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집회란, 고전11-14장에 묘사되어 있는 가장 중요한 모임이란 점을 지적하고 싶다.
오늘날 신자들은 교회 집회의 목적을 대략 4가지라고 생각한다.
공동체적 예배, 복음제시, 설교청취, 교제
그러나 신약성경은 교회 집회의 목적으로써 이런 이유들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집회에서 예배, 복음제시, 설교, 친교가 차지하는 위치
신약성경에 따르면 예배란 우리가 사는 그 삶 자체이다. 예배는 장소적 의미에서의 모임이라는 뜻에 한정될 수도 없다.
성경은 교회 집회의 목적을 복음제시로만 한정시키지 않고 있다. 신약성경은 복음제시가 교회 집회에서만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오히려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교회 집회의 주요한 특징은 신자들의 모임이었다는 점에 있다.
교회집회가 설교를 듣는 데 주목적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성경적 근거가 희박하다.
집회에서 '한 편의 설교'를 경청한다는 것은 초대 교인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일이었다.
사도들은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을 길게 설교하였다. 보통 이런 경우는 복음 전파의 목적을 위해 특별히 계획된 '사역 모임'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특별 세미나, 워크샵, 컨퍼런스 등과 유사하다.
교회집회에서 모든 성도들은 자유롭게 그리스도를 나눈다. 어떤 사람도 그 집회의 중심된 위치에 설 수 없었다. 1세기 교회 집회에서의 가르침의 사역은 매 주일 같은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모든 성도들이 집회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나누는 사역을 감당할 정당한 권리들을 가지고 있었다. 교제도 집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아니었다.
교제란 하나님의 백성이 주 예수님을 깊이 묵상할 때 자연적으로 생길 수 있는 성장의 결과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행2:42)
상호권면
성경은 초대 교회 집회의 목적은 바로 상호 권면이라고 말한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으나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롬14:19, 살전5:11, 히3:13-14 참고)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집회는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였다.(엡4:16) 상호격려가 모임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너희 모든 사람들'이라는 말속에 이 모범의 두드러진 특징이 잘 설명되어 있다.
찬송이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도 상호성의 요소를 배제하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골3:16 엡5:19)
신선함과 개방성, 그리고 자발성이 집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고 동시에 상호 권면은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도 하였다.
신약교회 집회는 '원탁'의 원리에 기초하는 모임이었다. 즉 모든 회중은 각자의 역할을 하도록 고무되었다.
현대제도권 교회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준비하고 인도하는데 있어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존하기를 두려워한다.
성도들이 자신의 개인적 삶에 임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체감하는 일에 너무도 둔감해졌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아직도 자신들을 지배해줄 '인간 왕'을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해줄 눈에 보이는 중개자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교회 집회에 인간 중개자가 존재하는 것은 성도들 자신이 오래된 잘못된 신앙적 전통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 교회의 가장 돋보이는 특징은 집회를 집전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가 성도의 공동체를 통해 성령의 중재로 집회를 직접 인도하셨다. '서로 함께함', '상호성', '서로'라는 단어를 거의 60번이나 사용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베드로의 말에 따르면 모든 신자들이 주님께 '영적 제사'를 드리도록 부름받은 영적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보통 제도권교회는 '서로가 함께'하는 원리를 교회 예배 바깥으로 몰아낸다. 이런 점이 믿음 공동체의 성장을 저해한다.
이런 이유로 제도권 교회는 본질적으로 몸만 과대하게 커버린 영적 아기들의 보육원이 되었다.
이런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수동적 수혜자로 전락시키면서 성도들의 성적 성장을 막고 영적 유아기에 머무르게 한다.(먹기 좋게만 조리된 영적 음식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은 영적 미성숙의 징표다. 고전3:1-2, 히5:12-14)
종교개혁은 만인 제사장의 진리를 회복시켰으나 이 가르침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구조를 회복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상호사역이란 배교의 독을 막아내도록 거룩한 하나님이 만드신 해독제이며, 성도의 견인을 확신하게 하는 필요조건이자, 개인의 영적 삶을 풍성케하는 수단이 된다.
교회의 헬라어 원어인 ekklesia가 '회중'을 뜻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교회가 집합적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바울의 주된 사상과 잘 조화를 이룬다.
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교회 집회의 목적은 상호권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데 있다. 우리가 같이 모일 때 그리스도는 그 자신을 충만하게 나타내신다. 이런 현상이 나타날 때 주님의 몸이 바로 세워지는 법이다.
1세기 교회는 성령의 생명력이 그들 교회를 지속시키는 유일한 동력임을 알고 있었다.
초대교회의 집회 형태를 거부하려는 경향의 기조에는 성령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의 지휘 아래서 실제로 역할을 감당하는 제사장들의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교회이다.
성경은 머리되심과 주되심의 차이점을 명시하고 있다. 신약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은 실제로 그리스도와 그의 몸과의 관계성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항상 성도 개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주되심이 성도 개인과의 관계를 통해 나타난다면 머리되심은 전체 교회와 관련된 표현이다. 머리되심과 주되심은 하나의 존재에 대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측면이다.
교회 안에 우리가 만들어 놓은 모든 구조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머리되심의 표현인가? 만약 당신이 솔직하게 이 질문에 답한다면 현대 교회가 초기의 원형에서 얼마나 멀리 이탈해 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1세기 관계적 교회'(프랭크 바이올라) 중에서
첫댓글 공감이 가는 좋은 글입니다.
이런 교회의 지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가끔씩 이런 모임이나 교제하는 방식이 진정 교회모임인가 의심하는 형제들을 만납니다.
상호권면과 영에서 나오는 상호격려로 서로 화답할 수 있으려면 성숙한 지체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점차 성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유기체는 생명이 있으며 이 생명은 점차로 자라는 것처럼...언젠가 우리는 시와 찬송가와 신령한 노래로 화답하는 그렇게 기능하는,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 나타나는, 그런 교회가 될 것입니다.
@아비가일 그렇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마태복음 28:18~20
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시고 부탁하신 것들을 잘 지키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모임의 모습입니다.. 공감가는 좋은 글입니다..
이분이 쓰신 책< 이교에 물든 기독교>라는 빨간책이 있지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힘쓰고... 우리 모임에 더욱 필요한 말씀입니다..
맞아요..이분의 책으로 인해 미국에서는 가정에서 모이는 모임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죠.
정말 공감합니다. 감사해요
매일감사님 화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