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배신자인가
렘37.11-21
시 작 기 도
무더위 속에도 지켜 주심을 감사합니다. 공동체 지체로부터 ‘목마른 자에게 주는 시원한 물 한 그릇’을 대접받고 힘을 냅니다. 그러나 퇴직하는 동료도 생기고 덥고... 내 마음은 불안과 불만으로 여유를 잃어 갑니다. 탈진해가는 길고양이의 지친 얼굴과 눈을 봅니다. 맑은 물 한 잔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병상에 있었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참 신앙이 무엇이며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지금 내가 맞게 하고 있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이 때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 날도 주님이 말씀대로 한 가지 순종을 하였습니다(물질지원). 이례적으로 즉각 결행했습니다. 그리고 지켜봅니다. 주님의 말씀이 맞는지, 나의 순종은 적절했는지...
아침에 주님의 헤세드와 신실로 내 영혼이 만족하고 기뻐하게 하시고 평생 그것으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그보다 더한 기쁨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것이 내 삶에서 실제가 되게 하소서.
본 문
11 바빌로니아 군대가 바로의 군대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철수하였을 때에,
12 예레미야는 집안의 상속재산을 물려받을 일이 있어서, 예루살렘을 떠나 베냐민 땅으로 가려고 길을 떠났다.
13 그가 '베냐민 문'에 이르렀을 때에, 그 곳에 한 수문장이 있었는데, 그는 하나냐의 손자이며 셀레먀의 아들로서, 이리야라고 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예언자 예레미야를 붙들고 말하였다. "당신은 지금 바빌로니아 군인들에게 투항하러 가고 있소."
14 이 말을 듣고, 예레미야가 "그렇지 않소. 나는 바빌로니아 진영으로 투항하러 가는 사람이 아니오" 하고 해명하였으나, 이리야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예레미야를 체포하여 고관들에게로 데려갔다.
15 고관들은 예레미야에게 화를 내며, 그를 때린 다음에, 서기관 요나단의 관저에 있는 구치소에 예레미야를 감금시켰다. 그 때에는 그 집이 감옥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16 그 곳에는 지하 감옥이 있었는데, 예레미야는 거기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17 하루는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데려와서, 그에게 은밀히 물어 보았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이 없습니까?" 그 때에 예레미야가 대답하였다.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계속해서 말하였다. "임금님께서는 바빌로니아 왕의 손아귀에 들어가실 것입니다."
18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에게 호소하였다. "제가 임금님이나 임금님의 신하들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지었다고 저를 감옥에 가두어 두십니까?
19 바빌로니아 왕이 우리 나라를 치러 오지 않을 것이라고 임금님께 예언하던 임금님의 예언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20 그러니 이제 부디 저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높으신 임금님, 부디 저의 간구를 받아 주셔서, 저를 다시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거기에 가면 살아 나올 수 없습니다."
21 시드기야 왕은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려, 예레미야를 근위대 뜰에 가두고, 그 도성에서 양식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빵 만드는 사람들의 거리에서 빵을 매일 한 덩이씩 가져다가 예레미야에게 주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예레미야는 근위대 뜰 안에서 지내게 되었다.
본 문 내 용
바벨론 군대가 바로의 군대 때문에 철수 했을 때에, 예레미야는 집안의 상속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을 떠나 베냐민 땅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베냐민 문‘에 이르렀을 때, 그 곳 수문장 이리야가 예레미야가 바벨론군대에 투항하는 자로 보고 그를 붙들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해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체포하여 고관들에게 넘겼고, 그들은 그에게 화를 내고 때린 후 서기관 요나단의 집 지하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예레미야를 시드기야가 데려와서,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바벨론 왕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입니다.”하고 그에게 호소하였습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감옥에 가두어둡니니까? 바벨론 왕이 우리를 치러오지 않는다고 예언하던 예언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를 요나단의 집 감옥에 보내지 말아주십시오. 살아나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왕궁 옆 근위대 뜰에 가두고, 양식이 떨어질 때까지 하루 한 덩이씩 주었습니다.
주 해
유다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예언 때문에 그를 ‘우리’나라를 배신하는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다른’ 편, 바벨론군대에 투항하러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지하 감옥에 던져 옥사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 앞에서 그 이후 임할 하나님의 이스라엘 회복과 그들이 영원히 거기서 기업을 이룰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땅의 상속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야말로 진짜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그 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유다 편이냐 바벨론 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편이냐 그 반대세력의 편이냐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내 편으로 삼을 대상은, ‘우리’하고 표현하는 어떤 국가나 민족이나 어떤 조직이나 교회나 교단이나 심지어 가족이 아닙니다. 특히 한국은 가족주의가 우세하여 가족 앞에서는 어떤 것도 통하지 않습니다. 이 ‘우리’와 ‘우리 편’ 개념은 하나님 나라와 거리가 멀게 합니다. 왜냐하면, (학교 교과서에서는 이것을 ‘준거집단’이라고 하는)그 ‘우리’에 속한 구성원들이 원하고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그 의에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나의 ‘우리’로 삼고 있는 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온전한 하나님 나라 개념을 갖고 그것을 내 ‘우리’로 삼지 않으면 절대로 온전한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님은 항일정신을 가지고 그들에게 적대감과 경계감을 품고 있는 것을 은근히 드러내며, 일본 선교에 대해 자기가 소극적인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깁니다. 하나님 나라에 일본인들이 거의 없는 것이 괜찮은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가족 구성원 중 일부가 사회와 교회에 명백히 불의를 행하여도 그것을 지적하지도조차 못하게 막는 ‘기독교 집안’을 많이 봅니다. 구성원의 불의를 덮기 급급한 지역교회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시간이 나면 아주 많은 예를 들어서 모든 생각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심정입니다. 나는 어디 편입니까? 결국은 하나님도 ‘우리’ 편을 위해 은혜를 베풀어 잘되게 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무서운 생각입니다.
주님 다시오실 날까지는 하나님 편, 하나님 나라 편에 서기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속한 곳에서 있는, 하나님 편이 아닌 사람 모두가 나를 배신자로 생각하고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타협하거나 무릎을 꿇으면 그들에게 참신자로 여겨지지만 하나님 나라의 배신자가 됩니다. 하나님 반대세력에 배신자가 될지, 하나님께 배신자가 될지 반드시 결정해야 합니다.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만물과 하나님은 그 뜻과 목적에 영원한 차이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사야55.8-11,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땅을 적셔서 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하고,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고 나서야,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하들과 백성들이 두려워서 그 예언대로 순종하거나 그가 계속 예언하여 온 백성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만들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민족의 배신자로 비쳐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근위대로 옮겨서 가두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인지 알면서도 유다사람들이 두려워서 회피하고 있습니다. 회피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실행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반대하면 받을 결과와 빼앗길 특권이 두려워서 타협하고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나 의 묵 상
(비참함)세상 사람이 두려워서, 그들이 싫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두려워서, 반대하면 받을 결과가 두려워서, 반대하면 얻지 못하는 것들이 아쉬워서 ‘하나님 편’이 되는 것을 포기 했습니다. 그 결과는 신앙의 생명이 잦아들고, 계속 찾아오는 징계와 심판, 비굴함과 수치의 감정이었습니다. 영적 죽음입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신앙인. 악마가 가장 바라고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서 잘난체하게 만드는 신자의 상태로 오래 지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어두운데 지내는 서글픈 인생이었습니다.
(구원) 그러나, 그렇게 비굴하고 못난 나와 함께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심판 받아 죽고, 나와 함께 나의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거기서 부활하셨습니다. 나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보내주신 성령으로 영원히 나와 함께 계십니다. 나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 나라의 군대입니다. 강하고 담대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이제 하나님 나라 편이 되어 그 나라를 이루어가고 다음 세대에 전합니다. 이것이 나의 정체성입니다.
(아버지 품)내가 속한 나라, 내가 속한 가족, 내가 속한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 안에 거하는 것이 나의 참 모습입니다. 나는 주님 편입니다. 아멘
기 도
하나님 반대 편에게 배신자로 당당히 서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을 통하여 노예로 얽매이던 편에서 해방되게 하소서. 용기와 결단력을 부어 주소서.
주님의 모든 교회들에게 하나님 나라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게 하소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편이 되게 하소서.
모든 민족들에게 만물 위에 계신 영원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목적을 보게 하소서. 그것이 예수님 안의 은혜의 영광임을 보게 하소서. 그들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