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가을 (대러시아) 전략'의 명분으로 내각을 대폭 개편할 날, 그의 신경을 거슬리는 책이 세상에 소개됐다. '철의 장군. 인간성 학습'(Железный генерал. Уроки человечности, 이하 철의 장군)이다.
'철의 장군'은 지난 2월 젤렌스키 대통령이 경질한 우크라이나군 총참모장(합참의장 격) 발레리 잘루즈니 장군을 말한다. 그가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에 맞선 우크라이나 방어 작전의 현장 최고 책임자로 일하면서 배운 인간 관계의 교훈, 혹은 최고 지도자 리더십을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안겨주는 책 제목이다. 그는 현재 우크라이나를 떠나 영국 런던에 주영 대사로 가 있다.
'철의 장군' 잘루즈니 전 우크라이나군 총참모장을 다룬 책/사진출처:스트라나.ua
영국의 한 포럼에서 연설하는 잘루즈니 주영 우크라이나 대사/사진출처:텔레그램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철의 장군'을 쓴 이는 잘루즈니 전 총참모장의 (홍보) 참모였던 류드밀라 돌고노프스카다. 그녀는 언론 인터뷰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과 전쟁 초기에 군 총사령관으로 일했던 잘루즈니 전 총참모장을 다뤘다"며 "상사였던 만큼, 일부 내용은 객관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인정했다. 또 "언론인이나 인물 탐구자의 관점이 아니라, 바로 곁에서 (장군을) 지켜본 증인의 관점에서 책을 썼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이 책에서 관심을 끄는 부분은 역시, 잘루즈니 장군과 젤렌스키 대통령 간의 껄끄러운 관계를 다룬 대목이다. 그녀는 잘루즈니 장군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부담을 느낀 대통령실이 견제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불거진 불협화음이 그가 경질된 이유중 하나라고 적었다.
잘루즈니 장군과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갈등은 언론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일찍 시작됐다는 게 '철의 장군' 저자의 주장이다. 그녀는 2021년 대통령실이 잘루즈니 총참모장에게 안겨준 정치적(?) 요구를 한 예로 제시했다. 당시 젤렌스키 대통령은 드미트리 라줌코프 최고라다(의회) 의장과 심각한 갈등에 빠져 있었는데, 대통령실의 한 고위 관리가 잘루즈니 총참모장에게 (우크라이나 군부를 대표해) 의회를 향해 '정치적이고 격정적이며 공격적인 성명'의 발표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잘루즈니 장군은 고민 끝에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 책에는 또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 직전에 잘루즈니 총참모장이 대통령에게 계엄령과 총동원령 발령을 주장한 것으로 적혀 있다. 하지만, 대통령실은 '국가를 공황상태로 빠뜨릴 것'이라며 총참모장의 요청을 거부했다.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은 지금도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의 침공설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은 없을 것이며, 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5월에는 바비큐 파티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 발언을 기억하며 불만스러워 한다고 스트라나.ua는 지적했다.
나아가 저자는 “대통령의 올바른 정치적 결정(계엄령 발동/편집자)은 2022년 2월까지 내려지지 않았고, 이로 인해 러시아가 (전면 공격으로) 우리 영토의 일부를 점령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그러나 "개전 한달 뒤 러시아군의 수도 키예프(키이우)의 포위를 풀고 퇴각한 뒤, 대통령실이 군사작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며 군부와 대통령실 간의 갈등이 그때부터 본격화했음을 시사했다. 또 2022년 가을 남부 헤르손시(市)의 해방에 대한 시각도 서로 달랐다고 했다. 군부는 헤르손의 해방을 '부분적인 성공'으로 간주해 미래를 그렇게 낙관하지 않았으나, 대통령실은 달랐다는 것. 실제로 젤렌스키 대통령은 헤르손 해방을 대대적으로 축하하며, 헤르손 시내에 진입한 우크라이나 기갑부대의 사진을 개인 소셜네트워크(SNS)에 올리기도 했다.
남부 헤르손시에 진입한 우크라이나 기갑부대/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최대 격전지 바흐무트 방어 작전을 놓고서도 군부와 대통령실은 충돌했다. 잘루즈니 장군은 불필요한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일찌감치 바흐무트에서 철수할 계획이었다고 저자는 주장했다. 서방 외신도 바흐무트 방어를 놓고 잘루즈니 총참모장과 젤렌스키 대통령의 의견이 달랐다고 전한 바 있다. 저자는 아예 군부는 맡은 바 임무를 수행했는데, 정치권은 그들을 방해했다고 썼다.
현지 정치 분석가 안드레이 졸로타레프는 스트라나.ua에 "책을 보면, 대통령실의 모험주의가 되돌리기 힘든 영토및 인적 피해를 초래했다"며 "군이 정치에 의해 방해받지 않았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고, 적어도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잘루즈니 장군에 대한 정치적 압력은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심해졌다. 세계적인 언론사조차 그와 인터뷰를 잡기가 어려웠다. 그도 상황과 필요에 따라 내놓아야 하는 메시지가 있었지만 극히 드물었다. 저자는 잘루즈니 장군이 자신에 대한 대통령 측근들의 질투와 견제를 잘 알고, 그들과 갈등을 피하기 위해 언론 인터뷰를 거절했다고 주장했다.
'철의 장군' 저자인 돌고노프스카는 유튜브 채널 'Є питання'(유로 충전, 유로 키우기라는 뜻)와 인터뷰에서는 "총참모장의 소셜 SNS를 관리하면서, 전직 대통령(페트로 포로셴코 전 대통령?)의 특별 후원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했는데, 대통령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며 "장군이 불같이 화를 내며 메시지 삭제를 지시했고, 관리자 권한까지 박탈했다"고 소개했다. "당시 젤렌스키 대통령실은 야당인 '유로연대'(포로셴코 블록)를 이끄는 포로셴코 전 대통령을 대놓고 적대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같은 반응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잘루즈니 장군의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2023년 11월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쓴 칼럼으로 그는 경질을 피해가지 못했다고 책은 적었다. 그가 칼럼에서 쓴 '전쟁의 막다른 골목(교착 상태)' 진단은 서방 진영과 국민들에게 애써 전쟁에 대한 낙관주의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대통령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잘루즈니 총참모장을 다룬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웹페이지 캡처
이 책은 그러나 2023년 3월 이후의 주요 사건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저자가 총참모장의 참모직을 그만뒀기 때문이다. 그것도 잘루즈니 장군에 대한 압력으로 저자는 생각한다.
돌고노프스카는 BBC-우크라이나와의 인터뷰에서 "장군이 출판 전에 이 책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면서도 "이 책은 내가 쓴 것이지, 장군의 것이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다만, 어떤 식으로든 그가 책의 출판에 동의했고, 그의 팀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책으로 볼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트라나.ua도 그녀의 주장에 동의했다. '철의 장군'이라는 책이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잘루즈니의 정치적 미래에 대한 관심을 되새기게 만들었다는 이유에서다. 정치 분석가 졸로타레프도 "이 책이 출판됐다는 것은, 정치인 잘루즈니의 프로젝트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이 책에도 결정적인(?) 힌트가 담겨 있다는 평이다. 유명한 미 예비역 장군이 잘루즈니 총참모장과 대화하는 대목에서다. 미국 남북전쟁에서 북군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율리세스 그랜트(1822~1885년) 총사령관이 화두에 올랐다는 것. 그랜드는 '전쟁 영웅'이라는 신화를 업고 제 18, 19대 대통령에 연속 당선됐다. 50달러 짜리 지폐에도 그의 얼굴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잘루즈니 장군이 스스로 정치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정치적 야망도 드러내지 않으며, 자신에 대한 언론의 평가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고 썼다. 하지만, 분석가 졸로타레프는 잘루즈니 장군의 존재는 이미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우크라이나 정치판의 큰 변수가 됐다고 평가했다.
스트라나.ua는 "비공개 여론조사를 보면, 잘루즈니 장군은 우크라이나를 떠나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가고 있지만, 여전히 대선 결선 투표에서는 현직 대통령(젤렌스키)을 누르고 당선되고, 총선에서도 소위 '잘루즈니 정당'이 제 1당이 될 것으로 나타난다"고 전했다. 친서방 세력도 부패하고 무모한 젤렌스키 대통령의 대안으로 그를 1순위로 꼽고 있다는 평가도 계속 나온다. 젤렌스키 대통령실로서는 잘루즈니 장군이 대선에 나서지 않도록 막거나, 젤렌스키를 지지하도록 만드는 게 최우선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잘루즈니 주영 우크라이나 대사/사진출처:페북@ukraine.in.uk
최대 관건은 전쟁중에는 선거를 치를 수 없기 때문에 전쟁이 언제 어떤 식으로 끝나는가다. 전쟁 종식에 대한 전망은 완전히 안개속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평화안이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은 이미 확인된 상태다.
그럼에도 권력을 추구하는 세력은, 젤렌스키팀이든 반 젤렌스키 세력이든, 늘 선거를 염두에 두고 움직이고 있다. 잘루즈니 장군이 그의 마지막 자리(총참모장)와는 멀리 떨어진 정치권 언저리에서 계속 언급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