제 _ 짧고 굵게
패션디자인과 4810713 서지희
제 7 회 대구 단편 영화제..?
나는 이 존재 조차 몰랐는데 일곱 번째라니, 그건 아마 독립영화라는 것에 대한 내 어처구니 없는 편견 때문일 것이다. 언제쯤 나는 그것이 마치 뒷간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단편영화는 제 3의 소통 같았고 무언가 음침하고 습했다. 예전에 봤던 몇몇의 단편영화들은 나에게 이런 흔적 밖에 남기지 못했었다. 왜냐면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게 무엇인지 왜 그들이 그렇게 표현 하는지 고민 없던 어린 나에게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이해하고픈 생각도 없었다. 어쩌면 아무런 포장도 꾸밈도 없이 낱낱이 일상을 그려내는 차가움이 무서웠었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뒷간으로 치부해버린 단편영화의 축제...
무슨 영화를 볼까,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한참을 고민한 끝에 몇몇의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그러고서 학교 아이들과 의견을 절충한 결과, 나는 몇 영화를 접기로 했다.
약속은 토요일 2시. 버스로 가는 도중 한 친구가 몸이 안 좋아서 못나오겠다고 했다. 엄습하는 불안감, 역시나 모든 아이들은 아직도 취침중... 아마도 어제까지 쌓여있던 과제의 압박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온김에 혼자라도 볼 요량으로 동성아트홀로 향했다. 저번에 딱 한번 친구와 동성아트홀에 갔던 적이 있어서 찾는 것은 무리가 아닌듯 했지만,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일찍이 영화제를 보고 온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확인하고 외로운 아트홀로 향했다.
2시 30분, 첫 상영은 '즐거운 나의 집' 으로 시작했다.
우리는 결과만 보고 죽일 놈, 살릴 놈, 삿대질 하고, 욕 하고, 편들고, 감싸고 난리다. 나도 9시 뉴스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이것저것 욕 해댈 일이 태산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들은 보여 지는 것으로 판단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이 오류라 하여도 사람들은 별반 신경 쓸 일이 아닐 뿐더러 더 이상 깊이 생각해보질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실컷 욕하고 쯧쯧 거리고 당시 안 좋은 마음만 털고나면 나와는 더이상 상관 없는 타인의 일이니까. 설령 그 일이 알게 모르게 자신이 포함된 일, 자신으로 말미암은 일이라 하여도 그는 더 이상 관여할 일이 아니다. 이렇게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 라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일까?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나는 책을 읽던 그림이나 영화를 보던 무식한 건방때문에 그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을 정도의 내 멋대로식 결론을 내리고 만다. 결국 '즐거운 나의 집' 은 사건의 첫 원인 제공자인 전기기사의 단란한 가정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는 이유만으로 '진실은 인생의 즐거움과는 무관하다.' 로 최후를 맞이하였다.
세 번째 스크린에 띄워진 상영 시간 10분 37초인 '2분'. 처음엔 ' 뭐야 이거... 변태야?... 자살하려고?.... 뭘 고민하는 거지?...' 그러고선 엉덩이를 틀어 앉은 자세를 바꿨다. '어쩔셈이지?..... 뭐가 문제야?! 병원으로 데려가야지 이 나쁜 놈아.....어라?!.....뭐야.......××××.....' 그리고는 '아차..!' 난 방금 '즐거운 나의 집' 이라는 영화를 봤다.
언제나 새로운 시도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불쾌감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는 점. 그리고 새로운 시도는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
'2분' 으로 빨라진 내 머릿속은 영화를 만드느라 수고한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쪼다 멜로’. '쪼다' 라는 말이 마음에 든다. 그대로 그를 욕하여 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애정이 담겨 있는 어감이다. 모든걸 다 경험한 사람이.. 다 아는 사람이.. 혹은 같은 처지의 쪼다가 순수하게 어리석은 쪼다에게 안타까움으로 토닥여 주는 위로의 말 같다. 마지막 쪼다 집의 벽에 반듯이 걸려있는 액자에 예전에 분명히 그려져 있던 불량고래는 지워버리고 없다. 쪼다 같은 짓이다.
가장 마지막에 본 영화라서 그런지 가장 기억에 남는 '참! 잘했어요' 는 어릴적 행복이라 믿었던 환상에 대한 상처로 과거에 머문 수아의 영화이다. 어릴적 보라색 '참! 잘했어요' 도장을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었다. 매일 매일 미루지 않고 일기 쓰기, 2교시면 항상 맞이하는 종이 긁는 연필 소리 뿐인 받아쓰기, 뒷마당 풀을 뽑아 외떡잎식물인지 쌍떡잎식물인지 알아내서 관찰도감에 써넣기... 뭘 그렇게 '참! 잘했다' 는 건지.. 일기는 그날 별일이 없었으면 쓰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초등학생이 받아쓰기 50점 이하를 맞는다고해서 문맹인 인가? 지금 민들레가 외떡잎식물인지 쌍떡잎식물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필요도 없는 낙인을 위해 상처 받으며 커왔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어른들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잘난 충고를 하지만 낙인이라는 것은 완벽하게 결과만을 고려한다. 일주일 동안 미룬 일기를 하루만에 뚝딱 지어내서 잘만 적으면 보라색 도장은 오른쪽 하단에 자랑스럽게 찍힌다. 어제 밤이 새도록 연습을 했던 받아쓰기도 30점 맞으면 나머지 공부를 해야한다. 낙인이란 사람을 우습게 만든다. 이 영화는 20분이라는 상영 시간이 믿기지 않을정도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지하철에서 수아는 어린 수아와 마주한다. 어린 수아는 그녀의 빨간 풍선을 빼앗아 간다. 질책이라도 하듯이.. 빨간색은 많은 의미가 있지만 행복의 색이라고도 한다. 어릴적 놀이공원에서 마치 엄마, 아빠와 같이 느껴진 선생님과 미자언니, 그리고 빨간 풍선. 자기 멋대로 만든 환상에 불과했다. 수아의 놀이공원 반짝이던 햇살 같은 환상은 무더운 여름의 방과후 교실을 훔쳐보고 멈추고 만다. 9살의 상처를 그대로 가지고 성장하지 못한 20살 수아는 상처의 굴레를 극복하기 위한 최초의 용기를 낸 행동으로 인해 더 큰 미로의 숲에 던져지고 마는 아이러니에 빠지게된다. 쓰러진 선생님의 이마에 찍힌 '참! 잘했어요' 도장은 다시 한번 우습다.
단편영화는 사람의 머릿 속을 빠르게 혹은 느리게 만든다. 그리고 입 다물게 만든다. 모든 영화를 마치고 극장을 나오는 사람들은 조용하다. 한일극장을 나올때와는 다르다. 주인공이 어땠느니 저땠느니, 결과가 어쩌고 저쩌고, 귀에 들리지 않는다. 단편영화를 보고 나니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속에서 뜨끔 뜨끔 나를 발견하기 때문에 찬찬히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첫댓글 교수님, 영화 한편의 감상을 쓰라고 하셨지만 네편의 감상을 제출합니다. 글 재주가 없어서 좀 횡설수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