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유혹 앞에 나는…
피 흘리기까지, 마땅히 지켜야 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 쳐야 한다.
죄와 관련해서 실천해야 할 것은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싸우는 게 아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롬 6:12,13
죄와 싸우라는 내용의 말씀을 하면서 세 번에 걸친 부정적인 명령어가 나온다.
‘못하게 하여.’
‘순종하지 말고.’
‘내주지 말고.’
이렇게 삼중으로 명령하며 강조하는 것은, 이중 삼중으로 정신 차리지 않으면 한 번에 넘어갈 수 있는 게 죄의 문제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 아닌가?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라. 성도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던 목사가 성적인 문제로 한순간에 넘어지는 일들이 잊을만 하면 터지는 게 현실이다. 그렇게 신뢰받던 목회자가 금전 문제에 연루되어 부끄러운 자리에 빠지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내가 젊은 후배 목사들한테 자주 충고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선배 목사들에게서 일어나는 존경스럽지 않은 모습을 비판만 하지 말고 본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로 받으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큐티를 왜 하는가?
말씀은 왜 읽는가?
아침에 큐티하려고 본문을 펼쳤는데, 다윗이 유부녀인 밧세바와 성적으로 죄짓는 장면이 나오면 어떻게 반응하는가?
다윗 정말 안 되겠네. 이런 놈은 죽어 마땅해. 오늘 큐티의 결론 – 다윗은 인간도 아니다.
이러려고 큐티를 하는가? 아니다. 다윗의 사례를 읽으면서 다윗의 삶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삶을 매개로 해서 나 자신을 점검하고 돌아보려고 묵상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잘못을 저질러 부끄러운 자리에 빠진 어떤 사람을 놓고 그 사람을 정죄하고 손가락질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그 사건을 두려운 마음으로 나의 기도제목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이런 현실을 우리가 자각하고 로마서 6장 12-14절에서 조심할 것을 삼중으로 강조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으면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 히 12:4
당시 로마의 검투사들은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웠다. 피 흘릴 때까지 싸우는 것이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죄와 싸우되 어느 정도의 각오로 싸워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죄의 유혹에 넘어지면 나는 망한다. 나는 죽는다. 내 영혼은 끝장이다.’
이런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피 흘리기까지.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라고 할 때, ‘대항하다’라는 단어는 죄악의 물결이 물밀듯 밀려올 때 믿는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며 싸우는 모습을 설명하는 차원에서 사용됐다.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교회 안으로 세속화가 물밀듯 밀려와 우리 가정과 자녀들을 넘어뜨리는 현실 앞에서 우리 자신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리기까지 저항하는 몸부림이 필요하다.
조금 해보고 ‘안 된다. 다른 사람도 다 죄짓는데 나라고 별수 있나?’라고 하면 안 된다. 피 흘리기까지 대항해야 한다.
나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는 히브리서 12장의 말씀을 보면서, 성경에 나오는 두 인물이 교차되었다. 대조되는 두 인물인 바울과 삼손이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둘 다 엄청난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차이점은 무엇인가? 바울은 그 사명을 잘 감당한 대표적인 인물이고, 삼손은 그 사명을 잊어버린 부끄러운 인물의 상징이다.
나는 이 두 인물의 분기점을 이루는 말씀이 디모데후서 4장 6,7절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이 임종을 앞두고 자기 삶을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고백한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 딤후 4:6
죽을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자기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 딤후 4:7
피 흘리기까지 싸웠다는 것 아닌가? 피 흘리기까지 마땅히 지켜야 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쳐왔다는 이야기 아닌가?
여기에 반해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라는 특별한 사명과 목적을 가진 존재로 부름 받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죄에 대해 민감함이 없어서 넘어져 버렸다.
보통 삼손이 ‘들릴라’라는 여자 때문에 망했다고 이야기하는데, 사실 들릴라 입장에서는 억울한 말이다. 삼손은 들릴라 때문에 망한 게 아니다. 삼손이 들릴라를 만나기 이전부터 삼손은 그를 망하게 할 요소들을 품고 있었다. 이미 죄에 허물어지고 죄에 대해 방어가 전혀 안 되던 사람이 삼손이었다.
성경을 보면, 들릴라를 만나기 전부터 삼손은 이방 여인한테 반해 정신 못 차리고 결혼하지 않았는가? 만약에 들릴라가 삼손이 아닌 바울과 동시대에 살아서 바울을 유혹했다고 해보자. 과연 바울이 들릴라 때문에 무너졌을까? 아니다. 그러니 남 탓 하지 말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울처럼 피 흘리기까지 싸우면 아무리 세상이 세속화의 물결로 넘실거린다 해도바울처럼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줄로 믿는다.
우리가 삼손처럼 두 눈이 뽑히고 어디 가서 말하기도 부끄러운 비참하고 초라한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 바울처럼 당당한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빌립보서 2장 12절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의 눈물의 고백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 빌 2:12
예수를 얼마나 오래 믿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오래 믿으면 믿을수록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죄인으로 서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주님 앞에만 서면 부들부들 떨리는 마음으로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원합니다’라는 그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 오늘, 새롭게 살 수 있는 이유, 이찬수 https://mall.godpeople.com/?G=9791165043964
† 말씀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 로마서 6장 14절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 시편 73편 23절
† 기도 하나님, 주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벌거벗은 죄인으로 섭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그리하여 죄의 유혹 앞에 넘어가지 않고 피 흘려 싸우게 하소서.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소서.
† 적용과 결단 죄와 관련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하지만, 그 싸움은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힘’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고 날 사랑하시는 주님의 다스림과 통치 아래 있기를 간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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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겨울날이 매섭더니 며칠 따듯하네요. 하루도 따듯한 삶 되세요.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