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선생의 하늘
김인기
차석규 선생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 사실이 크게 원망스럽지 않아. 선생은 연세도 높았다. 누가 죽음을 수긍하지 않을 도리도 없다. 나와 각별한 사이도 아니었잖아. 그러니 그저 그러려니 하자.
세대 차이도 제법 있었고, 인연도 깊지 않았어. 설령 동년배로 우리가 오백 년을 한자리에 있었더라도 어쩐지 데면데면했을 듯하다. 이게 무슨 잘못이랴.
나는 변명 삼아 이러기도 한다.
“청산도 언제나 무심하더라.”
그렇고말고. 누가 멀쩡한 산을 두고 생트집을 잡지는 않는다. 바위나 나무 역시 묵묵한 그대로 넉넉하다. 평소에는 있는 줄도 모르고 살다가 문득 반색하는 것들이다. 인간들도 대개 이렇지 않겠는가? 이게 자연스럽기도 하고. 나도 막상 선생이 멀리 가버렸다고 하니, 그간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소록소록 떠오른다.
선생은 1951년 2월 당시 17살이었다. 아마도 선생은 이때 고향에서 평생 상처로 남을 일을 겪은 게 아닌가 싶다. 전쟁이 한창인 그때 우리 편이라 여겼던 군인들이 동네로 와서 사람들을 학살했다. 그 현장에 선생이 있었다. 1988년에 선생은 『남부군과 거창사건』이란 책을 내었다.
나도 참 미련했다. 진작에 그 책을 구해 읽어봤어야 했다.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의 눈에 비친 그 만행들이 당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직접 물었어야 했다. 아마 선생도 정직하게 응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나, 나는 뭔가 머쓱했다.
선생은 온몸으로 시대의 질곡을 겪은 분이었다. 징용이니 정신대니 하다가, 해방이니 전쟁이니 하다가,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다가, 군부독재와 민주주의가 어떻다는 등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이러고도 누가 무사할 수 있으랴. 보릿고개에서 벗어난 건 다행이나, 귓가에는 비명이 들린다. 차 선생한테는 지옥이 멀리 있지도 않았다.
선생은 헌책방을 운영했다. 내가 한때 여기에 들렀다가 책 두어 권을 공짜로 얻기도 했다. 요즘 기업형 중고서점과 달리 과거의 헌책방들은 대체로 분위기가 우중충했다. 책들도 먼지와 함께 켜켜이 쌓여있었는데, 선생의 월계서점은 깔끔했다. 서가도 반들반들 윤이 났다.
선생은 기독교인이었다. 그 종교가 같다고 해서 그 믿음의 내용도 같지는 않다. 저마다의 하느님이 따로 있다. 나는 이걸 당연하게 여긴다. 그래서 나는 차 선생의 하늘이 어떠했는지 궁금하기도 한데, 이제는 방법이 없다.
때로는 공자님 말씀이 좋고, 때로는 부처님 말씀이 좋다. 무당이 굿하다가 남은 떡도 마다할 것 있나. 다 괜찮아.
하물며 이런 작자가 어찌 함부로 선생의 그 신심을 말하랴.
인간사가 꼭 본인의 의지대로 되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신앙마저 어쩌다 보니 그만 이렇게 되고 말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또한 나는 확인할 수 없다. 자신이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보면, 각자가 나름대로 살길을 모색한다. 종종 심신이 망가져서 상식과 멀어지기도 한다. 수전노가 되기도 하고, 광신도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 경험마저 왜곡한다. 무조건 강한 자에게 붙자! 이런 심리로 평생을 살기도 한다.
전래의 예법이 그렇듯이 내 정서로도 이미 고인이 된 분들을 나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예외가 전혀 없는 건 아니나, 아무개가 잘 죽었다고 하지는 않아. 나 또한 사라질 터인데, 굳이 그럴 게 뭐 있나.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고인의 생전 모습 가운데 몇몇을 떠올리기도 한다. 저마다 기억도 좀 달라서 한때나마 잔잔한 웃음꽃이 피기도 한다.
언젠가 선생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노래를 불렀다. 말하자면 ‘성(性)’스러워야 했는데 ‘성(聖)’스러웠던 거지. ‘립스틱 짙게 바르고 어쩌고’라거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저쩌고’ 해야 할 자리에서 엉뚱한 애창곡을 불렀다. 아, 내가 그만 그게 찬송가였는지 애국가였는지는 잊어버렸네.
나는 뭘 몰라도 불쑥 싱거운 소리부터 하려는 버릇이 있다. 이때마다 보인 선생의 눈빛을 나는 기억한다.
‘예전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필경 죽었을 인간이 여기 있구나!’
그 눈빛이 혹시 이런 뜻이었을까? 에이, 설마, 아니겠지!
한번은 선생이 내 수필집 『함께 가는 우리들』을 고물상 리어카에서 수백 권 구해다가 헌책방 손님들에게 서비스로 나눠줬노라 했다. 마침 인근에 있던 출판사 김 사장도 고심하다가 그만 그렇게 처분한 것이었다. 내 처녀작품집이 불쌍한 운명에 처했다는 그 사실이 그때는 슬펐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도리어 차 선생의 그 마음이 고맙다. 이래 보나 저래 보나 그게 더 귀하기도 하다.
[2024.10.15.]
첫댓글 -
작년에 본회 연간지 [대구의 수필]에 실을까 하다가 뭔가 맞지 않는 듯하여 그만둔 글임.
월계서점 지나갈 때 안을 들여다 봤어요.
고요합니다.
요즘은 전자책 시대라서....ㅠ.ㅠ
현대는 오히려 책이 공해인 시대....이사하면서 수백 권 버렸어요
내 책도 누군가는 버렸겠지요 ^^
저도 몇 달 전에 책을 좀 많이 처분했는데,
아직까지 가슴이 아픕니다.
후회도 밀려오고요.
분명히 다 읽지도 못할 책들이고
가족들의 원성도 드높아서
그만 홧김에.....
으아, 하늘이 원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