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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그는 내 아들이기도 하지만, 만민의 아들, 내 스승, 내 주님이십니다!
오랜 준비 끝에 드디어 공생활을 위해 출가하신 예수님, 그리고 나자렛에 남아 계셨던 성모님,
두 분은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몸과 마음은 언제나 일심동체, 하나였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셨듯이 성모님의 머릿속은 온통 아들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특별한 음식을 드실 때는 머릿속에 즉시 예수님 얼굴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끼니나 챙기며 다니나? 걱정이 앞섰을 것입니다.
오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나, 식사나 제때 하고 다니나?
춥지는 않을까?
어디 아픈 데는 없을까?
성모님의 안테나, 주파수는 오로지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성모님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마리아! 큰일 났습니다.
아드님 상태가 꽤나 심각한 듯합니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합니다.
유다 세력가들과 맞짱을 뜨는 것은 보통이고, 헤로데를 비롯한 고위층의 심기를 거스르는 발언들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제 명대로 못 살겠는데, 어쩌죠?
우리가 가서 데리고 와야 하지 않을까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성모님은 형제들(아마도 사촌, 팔촌 형제들)을 앞세워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문밖에 나와 있는 사도에게 면회를 신청했습니다.
결과는?
놀랍게도 문전박대였습니다.
어머니가 오셨다고 분명히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와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한술 더 떠 하시는 말씀이 성모님에게는 엄청난 상처가 되었음일 분명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복음 12장 48절, 50절)
나자렛으로 돌아오는 길에 성모님께서 느끼셨을 비참함이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문전박대로 인한 수모와 상처는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예수님 입에서 나온 정말이지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마음에 담고 또 다시 성찰과 숙고를 시작합니다.
지금은 비록 내 귀가 뚫리지 않아서 이해를 제대로 못 하지만, 기도하고 또 기도하다 보면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순간이 올 것을 확신하며, 또다시 깊은 침묵 속에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 평생의 노력 끝에 마리아의 신앙은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순간 위대한 하나의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내가 낳은 아들이지만, 내 안에 가둬두어야 할 아들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주님을 위해, 주님의 백성을 위해 부단히 내어드려야 할 아들, 정말 아쉽지만, 떠나보내 드려야 할 아들입니다.
그는 내 아들이기도 하지만, 만민의 아들, 내 스승, 내 주님이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누군가를 내 뜻 안에 머물게 하려면
오늘은 성모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신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께서 3살 때 요아킴과 안나로부터 성전에 봉헌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동정녀들을 성전에서 키우며 메시아의 어머니가 될 것을 준비하던 관습에서 비롯됩니다.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을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제물로 성전에 봉헌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에 봉헌된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에 봉헌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누구의 집에 살려면 그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집에 봉헌된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에 봉헌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께서 형제요, 누이라고 하시는 이유는 같은 집에 살기 때문입니다.
같은 부모님의 같은 뜻을 따르기 때문에 같은 집에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에 살려면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집에 나 자신을 봉헌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러면 이제 그분이 내 안에 사시게 됩니다.
하느님이 성모님의 집에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제르뚜르다 성녀에게 예수님은 “네가 내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내가 네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분 집에 살기로 결심하면 그분이 내 집에 사십니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삼위일체 신비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뜻은 성령님이 됩니다.
이 원리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누군가를 나의 뜻 안에 머물게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먼저 그 사람의 뜻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그 사람도 내 뜻 안으로 들어옵니다.
‘일반적으로’라고 말한 이유는, 가리옷 유다처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다는 말입니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50년째 돌 속에 사는 할아버지〉 사연이 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매일 싸우는 부모 밑에서 두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유일하게 그 할아버지를 아껴 주었던 분이 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는 산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산 깊은 곳에서 무려 50년을 돌 틈에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바로 밑이 고향이었지만 할아버지는 동물 사료를 훔치러 내려가는 것 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프로그램 제작팀이 할아버지에게 다가갔을 때 할아버지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습니다.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 상황이었지만
할아버지는 좀처럼 세상으로 내려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옛 친구분들을 불러서 설득해보려 했지만, 할아버지는 도망쳤습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할아버지의 건강이 걱정이었습니다.
이때 이 프로그램 제작진이 항상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사는 움막 옆에 텐트를 치고 무작정 같이 지내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먼저 내려오라는 말보다 당신과 함께 살아줄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 열흘 정도 있다가 보면 숨어 사시는 분들도 마음을 열게 됩니다.
열흘 동안 할아버지가 먹고 마시고 일하시는 것을 함께 하다 보니 할아버지도 제작진의 설득을 받아들여 검사를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할아버지가 드시는 것을 함께 먹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쓰레기를 뒤지며 산에 숨어 사시는 할머니를 설득하기 위해 함께 머무르며 사는데, 그때는 할머니가 남이 버린 음식으로 만든 것을 함께 먹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그 할머니도 병원 치료받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모든 것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나의 뜻을 강요하기 이전에 먼저 상대의 뜻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상대의 거처에 함께 머무는 것과 같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뜻을 들어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성모님께서 항상 주님의 뜻 안에 머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가족이나 이웃들을 주님께 데려와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뜻을 비치는 것보다 그들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린 후 나의 뜻을 따라줄 수 있도록 호감을 얻어야 합니다.
남이 나의 말을 안 들어준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나도 남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주님이나 이웃들에게 나의 뜻을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들의 집에, 혹은 그들의 뜻에 나 자신을 봉헌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드는 것은 매우 어렵고, 많은 사람의 마음에 들려면 그 모든 사람들의 뜻에 따라주고 있어야 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12,46-50: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오늘 축일은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세워진 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이 날,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충만히 내리신 성령의 감도로 성모님이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당신을 바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마리아가 세 살 되던 해에 성전에 봉헌하였는데, 세 살 된 마리아가 성전으로 올라갈 때, 계단에는 성모님의 발자국마다 장미가 피어났다고 한다.
오늘 복음에서 악마는 교활하게, 예수님의 육에 따른 친척들을 등장시킨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그 친척들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47절). 이 말은 인간에게서 태어난 이가 하느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말이며, 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늘에서 왔다고 하느냐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48절) 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49절) 하신다. 그분은 말씀을 따르는 이들을 가리키신다. 말씀을 실천하는 관계로 당신과 맺어진 이들에게 가족관계에 따른 모든 명칭을 붙인다.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며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50절) 신앙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바로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분의 어머니가 된다. 이것은 주님을 낳아, 듣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통해 이웃의 마음에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생겨나도록 하는 사람이 어머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셨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셨기 때문에 복된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육신이시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마음속에서 진리이시며, 마리아의 태중에서 육신이시다. 그분의 어머니이신 것은 그 진리를, 말씀을 실천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말씀을 실천하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리아를 닮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부부싸움을 안 하는 집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긴 남남이 만나서 서로 맞춰서 산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때 부부싸움 하시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큰 목소리가 날 때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서로 물건을 부수면서 싸운다는 것도, 말다툼으로 며칠 동안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부싸움 후 이혼하고 싶어도 자식 때문에 이혼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녀 때문에 억지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이혼해서 한 부모 가정으로 자란 아이의 정서보다 이혼하지 않고 같이 살면서 계속 싸우고 상대를 비난하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의 정서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이 때문이라는 말을 하려면, 절대 아이 앞에서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상대 때문이라는 말을 하며 싸우지만, 그때 아이를 위한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 때문이라면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모님의 함께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이제야 감사함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좋은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셨을까요? 비록 배우자 없는 저의 삶이지만, 저 역시 좋은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며 최선을 다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그들도 제게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은총을 가득히 채워주신 성령의 감도로 성모님께서 아기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봉헌은 성모님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큰 것은 성령의 감도이지만, 성모님의 부모님이신 요아킴과 안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실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뒤로 하고, 당신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 주위 사람에게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처럼, 우리가 모두 한 가족이 될 수 있도록 말이지요.
오늘의 명언: 나무가 열매로 사람을 모으듯 어른은 성품으로 사람을 따르게 한다(다산 정약용).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즈카 2,14)
하느님께서
성모님의 한가운데에
머물러 계시니
말씀이 잉태되었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의 한가운데에
머물러 계시니
우리는
말씀이 되어
말씀의 씨앗을 흩뿌리며
세상 끝까지 달려 나가리.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오늘은 이 대목에서 특별히 교회의 가르침인
<연대성의 원리>를 묵상하게 됩니다.
제가 생각하는 연대성은 이런 겁니다.
1) ‘서로’ 부족한 부분을 매꿔주며 협력할 수 있는 것
2)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존중해주고 배려해 줄 수 있는 것
3) ‘서로’ 섬기며 양보하고 희생할 줄 아는 것
4) ‘상호’ 소통하고 영적인 친교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
5) 하느님의 말씀을 ‘서로’ 나누고 실천하는 것
우리는 지금 연대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형제적 삶을 지금 얼마나 살고 있습니까?
우리 조직, 공동체, 단체부터
이런 연대성을 살고 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봉헌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신
성모님의
삶을
만납니다.
세상의 많은
길 중에서
가장 뜨거운
길은 봉헌의
길입니다.
봉헌은
고정된
우리의 시각을
깨뜨리며
성장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봉헌은
확고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신앙의 실천인
봉헌은
강한 유대감으로
너와 나를
이어줍니다.
이렇듯
봉헌의 삶은
자아를 비우는
사랑입니다.
비우지 못하면
갈등과 반목으로
치닫게 됩니다.
참된 모습인
봉헌의 사랑은
간절한 기도로
드러납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어머니의 삶을
뜨겁게
만납니다.
무한한 실천의
자리가
우리의
현실입니다.
현실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봉헌입니다.
신앙인의 완성은
봉헌입니다.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봉헌의 날
되십시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
'더해진 것을 향해 나아가자!'
오늘 복음(마태12,46-50)은 '예수님의 참가족'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마태12,47)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 하고 반문하시면서,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렇게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의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49)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자헌(自獻)'은 '성모 마리아의 부모(요아킴과 안나)가 세 살 된 마리아를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 한 일'이라는 뜻이며, 오늘은 이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 구원 사업의 결정적 도구로 선택되어진 분입니다. 사람의 모습을 지니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는 결정적 태가 되셨고, 주님을 온전히 따르신 첫 제자가 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관계를 확장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육의 관계를 뛰어넘어 영의 관계로 확장되어집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모든 사람이 내 형제이고 누이이고 어머니가 되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플러스(+) 알파의 인생', 곧 '더해진 인생'입니다. '인성(사람)에 신성(하느님)'이 더해졌고, '육신의 관계에 영적 관계'가, '이 세상 것에 저 세상 것인 영원한 생명'이 더해졌으며, 결정적으로는 '죽음에 부활'이 더해졌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더해진 은총에 감사드리면서, 더해진 은총을 향해 나아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성실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딸 시온아, 즐거워하여라. 내가 이제 가서 머무르리라.>
▥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2,14-17
14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15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그때에 너는 만군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 보내셨음을 알게 되리라.
16 주님께서는 이 거룩한 땅에서 유다를 당신 몫으로 삼으시고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하시리라.
17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46-50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