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시간까지 세 민족들의 해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 사고를 모두
살펴 볼 수 있었다.
그러면 이번 시간에는
현재 불교가 어떻게 오해되어져 있는지에
대해서 서술하려 한다.
1)오해된 불교 이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불교란 어떤 것일까.
그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불교에서는 육도윤회를 말하고 있다.
육도란 천상(天上), 인간(人間),
수라(修羅), 축생(畜生), 아귀(餓鬼),
지옥(地獄)의 세계이다.
이 여섯 가지의 세계를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을 육도윤회라 하는데
그 원동력은 업(業)이다.
업이란 몸과 마음을 가지고 행하는 결과물이기 때문에 신(身=행동), 구(口=말), 의(意=생각)이다. 좋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선업(善業)이라 하고, 나쁜 생각과 말과 행동을 악업(惡業)이라 한다. 인간으로 살다가 선업을 지으면 천상으로 태어나고 악업을 지으면 지옥을 태어난다. 그리고 욕심부리는 업을 지으면 아귀가 되고, 어리석은 업을 지으면 축생이 되고, 화내는 업을 지으면 수라가 된다.이러한 육도윤회의 세계는 고통의 세계로서 예토(穢土)라 한다. 따라서 인간의 완전한 행복은 윤회의 세계를 벗어나는 것에 있다.그런데 인간계는 새로운 업을 지을 수도 있고 소멸시킬 수도 있지만, 그 외의 세계는 새로운 업은 지을 수 없고 오로지 소멸만 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이외의 세계는 큰 업만을 소멸시킬 뿐 잔업(殘業)은 소멸시킬 수 없다. 따라서 인간계를 살면서 업을 지으면 인간 이외의 세계를 살면서 큰 업을 소멸시키고 그곳에서는 소멸시킬 수 없는 작은 업만이 남으면 그것을 가지고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 그러면 인간계에 태어나 새로운 업을 지을 수도 있고 또한 잔업을 소멸시켜서 해탈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인간만이 고통의 세계인 윤회 세계를 벗어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 몸을 받는 것은 대단히 귀한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으로 태어나면 어떻게 하여야 부처가 되어 윤회의 세계를 벗어 날 수 있을까. 하나는 수행을 통하여 자신의 업장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미타불에게 귀의하여 극락세계에 태어나 업장을 소멸하는 수행을 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불교적인 이치를 깨닫고 순응하는 각자(覺者)가 되는 것이다.2)오해된 불교 이론 비판이와 같은 이론은 육도윤회의 세계 중 인간의 세계는 삶의 세계에, 그리고 천상,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은 죽음의 세계에 배정되어 있다. 그리고 고통의 세계인 윤회 세계를 벗어나기 위하여 업장을 소멸하는 수행을 한다거나 아미타불에게 부탁한다는 것은 아리아적인 사고 기반과 별로 다를 것이 전혀 없다.또 불교적인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은 음양의 이치인 도를 깨닫고 그것에 순응한다는 자연의 이치가 불교적인 것인가 음양의 이치 인가만이 다를 뿐 한족들의 사고 기반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것이 불교라면 불교는 짜깁기 한 종교이다. 다시 말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미 존재하는 종교를 가지고 각색한 사기꾼에 불과하게 된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해 두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은 절대로 불교가 아니다.불교가 탄생된 토대는 아리아적인 시고방식이다. 하지만 불교는 분명히 그러한 사고방식을 버렸다. 그리고 전혀 다른 사고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이해하는 방법을 새롭게 제시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일부 불교논사들은 아리아적인 사고 기반 위에 불교를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였고, 또 중국의 많은 불교논사들은 아리아적 사고 기반이나 한족의 사고 기반 위에 불교를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특히 중국에서 탄생한 선종(禪宗)은 도교의 뼈대 위에 불교라는 옷을 입힌 것에 불과한 것으로써 불교라고 볼 수 있는 요소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대표적인 불교로 행세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불교란 어떠한 가르침인가.
이제부터 그것을 설명하려 한다.
불교의 진리는 무엇일까?
제2강을 통해 대부분의 종교의 바탕이 되었던
샘족, 한족, 아리아족들의 종교적 사고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불교가 어떻게 오해되어져 있는지에 대해서
서술하며 제2강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현재, 이 모든것을 살핀 지금은
이러한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오해라면,
도대체 진짜 불교이론이란 무엇일까?
불교는 무엇을 진리라 여기고 있는 것일까?
불교 사고의 시작은 무엇일까?
이제부터 이에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불교사고의 출발점
종교란 진실로 행복해지는
방법을 제시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그 방법을 제시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것은 진리이다.
따라서 종교가 제시한 진리는
그 종교의 교설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종교라는 범주 속에 포함되는
불교 역시 그러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 대하여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떠한 사고 기반 위에
만들어졌는지 살펴보겠다.
1)진리(眞理)지도가 정확하려면
사실에 근거하여야 한다, 사실이란 개별성과 보편성을 모두 만족하는 경험이다.
그러나 사실이 변했다면
지도도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된다.
따라서 지도의 정확도 여부는 변했는가,
변하지 않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따라서 정확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기적으로 새롭게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그러나 종교인 행복의 지도는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따라서 종교가 근거하는 사실은
영원히 불변(不變) 하는 사실인
진리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을 만족하여야 할까? 진리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따라서 사실이 갖추어야 할 조건인
개별성과 보편성은 물론이고
여기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불변성까지 갖추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실임이
입증되어야 한다.
따라서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험이어야 한다는 개별성,
누구나가 다 하는 경험이어야 한다는
보편성, 그리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실임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하는 타당성(妥當性)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
‘이 세상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존재하였고 내가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할 것이다.’이와 같은 주장은 진리일까.
우선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개별성과 보편성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런데 태어나기 전의 세상을
경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또 죽은 후의 세상을
경험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도 또 죽고 난 후에도
이 세상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일까.
그것은 다른 사람이 탄생할 때, 그리고
다른 사람이 죽었을 때 이 세상이
존재하였던 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험은 자신이 경험한
타인의 탄생 전과 죽은 후의 세상이지
자신의 탄생 전과 죽은 후의
세상에 대한 경험은 아니다.
따라서 이 주장은 자신의 경험이어야 한다는 개별성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 그 누구도 자신의 탄생 전과
죽은 후의 이 세상을 경험할 수는 없다.
따라서 모두의 경험이어야 한다는
보편성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어떤 명제가 거짓임이
판정되기 위해서는 이 명제의 반명제가
사실로써 판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또 내가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만 존재한다."
라는 반명제 역시 개별성과 보편성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주장은 사실인지 거짓인지조차도 판단할 수는 없는 주장이다.
따라서 진리인지 아닌지조차도
판단할 수 없다.
‘해는 동에서 떠서 서로 진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리일까.
우선 이 명제는 개별성과 보편성을
모두 갖추었다.
그리고 이 명제의 반명제인
“해는 서에서 떠서 동으로 진다"는
개별성과 보편성을 모두
갖추지 못하였기에 거짓이다.
따라서 이 명제가 사실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사실은 영원히
불변하는 것일까.
이 명제가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타당성을 갖추어야 한다.
타당(妥當)이란 어떤 판단이 도리(道理)에
합당(合當) 할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해가 동에서 떠서 서로 진다는
판단이 합당하기 위해서는
도리에 맞아야 하는데,
도리란 마땅한 방법이나 길이니,
해가 동에서 떠서 서로 진다는 판단이
도리에 맞으려면 이 판단이
마땅한 방법이나 길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왜 서로 저문 해가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다시 동에서 뜨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류는 그것을 해가 동에서 떠서
서로 지는 사실을 가지고 추측하거나
또는 상상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려 하였다.
상상은 사실임을 입증할 수 없다.
그리고 추측이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추측의 근거가 되는 사실이
추측의 대상과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예를 들어 내일도 해는 동에서 뜰 것이라는
추측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추측의 근거인
매일 동에서 해가 뜬다는 사실은
내일도 동에서 해가 뜰 것이라는
추측의 대상과 충분히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저문 해가
다음날은 동에서 뜨는 이유에 대한
추측의 근거가 해가 동에서 떠서 서로 지는
사실이라면 이것은 억측이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추측과 연관성이 있는 사실은 서로 저문 해의 움직임에 대한
개별적이고 보편적인 경험이지,
동에서 떠서 서로 지는 해의
움직임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가 해가 동에서 떠서
서로 지는 이유를,
창조주가 해를 만들었기 때문이라던가, 또는 음과 양의 움직임이라던가, 또는
밤새 해가 서에서 동에서 이동하였다던가
하는 설명은 아무런 타당성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아무런 사실에도 근거를 두지 못한
단지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현대에 와서 해가 동에서 떠서 서로 지는 이유가 지구의 자전 때문이라는 사실은
이미 상식이 된지 오래다.
따라서 언젠가는
지구는 자전을 멈출 것이고,
그러면 해가 동에서 떠서 서로 지는 일도
없어질 것이라는 것도 상식이다.
따라서 이 명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실이 아니라 언젠가는 변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현대에 있어서 이 명제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경험은
실재일까 꿈일까.’이 의문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하여 보자.
만약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경험이 실재라면,
이 경험은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만약 꿈이라면
이 경험은 보편성이 결여(缺如) 된
자신만의 경험이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꿈과 실재를 판단하는 기준은 자신의 경험의 보편성 여부(與否)에 달려 있다.그런데 보편성을 판단하는 주체는 나다.
그리고 그 판단의 근거는
타인에게서 얻은 정보다.
다시 말해서 타인이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정보를 나에게 주지 않는다면
나는 보편성 여부를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꿈속에서의 타인은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
그리고 실재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다시 말해서 꿈속에서의 경험도 실재에서의 경험과 만찬가지로 꿈속에서 깨어날 때까지는 분명히 개별성과 보편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때문에 꿈에서 깨어나기 전까지는
지금의 나의 경험이 실재인지 꿈인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
나아가 엄밀하게 말하면 장자의 꿈처럼
꿈에서 깨어난 경험까지도
꿈인지 실재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따라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그 어떠한 경험도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2)불교 사고의 출발점이처럼 내가 탄생하기 전에
세상이 존재하였는지, 또 내가 죽고 난 후에도 세상이 존재할지, 또 변치 않는 진리라고
믿었던 해가 동에서 뜨고 서로 진다는
사실까지도, 나아가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조차도 꿈인지 실재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진리란 무엇일까?
과연 개별성과 보편성 그리고 타당성을 모두 갖춘 진리라는 것이 존재나 하는 것일까?
자 그렇다면 이 명제는 어떤가.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경험은,
내가 탄생하기 전 이 세상이 존재하였는지
아닌지, 그리고 내가 죽은 후에도
이 세상은 지속될지 어떤지와 상관없는
나의 경험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또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
실재라면 나는 지금 실재인
여기에 있는 것이며,
꿈이라면 나는 지금 꿈 속인
여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틀림없는
나의 경험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경험은 누구나가 다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이것은 당연히 보편적인 경험이다.
그리고 또 내가 지금 여기에 없다면
이 세상을 인식하는 주체가 없는 것이니,
이보다 더 타당할 수는 없다.
즉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는 명제 이것은
개별성과 보편성을 갖춘 사실이며,
그 위에 또 영원히 변하지 않을 그 이유가
충분히 입증되는 타당성까지 겸비하였다.
그러니 이것보다 더 완벽한 진리가
또 어디 있을까?
불교의 사고는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