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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2. 묵상글 (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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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2.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야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그리고 우리는?
제 생각에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은 이런 질문을 전혀 하지 않고 사는 사람보다
고민은 많이 하겠지만 삶을 잘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하지 않던가요?
세속적으로도 아무 생각이나 고민 없이 장사하는 사람보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사람이 더 장사를 잘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오늘 사람들은 그들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베드로의 답에 따라 인생이 완전히 뒤바뀔 수도 있는 질문입니다.
회개로 치면 큰 회개의 순간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당신들이 주님을 죽였다고 직공을 합니다.
여기서 직공이란 제가 만들어 낸 말로 에두르지 않고 직접 공격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아프게 할까 봐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공을 하니
사람들은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합니다.
그리고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데
이렇게 꿰찔리듯 마음 아픈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피하지 않을 수 있어야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요즘 심기 경호란 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도록
참모들이 알아서 마음 불편할 말들은 차단하는 것인데
이것은 대통령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아주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곧 조금만 직언과 직공을 해도 마음의 상처를 받으니
그 다치기 쉬운 마음과 허약한 심기를 잘 살펴 조심조심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런 심약(心弱)함으로는 ‘네가 죽였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과 같은 직공을 받아들일 수 없고,
그런 충고를 받아들여 큰 회개를 할 수도 없습니다.
전 존재적인 큰 회개(悔改)는 회심(回心)에서부터 시작되는데
회심은 심통 곧 마음이 꿰찔리듯 아픈 것에서부터 시작되지요.
그러니 우리는 우선 이것을 알아야겠고
심통을 두려워하지도 말아야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다는 우리도 지금 하느님을 죽이는 삶을,
이웃도 죽이고 자신도 죽이는 삶을 살고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자유주의적인 정신과 문화에 지배당해
한편으로는 물신주의로 신을 죽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주의로 신을 죽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요즘 하느님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스마트 폰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에서 헤어나지 못해 하느님 말씀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유튜브 방송 없이는 심심해서 한시도 살 수 없는 사람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경쟁과 스트레스를 피해
하느님께로 가지 않고 자연을 찾아드는 사람도 많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자녀다’가 아니라 ‘나는 자연인이다’ 하며 삽니다.
제 생각에 이런 것들에서 돌아서는 것,
이것이 오늘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회개와 세례이고,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회개요 받아야 할 세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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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2.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23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특이한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것도 조그만 이벤트성 행사라 할 수 있는 지역 대회가 아닌 국제 대회가 열린 것입니다. 그 대회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쓰레기 줍기 세계 대회”
정해진 시간 내에 쓰레기를 가장 많이 줍는 팀이 우승하는 경기입니다. 자그마치 21개국에서 참가했고, 이 참가자들은 인근에서 90분간 550kg의 쓰레기를 수거했습니다. 한 참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기든 지든, 모두가 기분 좋은 스포츠였습니다.”
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어떤 훈련을 했을까요? 90분 동안 계속해서 쓰레기를 주울 수 있는 체력을 키웠을 수도 있습니다. 또 쓰레기인 것과 쓰레기 아닌 것을 구별하는 훈련을 했을 수도 있겠네요. 무엇보다도 도시를 깨끗하게 만들겠다는 마음이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쓰레기 줍는 것도 하나의 의미 있는 대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 실천하기 세계 대회’를 한 번 개최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더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채점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특히 자기들의 우승을 사랑의 마음으로 양보할 것이기에 우승자를 가리기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장 행복한 대회가 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만을 보시고 우리에게 많은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는 데 주저할 때가 많습니다. 받는 사랑, 조건적인 사랑, 그래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 대한 사랑을 보여 주는 한 여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그녀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습니다. 왜 울고 있을까요? 누가 때려서 우는 것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 우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주님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 주님의 죽음을 슬퍼하는 눈물이었습니다. 그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주님께서 직접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었음에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자기 이름을 부르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사랑의 마음이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했습니다. 이는 우리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또 사랑을 실천하는 데 주저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을 알아볼 수도 그래서 주님과 함께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만이 주님을 알아보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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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가장 현명한 사람은 자신만의 방향을 따른다(에우리피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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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2.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은 부활 예수님께 대한 막달레나 마리아의 사랑이야기 2탄입니다. 사랑의 장소는 동산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처음 준비되고 이루어진 곳도 동산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산에서 사랑으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 또 다시 동산에서 사랑으로 부활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그렇게 에덴동산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소명을 주십니다.
두 제자는 이미 돌아갔건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차마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울다”의 원어의 뜻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큰소리로 통곡하여 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곧 사랑이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무덤을 들여다보고 하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두 천사를 봅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습니다.”(요한 20,12)
성 그레고리우스는 천사가 있었던 “머리맡”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는 사실을, “발치”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사실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곧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심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또한 그녀는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라는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그랬고(루카 24,13-35),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의 일곱 제자들도 그랬습니다(요한 2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무엇인가를 요청하고 무엇인가를 도와달라고 하는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러기에, 부활 체험은 ‘낯선 이’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낯선 이’의 요청 안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고 ‘눈이 열리어’(루카 24,31)야 할 일입니다. 그분은 나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이집트에서 불러내듯, 동굴에서 불러내듯 나를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이는 당신이 더 이상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아는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자신이 모르는 낮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손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만지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든다.’고 말합니다.
결국, 부활은 다름 아닌 사랑의 승리이며,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결코 그 무엇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은 예수님처럼,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늘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늘 사랑하는 일에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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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2.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더 많이 사랑합시다
우리는 큰일을 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을 보고는 ‘넋이 나갔다.’ 또는 ‘혼이 나갔다’고 말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마리아는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큰 슬픔에 잠겨 이른 아침 무덤을 찾아왔는데 무덤이 비어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너무도 놀라 그저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는데 예수님께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몰랐습니다. 오직 빈 무덤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니 다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동을 통해서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십자가 죽음을 끝까지 지켜볼 수 없었을 것이고, 더더욱 향유를 준비하여 이른 아침 무덤에 달려올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큰 사랑을 지닌 마리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20,16).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고, 마리아는 “라뿌니!” 하고 불렀습니다. 그야말로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10,14). 고 하신 그대로입니다. 결국 마리아의 지극한 사랑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직접 보여주기까지는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20,17).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사명을 줍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아버지가 곧 나의 아버지이시고, 주님의 하느님이 곧 나의 하느님이시니 나는 그분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20,18).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듯이 우리고 하느님의 아들, 딸로서 주님을 전해야 할 소명을 줍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을 뵙고 전하였듯이 우리도 더욱 간절한 사랑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아울러 그 주님을 전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더 많이 사랑합시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그 사랑이 주님으로 나오지 않고서는 주님을 참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합시다. 사랑하지 않고는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사랑합시다.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합시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꽃 - 김춘수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이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관계가 그럴까? 나와의 관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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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2.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가슴이 벅찼던 때가 있다면 언제가 있을까요? 저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떠오릅니다. 월드컵 사상 첫 16강은 가슴 벅참의 시작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8강전에서 이탈리아와 연장전까지 가고 안정환 선수의 결승 골로 4강으로 진출했습니다. 4강전에서 대한민국은 스페인과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전 끝에 골키퍼 이운재 선수의 선방과 홍명보 선수의 결승 골로 4강에 진출했습니다. 비록 결승전의 문턱에서 독일에 패배했지만 2002년 대한민국은 둥근 축구공 하나로 축제의 날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멋진 말들이 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현수막입니다. 히딩크 감독이 했던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라는 말입니다. 서울의 광화문과 시청을 가득 메운 응원단이 있었습니다. 저도 본당의 마당에서 교우들과 함께 대한민국 축구를 시청하면서 응원했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붉은 악마’로 불리던 빨간 응원복과 ‘대한민국’이라고 외치며 응원했던 박수입니다. 아! 또 가슴 벅찼던 기억이 있습니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트럭에 소를 싣고 판문점을 넘던 장면입니다. 그 일이 물꼬가 되어서 남과 북의 경제협력 상징이 되었던 ‘개성공단’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가슴이 벅차오르는 뜨거운 축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에게도 가슴 벅찬 일들이 몇 번 있었습니다. 제가 투표했던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입니다. 8번의 대통령 선거에 투표했고, 3번은 제가 투표했던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투표한 후보가 두 번 더 대통령이 된다면 제가 투표한 후보가 50%는 당선되는 것을 볼 것 같습니다. 국민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대통령을 선출하는 투표는 한바탕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학력고사를 보고 신학교에 지원했을 때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합격 여부를 알 수 있지만 당시에는 직접 학교에 가서 벽보에 적혀있는 이름을 확인하였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저의 이름을 확인했을 때 가슴이 벅찼습니다. 공부에 그리 취미가 없었는데 10 등 안에 들면 자전거를 사준다는 달콤한 유혹에 공부했었습니다. 드디어 10등 안에 들었는데 친구들도 선생님도 저의 실력을 믿지 못하고 커닝했다는 의혹의 눈초리로 대하였습니다. 서운함과 억울함에 코피가 나도록 공부했고, 커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등수를 얻었을 때도 가슴이 벅찼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가슴 벅찼던 것은 1991년 8월 23일 사제서품을 받을 때입니다. 바닥에 엎드려 기도할 때입니다. 서품식에 참석한 교우들은 모두 ‘성인 호칭기도’를 불러주었습니다. 성인들의 전구 함을 청하며 주님의 제단에 봉사할 수 있는 사제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언제 가슴 벅찬 체험을 하셨는지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전에 베드로 사도는 나약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물 위를 걷다가 두려움을 느꼈고,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건져 주시면서 ‘왜 이렇게 믿음이 약하냐?’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두려움에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절망에 빠지고, 어둠 속으로 빠졌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전에 세상 것을 먼저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베드로 사도는 예전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당당했고, 두려움도 없었고, 지혜로웠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날 밤에만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에는 많은 순교자가 있습니다. 배움이 부족했던 백정도 주님을 증거하며 순교하였습니다. 아직 어린 소년도 기꺼이 목숨을 바쳐서 순교하였습니다. 기력이 약한 노인도 순교하였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일에는 지식도, 나이도, 건강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성령을 받으면 주님께서는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지혜를 주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서 ‘마리아’라고 부르셨을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마리아는 ‘라뿌니!’라고 가슴이 벅차 소리쳤습니다. 사도들도 마리아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렇게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서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신앙은 시작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제 모든 우선순위를 주님께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즐겼던 오락, 취미, 만남이 뒤로 밀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와 선교 그리고 나눔의 삶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이제 내 삶의 우선순위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도록 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슴 벅찬 목소리로 ‘라뿌니’라고 소리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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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2.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마리아 막달레나는 울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주님의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주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본 후 눈물을 흘립니다.
막달레나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보고 싶은 마음과 조금 더 잘해 드리지 못했던 후회스러운 마음, 그리고 살아 계셨을 때 전해주신 사랑에 대한 고마움…. 이 모든 것들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눈물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나 서럽게 울고 있었으면 앞에 서 있는 분이 주님임에도 그녀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녀에게 물으십니다.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말입니다. 그 물음에 그녀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자신의 청을 말합니다. 주님의 시신이라도 만나고 싶다는 청을 말입니다.
그 청원이 주님의 마음을 울렸는지 주님께서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불리자마자 그녀는 그분을 알아봅니다. 눈물이 멈춰 알아본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모든 감각으로 그분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부르심에 그녀 또한 ‘스승님’이라는 말로 화답합니다. 그렇게 눈물 안에서 주님과 마리아 막달레나는 서로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 장면에서의 주님의 얼굴이 보이는 듯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를 바라보시며 활짝 웃고 계신 주님의 얼굴 말입니다. 고맙고, 대견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바라보시는 것 같은 주님의 얼굴이 보이는 듯합니다.
우리도 온 마음으로, 온몸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눈으로 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으로 말입니다. 그 환한 주님의 미소가 우리 앞에 계심을 믿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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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마음은
언제나 같습니다.
아침마다 봉헌된 초를 켭니다.
쓰인 이름만 다를 뿐
다 같은 초입니다.
그런데 초를 켜다 보면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초가 똑같은 시간에 불이 붙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금방 붙습니다.
어떤 것은 심지를 한참 대고 있어야 붙습니다.
그렇게 매일 400여 개의 초를 켭니다.
이 초 다르고 저로 다르지만
다 켜고 마침 기도를 할 때는 한가지 마음뿐입니다.
예쁘게 잘 타기를….
이분들을 위해 봉헌한 분들의 기도가
하늘에 잘 전달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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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2.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과 회개의 여정”
-만남, 회개, 치유-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 위에 있나니,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제 살리려 하심이네.”(시편33,18-19)
세상 모두가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회개가 답입니다. 회개할 때 주님을 만나고 참나를 발견합니다. 사랑의 열정이 회개에로 이끌고 주님을 만나게 합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회개뿐입니다. 영혼의 치유와 건강에 회개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전적인 방향전환이 회개입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주님과의 만남과 회개는 함께 갑니다.
살아 있을 때 사랑이요 기도요 회개이지 죽으면 사랑도 기도도 회개도 끝입니다. “사랑하라, 기도하라, 회개하라”고 우리 삶이 연장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도 기도하기도 회개하기도 턱없이 짧은 인생인데 미워하며 원망하며 불평하며 싸우며 살기에는 너무 허망하고 억울합니다. 참된 겸손도 지혜도 사랑도 회개의 열매입니다. 오늘 다산 옛 어른이 말씀도 저에게는 회개의 표징입니다.
“제 식구는 챙기지 못하면서 밖에서 큰 뜻을 이룰 수 있겠는가? 먼저 살림을 마련한 다음 시(詩)와 예(禮)를 배워 가슴에 쌓으라.”
“늘 가난하면서 인의(仁義)를 말하기 좋아한다면 그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참으로 회개한 지혜로운 이들은 아주 현실적이 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땅의 현실에 지극히 충실합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깨우침이 되는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다(the more spiritual...the more real)”란 말마디도 회개의 여정에 충실한 이들이 공감하는 진리입니다. 땅깊이 뿌리내릴수록 하늘 높이 가지들 뻗는 살아있는 나무들 이치와 똑같습니다. 일어나자 마자 열어본 다음 카톡 메시지도 회개의 표징입니다.
“신부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신부님의 건강과 행복은 우리들의 행복입니다.”
이런 사랑의 메시지가 회개를 촉발합니다. 정말 변할 것은 누구도 아닌 나부터요, 끊임없는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회개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끊임없이 내적변화의 회개를 통해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아주 오래전 읽은 영어 말마디도 문득 생각이 납니다.
“As you are, so is the world”(네 정도만큼 세상도 그 정도다)
내가 먼저 변할 때, 이웃도 세상도 환경도 변한다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부단히 주님을 닮아 변하고 새로워질 때 주변도 세상도 점점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무지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도 평생 회개의 여정을 통해 가능해집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도 회개를 통해 이뤄집니다.
오늘 말씀도 역시 회개가 주제입니다. 슬픔중에도 샘솟는 사랑의 열정으로 주님을 찾아나선 마리아 막달레나, 아직은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무덤에서 찾으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 막달레나와 주님과의 만남의 과정은 언제 읽어도 흥미진진합니다. 우선 예수님의 빈무덤 안에서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가 이뤄집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곧 이어지는 부활하신 주님과 마리아의 대화입니다. 주님을 앞에 보면서도 주님을 모릅니다. 회개로 눈이 밝아져야 보이는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똑같은 주님이지만 눈이 열려야 보이는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주님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묻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정원지기로 착각한 듯 하지만 마리아의 말이 맞습니다. 정원이 상징하는바 에덴동산이고 바로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를 돌보는 정원지기는 부활하신 주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파스카의 예수님은 정원지기이자 생명나무도 됩니다. 내 삶의 자리, 새로워진 에덴동산에서 만나야할 정원지기이자 생명나무가 되는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바로 이 생명나무의 열매인 성체를 모시는 미사시간입니다.
회개의 은총입니다. 마리아의 사랑에 감격하신 주님의 부르심에 의해 이뤄지는 마리아의 전격적 회개입니다. 주님이 마리아를 부르시지 않았다면 결코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하고 불르니, “스승님!”이란 뜻이다.’
이때의 감격은 토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 외치던 장면과 흡사합니다. 착한목자 주님의 부르심에 돌아서서 즉각적으로 주님을 부릅니다. “돌아서서”란 말마디가 상징하는바 파스카의 회개를 상징합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어둠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이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파스카의 주님을 만나 새롭게 살아나니 이제 옛 마리아가 아닙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부활하신 주님과 유일무이한 관계에 있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남은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 칭하시니 이제 우리들에게 파스카의 예수님은 스승이자 형님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회개와 더불어 예수 형님과 날로 깊어가는 우애(友愛)의 여정,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합니다. 이것은 ‘교의(doctrine)’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experience)’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회개의 여정중에 끊임없이 주님을 만나는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뜻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어제에 이어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가 계속됩니다. 회개와 주님과의 만남으로 완전히 새로 난 베드로는 옛 베드로가 아닙니다. 열화와 같은 설교로 회개하는 모습들이 흡사 산불처럼 번져나가는 모습입니다. 그날 3천명이나 세례를 받았다하지 않습니까? 베드로의 설교에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니다...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회개하십시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날마다 우리의 회개를, 우리의 세례를 새롭게 하는 이 거룩한 평생성사인 성체성사의 은총이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회개의 여정, 주님과 만남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를 이뤄주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저희를 치유해 주셨으니, 천상선물도 풍성히 내리시어, 지금 세상에서 맛보는 기쁨과 자유를, 하늘에서 온전히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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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2.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봄 너머 알아봄>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요한 20,14)
내 앞의 당신을
보고 있으면서도
미처 알아보지 못함은
내 안의 당신이
오히려 더욱 더
또렷하기 때문이니
내 안의 당신이
내 앞의 당신을
한 치도 가리지 않게
늘 새로이
내 앞의 당신을
내 안에 모시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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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2.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요한 20,14)
부활에 닫혀 있었던 마리아의 눈
그분은 알려지지 않았을 때와 알려졌을 때가 서로 다른 분입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같은 분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분을 알았느냐 아니냐는 그들의 눈에 달려 있었습니다. 보이는 분에게 달린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그들의 눈을 통제하신다는 점에서는 그분께 달린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알아보지 못한 잘못이 주님의 육체 탓이 아니라 그들의 눈이 닫혀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도록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1).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은 이들 기운데에서 그분을 찾고 있는 동안에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한 것이 바로 이런 까닭입니다. 그 뒤 마리아는 그분을 알아보았고, 그때는 그분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히에로니무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본 설교에서도 그는 의식의 세 오솔길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본 설교에서만 그는 우리의 피조물 사랑을 하느님 사랑과 비교한다. 그는 하느님이 무엇보다도 먼저 피조물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수많은 금욕주의자와 근본주의적 심령주의자가 한 것처럼 이 영성의 오솔길을 건너뛸 수 없다. 하느님이 익혔고, 우리가 배워야 할 첫 번째 사랑은 자연적인 선함으로 모든 피조물을 지은 하느님의 사랑이다. 엑카르트가 역설한 대로, 우리는 이러한 자연 사랑과 피조물 사량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화불량이나 냉소주의, 창조계를 학대하는 우리의 문화나 우리의 ‘불량 신학’이 우리를 오염시켜, 존재하는 것을 잘못 사랑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창조계는 선한 하느님으로부터 흘러 나온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이 자신과 함께 자신의 선함을 누리게 하기 위해 창조계를 지었다.(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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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교황 프란치스코의 찬미받으소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11.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통합 생태론이 수학과 생물학의 언어를 초월하는 범주에 대한 개방성을 요청하고 인간다움의 핵심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와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해와 달 또는 가장 작은 동물들을 바라볼 때마다 모든 피조물을 찬미하며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성인께서는 모든 피조물과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꽃 앞에서 설교하시며 꽃이 마치 이성을 지닌 듯 주님을 찬미하도록 초대하셨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그분의 반응은 지적 평가나 경제적 계산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에게 모든 피조물은 사랑의 유대로 자신과 결합된 누이였습니다.
그래서 성인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돌보아야 한다는 소명을 느끼신 것입니다. 그의 제자인 보나벤투라 성인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물의 공통 원천에 관한 성찰로 더욱 커다란 측은지심에 찬 성인께서는 아무리 하찮은 피조물이라도 ‘형제’나 ‘누이’로 부르셨습니다.”
그러한 확신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선택에 영향을 주기에 순진한 낭만주의로 폄훼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연과 환경에 접근하면서 이러한 경탄과 경이에 열려 있지 못하고, 세상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우애와 아름다움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즉각적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는 지배자, 소비자, 무자비한 착취자의 태도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것과 내밀한 일치를 느낀다면 냉철함과 배려가 곧바로 샘솟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청빈과 검소는 피상적인 금욕주의가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곧 현실을 단순히 이용하고 지배하기 위한 대상으로 삼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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