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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벨의 간계와 나봇의 죽음
열왕기상 21:5-16
5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의 마음에 무엇을 근심하여 식사를 아니하나이까
6 왕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네 포도원을 내게 주되 돈으로 바꾸거나 만일 네가 좋아하면 내가 그 대신에 포도원을 네게 주리라 한즉 그가 대답하기를 내가 내 포도원을 네게 주지 아니하겠노라 하기 때문이로다
7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이르되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하고
8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치고 봉하여 그의 성읍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내니
9 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에 높이 앉힌 후에
10 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라 하였더라
11 그의 성읍 사람 곧 그의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이 이세벨의 지시 곧 그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하여
12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매
13 때에 불량자 두 사람이 들어와 그의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언을 하여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고
14 이세벨에게 통보하기를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 하니
15 이세벨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 이세벨이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
16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
왕상 21:5-16 /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방으로 들어와 왕에게 물었다. `이게 웬일입니까? 무슨 근심이라도 있어서 식사를 못하는 것입니까?' 6) 아합이 대답하였다. `내가 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포도원을 팔거나 다른 밭과 바꾸자고 몇번이나 이야기하였소. 그런데도 그는 끝까지 버티고 있소' 7) 그러자 이세벨이 장담하였다. `임금님께서 그만한 일로 근심을 하십니까? 이제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 즐겁게 식사를 하십시오. 나봇의 포도원은 제가 당장 손을 써서 임금님의 소유로 돌려놓겠습니다.' 8) 이세벨은 아합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옥새로 봉인하여 이스르엘 성읍에 사는 장로들과 유력한 인사들에게 보냈다. 9) 그 편지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여러분은 단식하며 참회하는 날을 하루 선포하시오! 주민들을 한 곳에 모으고 나봇을 맨 앞에 앉히시오. 10) 그 앞에 파렴치한들을 앉혀 놓고 이렇게 증언을 시키시오.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그런 다음에 나봇을 성문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죽이시오.' 11) 이스르엘 성읍의 장로들과 유력한 인사들은 이세벨의 지시대로 하였다. 12) 그들은 주민들에게 참회의 날을 선포하고 나봇을 맨 앞에 앉혔다. 13) 그 앞에는 건달패 두 사람이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나봇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혈기를 부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증언하였다.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소' 그러자 사람들은 나봇을 성문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죽였다. 14) 이스르엘 성읍의 장로들이 즉각 이세벨에게 보고하였다. `나봇이 돌에 맞아죽었습니다.' 15) 이세벨은 그 소식을 듣고 아합에게 말하였다. `이제 나봇의 포도원이 임금님의 것이 되었으니 어서 일어나 차지하십시오. 그 밭을 임금님께 팔지 않으려던 나봇이 벌써 죽었습니다.' 16) 나봇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아합은 그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하여 일어나 내려갔다.
포도원을 소유하고자 했던 아합은 나봇의 거절로 근심하며 식사도 거르자 이세벨은 간계를 써서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탈취합니다.
이세벨의 반문(5-7) 아합은 이세벨에게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면서 나봇의 거절 이유는 전혀 언급치 않고 단지 거절한 것 자체만을 문제 삼습니다. 이는 그가 사건의 본질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합에게는 여호와의 율법과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는 나봇이 정당한 구실을 붙여 그의 제의를 거절한 것이 불쾌하고 속이 상할 뿐입니다. 이세벨은 식사도 거른 채 근심하는 아합 왕을 나무라며 ‘그러고도 당신이 이스라엘의 왕 이십니까?’라고 반문을 합니다. 이세벨은 자신이 왕의 소원대로 포도원을 바치겠다고 말했는데, 문화가 다른 한 여인의 영향력이 하나님의 율법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세벨의 간계(8-10)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율법제도를 알았습니다. 따라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았습니다. 그녀는 나봇의 성읍에 사는 지도자들에게 왕의 직인이 찍힌 편지를 보냅니다. 그 내용은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법정의 피고인석에 앉혀서 두 거짓증인을 내세워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증거를 삼아 반역과 신성모독 죄로 처형하라는 간계였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공적인 금식선포는 국가적인 큰 고난이나 재앙이 임했을 때, 또는 공동체 내에 숨겨져 있는 악행이나 죄에 대해 집단적으로 참회한다는 의미에서 왕이 금식을 선포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세벨은 나봇을 죄인으로 몰아 죽이기 위해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율법과 경건을 악용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녀는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여호와 하나님도 이용하는 교활하고 사악한 여인이었습니다.
나봇의 죽음(11-16) 나봇의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인들이 이세벨의 편지대로 순응합니다. 사실 장로와 귀인들은 지도층 사람들로 백성들의 권익 보호와 율법 준수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보다도 모범적이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과 야합하여 율법을 무너뜨리고 백성을 억압하는 자들로 전락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도덕적 타락상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나봇의 충성스러운 죽음은 무법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법대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길이지만 우리가 꼭 걸아가야 할 길임을 보여 줍니다. 나봇이 죽자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내려갔습니다.
적용: 이세벨의 악한 음모와 두 사람의 불량배의 증언으로 어리석은 대중들의 모습을 봅니다. 모두가 손에 돌을 듭니다. 여론 몰이를 하는 어느 한사람의 구호에 의인 나봇은 피투성이가 되어 죽습니다. 지금 내 손에 돌이 들려있지는 않은지요?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항상 투덜거리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이 보기에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기적이고 배움이 부족하고 무례한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길에서 마을에 유명한 철학자를 만났습니다. 이 철학자는 평소 인품과 학식이 높아서 청년이 유일하게 불만을 품지 않고 인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비열하고 천박한 사람은 싫습니다. 저기 저 한심하게 보이는 사람을 보세요. 삐딱하게 서 있는 모습이 얼마나 예의가 없습니까? 지저분한 옷차림만 봐도 남을 위한 배려심은 전혀 없을 것 같습니다. 마을에 이런 사람들뿐이니 제가 마을 사람들을 어떻게 좋아하겠습니까?” 그러자 철학자가 청년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저기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거울이에요. 저 사람은 거울에 비친 당신입니다.”
< 설 교 >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라
열왕기상 211-10
옛날 이스르엘에는 나봇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포도원을 갖고 있었는데 아합왕의 궁 근처에 있었습니다. 아합왕의 원궁은 사마리아에 있었고 이스르엘에는 별궁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합이 나봇에게 포도원을 사서 정원을 만들고자 포도원을 팔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포도원 대신 돈으로 주든지, 더 좋은 포도원을 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아합왕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왕의 요청을 거절하기는 쉽지 않지만 분명한 신념을 갖고 거절했습니다. 나봇은 조상의 유산인 땅을 파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이유로 팔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아합왕은 마음이 무척 상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법을 알고 있는 아합왕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단지 화가 나고 분하여 궁에 돌아와서는 침대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음식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 이세벨이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합은 자초지동을 이야기했습니다. 나봇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털어 놓았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이세벨은 기가 막혔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그까짓 일로 고민하고 있느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나봇의 포도원을 임금의 것으로 만들어 줄 테니 걱정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성읍의 장로와 귀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앉히고, 건달 두 사람으로 증인을 세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거짓증언하게 하여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위의 본문이야기 속에는 4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째는 나봇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욕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합같은 사람입니다. 셋째는 이세벨로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숨과 부귀영화를 지키기 위해 권력의 시녀 노릇하는 줏대 없는 사람들입니다.
1.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사람
나봇은 포도원을 팔라는 아합왕의 요청을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거절하였습니다. 왕이 거저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돈으로 주든지 더 좋은 포도원을 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이라고 거절하였습니다. 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나봇이 아합에게 이르되 내 조상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는 여호와께서 금하실 찌로다” 아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려는 나봇의 당연한 저항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요, 이를 자손 대대로 지키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팔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려면 나봇과 같은 결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사람들로 그려져 있습니다. 노아가 그렇고 아브라함이 그렇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 준행하였습니다. 모든 동물들의 암수 한 쌍씩 넣어야 하는 큰 규모의 배였습니다. 하루 이틀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큰 조선소를 운영하던 때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 준행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이러한 노아와 더불어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들로 표현했습니다.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라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아브라함의 행위를 믿음의 행위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모험이었습니다.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랐습니다.
■ 주한 미국대사를 역임한 레이니시는 에모리대학의 총장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이러한 일화가 있습니다. 에모리대학교의 교수시절에 그는 30분 거리를 걸어서 출퇴근하였습니다. 그런데 노중에 혼자 햇볕을 쬐고 있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척 쓸쓸해 보였습니다. 레이니씨의 마음에는 노인을 섬기라는 성령의 감동이 왔습니다. 무척 바쁜데 어떻게 저 노인을 섬기라는 것인지 의심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서 노인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차도 같이 마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노인은 코카콜라 회사의 전 회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주식의 3%를 레이니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고마운 교수에게 은혜를 크게 갚았습니다. 레이니는 그 돈을 학교에 기부하였고 후에 이사회에서는 그를 총장으로 추대했던 것입니다. 힘들어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따랐던 사람에게 하나님은 귀한 것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2. 하나님의 뜻과 욕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
아합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욕심 때문에 포기하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이 뜻과 자신의 욕심 사이에서 갈등으로 인하여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업을 왕께 줄 수 없다 함을 인하여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궁으로 돌아와서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이키고 식사를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음을 인하여 고민하는 모습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도 많이 있습니다. 바울이 이 점을 잘 지적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육체의 소욕 사이에서 갈등으로 인하여 고민하면서 자신을 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져낼 수 있는지를 토로한 바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고 갈등으로 인하여 고민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것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뜻과 자신의 소욕이 충돌하면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고민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질 것인지, 아니면 피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면 십자가를 지겠다고 결단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8-39절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순종할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갈등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따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3.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이세벨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거짓과 술수를 이용했습니다. 그녀는 고민하는 아합왕에게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성읍의 장로와 귀족들로 하여금 거짓 증인을 세워 나봇을 죽이라 하였습니다.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죽였습니다. 금식까지 선포하고 그럴듯하게 위장하였습니다.
이세벨은 무서운 여인이었습니다. 나봇은 이세벨의 술수 앞에서 무력하게 죽었습니다. 이세벨이 승리한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승리는 아니었습니다. 후에 하나님은 예후를 들어 아합의 집을 쳤고 이세벨도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사람이 갚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갚으셨습니다. 이세벨이 무섭고 강한 여인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거짓과 술수를 쓰다가 망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성도들 중에도 많이 있는데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개중에는 목사와 장로들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별별 수단 방법을 동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금도금한 납덩이를 금덩이라고 속여 수억대의 돈을 갈취한 사기꾼이 있습니다. 송파구 삼전동의 정 모 씨가 주인공입니다. 그는 25㎏짜리 납덩이를 도금하여 금괴처럼 만들어 금도매상을 운영하는 하모씨를 찾아가 진짜 금값의 절반에 팔았습니다. 하씨는 너무 싸니까 출처도 묻지 않고 몇 개 더 구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기꾼 정씨는 10개가 더 있다며 선금조로 1억 2천 5백만원을 받고는 줄행랑을 쳤습니다. 돈만 되면 무엇이든 하는 무서운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서울 변두리 어느 복개천 공사장에서 밤이면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는 복개천 밑에서 들려왔습니다. 순찰 중이던 순경이 하루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밑으로 내려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소리는 철근을 뽑기 위하여 콘크리트를 치는 망치소리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복개천의 철근을 뽑아내면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가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순경은 두 사람을 끌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알아보니 한두 달 가량 그렇게 철근을 뽑아 팔아먹었다고 합니다. 순경이 매일 밤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수요일과 일요일 밤에는 안했다고 대답했답니다. 수요일 밤과 주일 밤에는 교회에 가야 하기 때문에 하지 않았다고 말해서 창피를 당했습니다. 돈만 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또 이런 사람들 주위에는 침묵하는 하수인들이 있습니다. 이세벨의 지시에 따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거짓으로 누명을 씌워 죽게 만든 장로들과 귀인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악을 보고도 침묵하고 불의와 타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악을 주도하는 사람이나 그 하수인이나 똑같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의 대상입니다.
아합 : 하나님
열왕기상 21:1-29
몇년 전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가 이륙한지 두어시간만에 기류변화를 만나서 아주 심하게 흔들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서있던 사람은 붕 떠서 지붕에 부딪친 후에 떨어졌고 식기는 여기 저기로 튀어 날아가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몇 사람의 부상자가 생겼고 결국 그 비행기는 기수를 다시 돌려서 출발지였던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한명이 TV에서 그 때를 표현하는데 처음에 와장창하면서 일이 벌어지고 난 후에 비행기 안은 삽시간에 엉망이 되어 버리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울고, 비명을 지르고 그러는 가운데 이 사람은 퍼뜩 “아! 우리가 여기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이런 표현을 쓰더군요.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건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인가?”
저는 오늘 이 성경구절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는데 그 사람의 말이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람,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지점을 지난 사람 바로 이 아합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합은 한 마디로 얘기하면 유능한 사람입니다. 그가 다스리던 시절 이스라엘의 국력은 어느 정도 강했고 그 당시에 세력이 조금씩 커지고 있던 앗시리아를 견제하면서 국제 정세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정치를 했던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견된 앗시리아의 살만에셀왕의 컬크 석비에도 나오고, 모압 비문에도 그 이름이 나옵니다. 썩 좋은 일로 쓰여진 것만은 아니지만 어째튼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것이지요. 그런 유능한 사람이 영적으로는 어떻게 그렇게 둔감한지 하나님이 싫어 할만한 짓만 골라서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그를 기다려 주시고, 또 예언자들을 보내서 끝도없이 음성을 들려 주시는데 그는 듣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멸망의 길로 갑니다. 그리고는 어느날 그는 결국 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나고 마는데 우리가 오늘 살펴볼 이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바로 그 마지막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아합의 삶의 태도에 대하여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렇게 하나님께 반하는 삶을 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의 인생에 어떻게 심판은 닥치는지 하는 것을 살펴보면서 우리들의 삶 속에는 그런 점이 없는가 하는 것을 돌아보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아합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다시한번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1. 철저하게 하나님을 외면한 아합의 인생
1. 너무나 세상적인 삶의 태도
첫번째 아합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그 철저하리만큼 세상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그의 인생 전반을 걸쳐 죽 보면 아합은 일생동안 얼마나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나 하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먼저 두로와 시돈으로 유명한 페니키아의 왕이며 동시에 아스다롯신의 제사장이었던 사람의 딸인 이세벨과 결혼을 합니다. 하나님이 절대로 금하셨던 이방인과의 결혼이었고 특히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마술하는 자의 딸과의 결혼이었습니다. 이 결혼을 통하여 이스라엘 전체가 얼마나 우상숭배에 빠지는지는 굳이 성경을 읽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유가 나오지 않지만 아마 이것은 몇가지 이득을 노린 정략 결혼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지중해의 무역 상권이 시돈과 두로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그 이득의 참여를 노린 측면도 있을 것이고, 또 이스라엘은 좌측이 바다이고 우측이 사막이어서 적은 항상 북쪽에서 오는 법이니 북쪽의 강국과 결혼을 함으로써 방파제 역할을 기대했던 것이겠지요.
그는 또 이 이야기 바로 전 20장에 나오는 벤하닷과 전쟁을 하는 장면에서도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시리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직접 싸우시고 그리고 난 후 벤하닷을 죽이라고 하시거든요. 그런데 그는 그를 살려보내면서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이것도 보면 그가 인정이 많아서 살려주었다기 보다는 무역 협정을 통한 이득을 얻을려는 심산이 있었던 것 같고 또 앞으로 다가오는 앗시리아의 남진에 대한 연합이 목적이었던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합은 정말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고 자기의 지혜와 술수를 앞세워 내 머리로 살려고 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 반대로 좋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왕이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무역에 신경을 쓰고,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건가?”그렇지요.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는 것 자체에는 잘못이 없지요. 하지만 이 사람의 잘못은 그런 일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신정국가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17:18절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은 자기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기를 힘써야 하는 데 이 사람은 하나님의 방법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그의 철저한 세상적인 삶의 태도가 그를 멸망의 길로 내 몰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 세상적인 삶의 태도에 대해서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나라로 불러주시면서 이제는 네 방법과 네 생각대로 살지 말고 나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살아라 하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럼에 불구하고 우리는 많은 경우 여전히 내 방식으로 삽니다.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도 여전히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업을 하고, 그것이 나에게 이득이 된다 싶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에 대해서는 고민도 한번 안해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뭐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일상에서 하나님의 방식대로 사는 것이 참 힘이 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을 해도 무슨 문제만 생기면 어느새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내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는 나를 발견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왜 이렇게 하나님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힘이 드는가? 그것은 우리의 습관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너무 내 방식대로 사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꼭 무슨 Program이 되어 있는 사람처럼 어떤 일이 벌어질 때 자동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행동을 취하는가 하는 것이 결정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생기면 0.1초내에 내 머리가 막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하고, 저런 상황에서는 저렇게 하고 그리곤 자동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런 내 방식이 의로울 때가 얼마나 되냐 말이예요. 전부 내 잔머리 내술수 아니냔 말이예요. 그래서 우리는 일단 내 안에 Program 되어 있는 내 생각, 내 방법이 위험하다는 것, 일단은 하나님과 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경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새로 시작하시는 분 들일수록 무슨 일이 생기면 일단은 멈추어 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생각과 내 방법이 나를 점령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럴려면 조바심을 내지 말아야 해요. 왜냐하면 어떤 일이 탁 벌어지면 나한테 가장 먼저 오는 것은 조바심입니다. 이거 빨리 처리해야해. 이거 이렇게 대처해야해. 그리고 이런 조바심이 나를 옛날 생각과 옛날 방식대로 행동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빌립보서 4:6에서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면서 일단 조바심을 조심하라고 하지요. 그리고나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을 묻는다는 것 아닙니까.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번 싸워도 이긴다고 했습니다. 먼저 나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Program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고, 무슨 일이 있을 때 우선 멈추어 서서 이것이 누구의 생각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방법은 아닌가 꼭 여쭈어 보시고 행동하셔서 세상적인 눈으로 살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시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탐욕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함
두번째 그를 진노의 자리로 모는 것은 탐욕입니다. 아합의 궁전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 있는데 아마도 이스르엘 지방에 그의 두번째 궁전, 즉 여름용 별장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그 별장옆에 정원을 만들려고 포도원을 팔으라고 하는데 나봇이 율법을 이유로 팔지를 않으니까 아합이 속이 상했다 는 그런 얘기입니다. 이것은 레위기 25장에 있는 규정인데, 하나님께서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땅은 사고 팔지 못하고 혹시 피치못할 사정에 의해서 팔았다 하더라도 7년이 지나면 다시 원래 주인에게로 돌아간다는 규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규정의 배경에 있는 생각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니까 이 땅에서 과도한 욕심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재산을 불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갖 촌부인 나봇이 이 율법의 규정을 얘기하면서 왕의 얘기를 거절하니까 아합이 속이 상한 겁니다.
그런데, 한편 이 아합의 별장이 있었던 궁터는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견이 되어서 지금은 일반인들에게 공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갔다 온 사람에 따르면 그 주위 경관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답니다. 동쪽으로는 20마일 떨어진 곳에 요단강이 보이고, 동북쪽으로는 갈릴리 호수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30마일정도 떨어진 곳에 지중해가 보이는 기가 막힌 전망을 가지고 있는 곳인데 여기에 별장이 있었던 거에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별장이지요. 그런데 그는 이런 아름다운 별장에 또 더해서 정원에 욕심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가난한 농부의 포도원을 탐을 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탐내어도 갖지 못하니까 살인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야고보서 4:2-3절의 말씀과 이렇게 똑같은지. 그래서 문제는 탐욕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시점에서 탐욕에 대해서 좀 생각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 아무도 탐욕에 자유스러운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분은 나는 돈에 욕심이 없다고 하실 분이 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분은 대신 뭔가 다른 것에 욕심을 가지고 있을 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명예를 얻는 것에 욕심이 있고, 어떤 분은 뭔가를 수집하는데 욕심이 있고, 어떤 분은 집을 꾸미는데 욕심이 있고, 또 어떤 분은 더 좋은 차를 가지는데 욕심이 있고. 뭔가 분명히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욕심의 마음은 만족시키면 시킬수록 조금 더 조금 더 하면서 자랍니다. 아합도 그랬겠지요. 그는 먼저 사마리아에 있는 자기의 궁전을 예쁘게 꾸몄을 겁니다. 그리고 나서 더 이상 할 것이 없으니까 그 다음은 별장을 만들고, 그리고 나니까 이제는 이제 정원이 아쉬운 거예요. 이렇게 우리의 욕심은 채우면 채울수록 끝없이 자랍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심해지면 탐욕이 되고, 탐욕은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가린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이런 경험이 있지요? 탐욕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리는 것을 경험해 봤지요. 예를 들면, 뭔가 한번 가지고 싶은 생각이 나면 그것만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잠에서 깨면 그 생각이 나고, 직장에 와도 그 생각이 나고, 기도를 하려고 눈을 감아도 그게 왔다갔다하고… 뭐 완전히 우상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골로세서 3:5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심이 탐욕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그 욕심을 이기기 위해서, “Okay, that is it.” “자 이걸로 됐다.” 즉, 이 일에 대해서는 이걸로 끝이다 하는 어떤 선언이 도움을 주더라구요. 그래 이 일에 대해서는 이걸로 만족한다는 선언입니다. 즉 내 욕심에 한계선을 긋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꾸 내 욕심에 끌려갑니다. 자동차도 그래 나한테는 이걸로 됐다. 집도 그래 나에게는 이걸로 됐다 하고 자꾸 한계선을 긋지 않으면 우리는 늘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 하면서 그것을 쫒아 다니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욕심을 제어하지 않으면 우리는 늘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보세요. 많은 분들이 2,000불을 벌때 허덕허덕하면서 내가 1,000불만 더 벌면 조금 낫겠다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1,000불을 더 벌어도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가 않아요. 왜 그런줄 아세요? 차를 조금 큰것으로 바꿨거든요. 그래서 1,000불을 더 버는 데도 전과 똑같이 쪼들리면서 살아요. 그리고는 아 여기서 1,000불만 더 벌면 괜찮겠다 싶은데 또 시간이 지나서 1,000불을 더 벌어 4,000불을 벌게 되었는데도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아요. 왜? 남는 돈 만큼 집을 늘렸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2,000불 벌 때도 쪼들리고, 4,000불을 벌때도 쪼들리고 10,000불을 벌때도 쪼들려요. 남이 보기에는 부유해졌지요. 하지만 그러면 뭐해요. 평생 쪼들리고 살면서 좋은 일도 한번 못해 보는데요 뭐.
그래서 우리가 평생 쪼달리고 가난하게 살지 않으려면 내가 어디에 욕심을 가지고 있는가 살피고 내가 여기에 욕심을 가지고 있다 싶으면, 이 분야는 이걸로 끝이다 하는 선언을 해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가 탐욕에서 자유로와 지고 진정으로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욕심의 한계를 정하시고 규모있는 삶을 사셔서 탐욕을 극복하시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3. 건전하지 못한 부부관계
세번째 우리가 본문에서 보는 아합의 문제점은 늘 악한 아내에게 끌려다닌다는 것입니다. 5절부터 읽어 보면 결국 이세벨은 모함을 해서 나봇을 죽여버리고 맙니다. 참 악한 사람들이지요. 지금 이글에서는 나봇만 죽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열왕기하라든지 다른 곳에 있는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을 보면 나봇뿐만 아니라 일가족을 다 몰살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맞는 것이 그래야 남은 재산이 국가의 소유가 될 수가 있지요. 우리는 이글을 읽으면서 이세벨이 악한 여자라고 분노를 하지만, 사실 아내에게 끌려다니는 아합이 더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이세벨은 어쩔 수 없는 여자입니다. 아스다롯을 섬기는 제사장의 딸인데 그 종교는 제사 지낼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종교니까 사람 죽이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지 않겠어요. 게다가 페니키아와 같은 전제군주국에서 공주로 자랐으면 이런 행동은, 물론 사람에 따라 조금 다르기는 하겠지만, 예상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상황에서 만약 아합이 조금만 책임감을 가지고 아내를 다루었다면 이렇게 까지야 됐겠나 싶으면서 바로 그와 아내 사이의 건전하지 못한 관계가 문제라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말을 좀 바꿔서, 가족의 문제를 다루는 심리 치료의 이론중에는 Structural Model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뭔가하면 문제가 있는 가족중에 많은 경우는 그 가족의 구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된다는 이론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와 자녀 그리고 제 3자, 할아버지 할머니가 서로 지켜야 할 자기의 영역을 지키지 않고, 부모가 얘기하는데 아이가 끼어든다든지 부모가 아이를 가르치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끼어드는 그런 가정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가정의 문제는 서로가 있어야 할 위치를 잡아주고 해야 할 책임을 다하도록 해주면 자연적으로 문제가 치료된다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다루는데 가장 핵심이 뭔가하면 바로 boundary, 즉 경계와 영역이 잘 세워져 있느냐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족이 잘 되려면 가족이라는 전체 system 속에서 부부라는 영역, 그리고 자녀라는 영역, 이런 boundary가 먼저 견고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먼저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어서 부부의 영역이 튼튼할 때 전체 가족은 안정을 느끼고 아이들이 잘 자랍니다. 뭔가를 가르칠 때도 부부가 한 팀이 되고 한 목소리가 되어야지, 즉 먼저 부모의 boundary가 든든해야지 교육이 되지 아빠는 “애들아, 이제 10시니까 자라.”그러는데 엄마가 “아이 방학인데 뭘 그래요. 좀 놀게 두세요.” 매사가 이런 식이면 애들이 혼선을 일으키면서 교육이 안된다는 겁니다. 또 부모가 아이들을 훈계하는데 할머니가 와서 “얘, 애 좀 내버려둬라. 이 이놈아, 넌 얘만 할 때 얘보다 더 심했어,” 이러면 부모와 자녀라는 boundary안에 할머니가 끼어든 것이고 그럴 때 교육이 잘 될 수 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유의 영역과 boundary를 잘 잡는 것이 건강한 가족의 열쇠라는 겁니다.
또 아이들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아이들 형제가 있다고 합시다. 그들은 가족이라는 큰 System안에서 그들 나름대로 어떤 형제 영역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사회성을 배워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 사이에 문제가 있을 때 어느정도는 자기들끼리 해결하도록 두어야지 엄마가 항상 간섭을 하면 않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조금만 문제가 있으면 “얘 형에게 그렇게 대들면 되니?”하고 중재를 해주고, 또 조금만 문제가 있으면 “얘 동생에게 양보해야지.”하고 중재를 해주면 그들 스스로 협상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는 겁니다. 자기네들의 boundary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친구들의 boundary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어느정도는 자기들 안에서 해결하는 법을 배워야지 우리에게 맞았다고 뛰어가고 그러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아이를 만든다는 겁니다. 하여튼 이렇게 저렇게 boundary, 영역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가족이라는 System안에는 그런 개인이면 개인, 그룹이면 그룹 이런 영역이 튼튼하게 세워져야 가족이 건강하다는 얘기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지금 부부사이의 그런 개인의 영역이 무너져 있는 겁니다. 아합은 지금 자기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은근히 아내가 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자기의 신앙적인 양심으로는 조금 어려우니까 와이프가 해주기를 바라면서 자기가 책임지지 않겠다는 심산입니다. 그러면서 아내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잖아요. 그리고 아내는 그 투정을 해결하기 위해서 악한일을 저지르고. 아주 심각한 boundary 문제를 가지고 있는 부부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부들이 많아요.
따라서 건강한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가족안에서 그런 boundary 즉 자기의 영역이 튼튼해야 하고 그안에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부부면 부부의 영역을 지키고, 그러면서 자녀들의 영역도 인정해 주고, 그래서 자녀를 결혼시킨 어른들은 절대로 결혼한 자녀들에게 부모라고 이렇구 저렇구 그 부부 사이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않됩니다. 마찬가지로 또 부부 지간에도 서로가 자기의 영역에 바로 서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영역안에서 자기가 해야 될 책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남편은 가장으로서 가족의 전반적인 책임을 지고 가야하는 바른 방향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그러면서 집안의 경제를 해결하는 책임을 지고 가능하면 어려워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아내는 내조하는 사람으로서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그러면서 누가 봐도 들어오고 싶은 따뜻한 가정의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을 하고, 이런 분명한 역할의 boundary 가 세워져 있어야지 되지, 남편은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안하고 그러면서 집에 오면 짜증만 내고, 아내가 뭘좀 해주지 이러구 바라고, 아내는 아내대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투정부리고 그러면 건강한 가정이 되기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그런 분명한 boundary를 유지하고 세우는 것이 행복한 가정을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상대의 영역을 존중하고 자기의 책임을 다하셔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죄인을 징벌하시는 하나님
자!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을 외면한 삶을 사는 아합에게 하나님은 결국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다시 얘기해서 아합은 이제 돌아설 수 없는 지점까지 간 것입니다. 17절부터 24절까지는 섬뜩할 정도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우리가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결국 죄인을 징벌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되기 전에 하나님은 여러번 아합이 회개할 수 있도록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자기에게 온 회개의 기회를 얼마나 많이 놓쳐버리고 있는 지 모릅니다. 먼저 16장 34절을 보면 그는 여리고를 건축할 때 하나님의 예고가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야 하나님이 하신다면 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대도 자기의 삶을 회개하지 않습니다. 두번째 아합은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 400명과 갈멜산에서 대결을 벌일 때 그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고 3년동안 비가 오지 않던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는 광경을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가까이서 경험하고도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20장에서 벤하닷을 살려주었을 때 예언자가 네가 잘못했다고 깨우쳐주니까 도리어 화를 냅니다. 이렇게 그는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고 계시는데 그 말을 안듣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참다 참다 못한 하나님은 벌하기로 마음먹으십니다. 즉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겁니다.
그런데 이 얘기의 반전은 27-29절입니다. 이 구절을 읽어보면 참 답답할 정도로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용서의 여운을 남기십니다. 이게 지금 말은 그의 아들대에 가서 재앙을 내리겠다고 들리지만 의미는 뭡니까 한번 더 기회를 주겠다는 얘기지요. 그리고 사실 아합은 지금 진정한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어지는 22장에서 또 나쁜짓을 하거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비록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고 해도 그것으로 기회를 주고 계신 거예요. 하나님은 정말 답답할 정도로 죄인을 벌하시지 못하십니다. 정말 참다 참다 못해서 모든 저주를 쏟아 부으셨으면서도, 또 마지막에 혹시 돌아 올까 하면서 여운을 남기시는 그런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베드로후서 3:9)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던지 회개하고 돌아오면 우리를 받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아서 31:34절에 하나님은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눈물로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셔서 새로운 관계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제가 왜 오늘 설교의 제목을 아합 대 하나님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아합은 평생 하나님을 적으로 만들면서 살았습니다. 사사건건 하나님이 진노할 일만 하면서 산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도 사사건건 하나님이 진노할 만한 일만 하면서 하나님을 적으로 만들며 살았지만 그런 우리의 죄를 하나님은 기다림으로 갚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셔서 주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