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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18세기 이후부터 전 세계는 근대화의 격랑에 휩쓸렸다. 근대화의 주체는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양이었고, 그 대상은 그들을 제외한 전 세계였다. 그 충격은 어디서나 컸지만, 오랫동안 독자적인 문명을 발전시켜온 동아시아 국가들이 체감한 강도와 시련은 더욱 심각했다.
근대화의 과정은 아마도 시간과 공간의 압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통과 통신을 비롯한 물질문명의 발달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넓은 공간을 훨씬 빠른 시간 안에 장악하게 되면서 사건의 속도와 규모는 급격히 팽창했다. 근대는 그동안 개별적으로 성장하면서 부분적으로만 접촉해 온 동양과 서양 문명이 본격적으로 맞부딪치면서 그야말로 ‘세계사적 규모’의 사건이 일어난 국면이었다.
오랜 역사에서 처음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조선의 근대화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수많은 개인의 삶조차 그렇듯, 한 나라가 그런 실패로 그냥 허망하게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조선에도 급변하는 현실을 분석하고 활로를 모색하며 과감하게 행동한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의 방략(方略)은 크게 척화(斥和)와 개화(開化)로 나뉘었다. 유대치(劉大致, ?~?)는 그중에서 개화파에 중요한 영향을 줌으로써 조선의 근대사에 적지 않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었다.
방금 말했듯이 유대치는 조선의 개화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구체적인 이력은 흐릿하다. 그렇게 된 가장 중요한 까닭은 그에 관련된 직접적인 자료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유대치의 삶과 사상을 재구성할 수 있는 주요 자료는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의 [갑신일록(甲申日錄)]ㆍ[윤치호 일기]ㆍ[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등인데, 모두 다른 사람의 간접적인 서술이어서 근접성이 떨어진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 결과 유대치와 관련해서는 ‘유홍기(劉鴻基)’라는 본명과 ‘대치’라는 호를 뺀 거의 모든 사항을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우선 가장 기초적인 사항인 생몰년과 본관도 확정할 수 없다. 본관은 그동안 한양ㆍ강릉 등의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현재는 앞의 것은 오류고 뒤의 것은 확인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신분도 그동안은 중인으로 간주되었지만, 최근에는 반론이 나오고 있다. 중인으로 파악했던 근거는 그가 조선시대 중인의 거주 지역인 서울의 광교 부근 관철동(貫鐵洞)에서 살았고 역관 가문에서 태어나 의술을 직업으로 삼았다는 기록 등이었다. 예컨대 [김옥균전](고균〔古筠〕기념회 편, 1944)에서는 “대치 선생은 원래 역관의 집에서 태어났지만 의술을 직업으로 삼았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인이 아니라 양반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유대치가 역과나 의과에 합격한 증거가 없고, 1883~1884년 무렵 유대치를 자주 찾아갔던 윤치호(尹致昊, 1865~1945)의 일기에서도 그가 의술을 직업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 등이 그 주요한 논거다.
유대치가 양반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주장은 우선 그가 ‘벼슬하지 않은 양반’을 가리키는 ‘유학(幼學)’으로 관직에 임명된 기록을 주목한다. [승정원일기]에는 고종 19년(1882) 11월 감생청(減省廳)을 설치해 불필요한 관직과 관원을 줄일 때 유학 유홍기가 부사용(副司勇. 종9품)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5월에는 사용(司勇. 정9품)으로 승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대치의 재력과 학식도 양반설의 근거로 제시된다. 1880년 무렵 그와 접촉했던 일본 승려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은 “유대치는 자산가(資産家)ㆍ학식자(學識者)ㆍ우국지사로 박영효(朴泳孝, 1861~1939)ㆍ김옥균 등의 새로운 사상가와 교제하고 있다”고 썼다([조선국 포교일지〔布敎日誌〕] 1880년 10월 4일). 실제로 유대치는 특별한 생업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젊은 개화파 인물들을 집으로 자주 초대해 대접하며 토론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이는데, 이런 측면은 그가 ‘자산가’로 불릴 만한 재력을 갖고 있었다는 서술을 뒷받침한다. 물론 조선 후기 이후 역관을 비롯한 일부 중인은 상당한 재력을 축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력은 전반적으로 양반이 좀 더 우세했다고 볼 때 중인설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이런 모든 의견은 결국 추측일 뿐이다.
19세기 중반 근대화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조선을 덮치기 시작할 때 개화파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는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7)였다. 가문ㆍ벼슬ㆍ학식을 비롯한 그의 주요 경력은 모두 출중했다. 그는 유명한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손자로 고종 3년(1866) 대동강을 따라 평양까지 올라온 미국 무역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 호 사건을 처리하고 우의정까지 오르는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또한 그는 그런 국정 운영과 두 차례의 중국 방문(1861ㆍ1872년)을 포함한 여러 경험으로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풍부한 식견을 갖고 있었다.
박규수는 고종 11년(1874) 9월 우의정에서 물러난 뒤 김옥균ㆍ홍영식(洪英植)ㆍ서광범(徐光範)ㆍ박영효 등 그 뒤 개화파의 핵심 인물이 되는 젊은이들을 지도하면서 지냈다. 이듬해(1875) 9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 사건이 일어나고 그 이듬해(1876) 2월에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인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그 무렵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대단히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런 국면에서 박규수는 자주적 문호 개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자신의 식견을 젊은 개화파에게 전수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2년(고종 13년〔1876〕 12월) 만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개화파에게 충분하고 강력한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고 판단된다.
개화파의 형성에 기여한 또 다른 인물은 한어 역관 오경석(吳慶錫, 1831~79)이었다. 그는 고종 3년(1866)부터 11년(1874)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청에 다녀왔으며, 흥선대원군의 집권이 끝나가던 고종 9년(1872)에는 동지사(冬至使)로 파견된 박규수를 수행해 인연을 맺었다. 그는 청에 갈 때마다 북경의 서점가인 유리창(琉璃廠)에서 서양의 지도와 과학기기, 서양 학술과 문화에 관련된 책들을 사서 박규수에게 전달했다.
오경석은 박규수와도 가까웠지만, 유대치와 좀 더 밀접한 관계였다. 그는 유대치와 가까운 삼각동(현재 서울 중구 삼각동)에 살면서 중국에서 가져온 [해국도지(海國圖志)]ㆍ[영환지략(瀛環志略)] 등을 그에게 소개했다. [해국도지]는 청의 주요한 사상가인 위원(魏源, 1794∼1856)이 서양 각국의 지리ㆍ산업ㆍ인구 등을 소개한 방대한 분량(100권)의 세계지리서이고, [영환지략] 또한 청의 복건순무(福建巡撫) 서계여(徐繼畬, 1795~1873)가 지은 세계지리서인데, 모두 중국은 물론 조선의 개화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오경석의 아들은 3ㆍ1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자 유명한 서예가ㆍ학자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인데, 그는 아버지와 유대치의 관계를 이렇게 회고했다.
두 사람은 동지로서 결합해 서로 만나서 우리나라의 형세가 참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의 처지에 있음을 탄식하고, 언젠가 일대 혁신을 일으키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상의했다. 한번은 유대치가 오경석에게 우리나라의 개혁을 어떻게 해야 성취할 수 있을지 물으니, 오경석은 먼저 북촌 양반 자제들 속에서 동지를 찾아 혁신의 기운을 일으키는 데 있다고 대답했다. - [김옥균전]
개화파가 형성되는 데 기여한 박규수와 오경석이 얼마 뒤 비슷한 시점에 별세하자 유대치는 거의 유일한 정신적 지주로 남았다. 그는 젊은 개화파를 적극적으로 양성하면서 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개화파의 주요 인물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이들은 유대치를 따르며 자주 만나 토론하는 사이였다.
갑신정변(1884) 이전까지 유대치는 나이와 지위를 뛰어넘어 다양한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우선 김옥균ㆍ박영효ㆍ서광범 등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의 주요 인물들을 자주 만나 토론했다. 이 무렵 유대치는 나이가 상당히 많았다고 추정되며 김옥균은 30대 초반, 박영효ㆍ서광범은 20대였다. 그들은 자주 왕래하면서 “늘 일을 의논”했다. 상당한 연령 차이도 중요하게 작용했겠지만 유대치의 위상은 호칭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그는 김옥균을 ‘군’으로 불렀고 김옥균은 그를 ‘선생’이라고 존칭했다.
유대치가 가까이 지낸 또 다른 젊은 인물로는 윤치호와 오세창이 있었다. 먼저 윤치호는 당시 미국 공사의 통역이라는 독특한 위치에 있었는데, 유대치는 그런 그의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의견을 고종과 미국 공사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윤치호도 유대치를 ‘영웅’이자 ‘선각자’로 높이 평가하고 ‘대치 어른(丈)’이라고 부르면서 따랐다([윤치호 일기]). 앞서 나온 역관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도 유대치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는 아버지와 유대치의 친분에 따라 어려서부터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웠으며, 갑신정변 무렵에는 그를 따라 개화당의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대치 선생은 깊이 불교를 믿어 도는 높고 품성은 청백(淸白)했다. 역사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 고금의 역사에 통달했다. 변설(辯舌)은 유창하고 신체는 장대하며 홍안과 백발에 항상 생기에 넘쳐 행동했다”고 오세창은 평가했다([김옥균전]).
유대치는 그밖에 유혁로(柳赫魯)ㆍ박제경(朴齊絅) 등 하층 양반과도 교류했다. 유혁로는 무과 출신으로 오위장(五衛將)을 지냈으며 박제경은 몰락 양반으로 짐작되는 인물이다. 유대치는 이들과 어울려 시국을 논의하고 산천을 유람했다.
국내외의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던 개화기에 유대치의 위상은 매우 높이 평가되었다.
오경석이 조관(朝官)을 유도하여 외교를 운용할 때에 일백의(一白衣)로 시정에 은복(隱伏)하여 [해국도지]ㆍ[영환지략] 등으로써 세계의 사정을 복찰(卜察, 점치고 살핌)하면서 뜻을 내정의 국면 전환에 두고 가만히 귀족 중의 영준(英俊, 뛰어난 인재)을 규합하여 방략(方略)을 가르치고 지기(志氣)를 고무하여 준 이가 있으니 당시 지인의 사이에서 백의정승의 이름을 얻은 유대치가 그라. 박영효ㆍ김옥균ㆍ홍영식ㆍ서광범과 귀족 아닌 이로 백춘배(白春培)ㆍ정병하(鄭秉夏) 등은 다 대치 문하의 준모(俊髦. 빼어난 인재)로 일변 일본으로써 청을 몰아내고, 아라사(我羅斯. 러시아)로써 만주를 회수하여 청년 중심의 신국(新國)을 건설함이 그 이상(理想)의 윤곽이니 박영효ㆍ김옥균 등이 연래(年來)로 일본 교섭의 선두에 선 것도 실상 대치의 지획(指劃. 지시와 계획) 중에서 나온 것이요, 세인(世人)이 개화당으로 지목하는 이는 대개 대치의 문인을 이름이었다. - 최남선, <개화당의 연원>, [고사통(古事通)]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유대치에 관련된 사항은 대부분 단편적이기 때문에 체계적인 사상이라고 말할 만한 부분을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지적된다. 전체적으로 그의 정세 인식은 부국강병을 가장 중시하면서 그 방안으로 재정의 통일과 군제의 개혁, 방만한 정부 규모의 축소 등을 주장했다고 평가된다.
그가 가진 서구 인식의 단면은 프랑스와 조약을 맺어 청의 내정 간섭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에서 보인다([윤치호일기] 1883년 12월 21일). 그는 서구 열강의 힘을 빌려 청의 영향력을 제어하려고 했는데, 고종과 상통하는 이런 외교 전략은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한계를 드러낸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이런 판단은 청의 성격을 이중적으로 설정하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그는 갑신정변 직전, 경상도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윤치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군은 염려할 것이 없다. 경상도에서 난당(亂黨)이 성을 공격하고 세력을 모으면 일은 노출되고 모의는 누설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삼영(三營)의 군사와 중국의 도움이 있으니 왕명을 받들어 토벌하면 오합의 무리는 며칠 만에 타파할 수 있을 것이다([윤치호 일기] 1884년 2월 6일).” 그러니까 그는 서구 열강과의 관계에서는 청을 제어해야 할 적대적 세력으로 파악했지만, 내부의 전란을 수습하는 데는 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우호적 대상으로 상정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 것이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가 일으킨 가장 중요한 사건은 갑신정변이었다. 1884년 12월 4일에 거사해 일단 성공했지만 사흘 만에 실패로 끝난 그 정변에 유대치는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앞서 보았듯이 김옥균ㆍ홍영식ㆍ서광범ㆍ박영효ㆍ서재필 등 이른바 ‘갑신오적’으로 불린 핵심 인물들과 자주 만나 토론함으로써 배후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유대치는 정변에 매우 조심스러운 견해를 나타냈다. 정변 한 달 전 유대치는 “개화당은 근신하면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조언했으며, 20여 일 전에도 김옥균에게 “일본 정부의 정략을 군들은 과연 깊이 알고 있는가? ······ 내가 우려하는 바는 일본군이 100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절도와 제도가 청국 병사보다 강한 듯하나 병력이 크게 모자라니 이것이 매우 걱정된다.”고 우려를 표명했다([갑신일록] 1884년 11월 16일).
그의 우려대로 정변은 청의 개입으로 사흘 만에 실패했고, 주요 인물들은 망명하거나 살해됨으로써 개화파는 해체되었다. 유대치의 종적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는 오대산으로 숨었다고도 했고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오세창의 아들 오일륙(吳一六)은 유대치가 오세창과 한동안 광주ㆍ가평 등지로 피신했는데, 어느 날 변소에 간다고 나간 뒤 끝내 소식이 끊겼다고 증언했다. 유대치의 공식적인 마지막 자취는 1910년 7월에 정3품 품계를 받고 규장각 부제학에 추증된 것이었다.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19세기 후반은 아마도 한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격동기였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듣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문물과 개념과 상황이 급격하게 밀려오면서 반 세기 동안 견고하게 유지되던 조선의 구조에는 깊고 큰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물이 떠오르고 사라졌다. 유대치는 그런 혼란을 직시하면서 나라의 활로를 모색한 인물이었다. 그리 참신하지는 않지만 ‘백의정승’이라는 표현대로 그는 개화사상 형성의 막후에서 크고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숨은 지도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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