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날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진이가 여름 어린이 성경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로 덮어 주옵소서.
아들의 이름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가오니
아버지 품속의 평강을 누리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0. 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더니
11.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대로 모두 행하여 제사장 우리야가 제단을 만든지라
12.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 제단을 보고 제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13. 자기의 번제물과 소제물을 불사르고 또 전제물을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14. 또 여호와의 앞 곧 성전 앞에 있던 놋제단을 새 제단과 여호와의 성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제단 북쪽에 그것을 두니라
15. 아하스 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침 번제물과 저녁 소제물과 왕의 번제 물과 그 소제물과 모든 국민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다 이 큰 제단 위에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그 위에 뿌리라 오직 놋제단은 내가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라 하매
16.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의 모든 명령대로 행하였더라
17. 아하스 왕이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내고 물두멍을 그 자리에서 옮기고 또 놋바다를 놋소 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그것을 두며
18. 또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과 왕이 밖에서 들어가는 낭실을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옮겨 세웠더라
19. 아하스가 행한 그 남은 사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0. 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본문 주해)
10~11절 : 앗수르 왕이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동맹군을 대파하고 아람의 수도인 다메섹을 점령하여 지금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남유다 아하스 왕이 고마워서 앗수르 왕을 알현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갔는데 앗수르 왕의 제단을 보고 인상 깊은 감동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 제단의 식양대로 그린 설계도를 우리야 제사장에게 보내서 그대로 만들게 한다.
12~16절 :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우리야가 앗수르 식의 제단을 만들어서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던 번제단을 북쪽 구석으로 치워버린다.
그리고 본래 번제단에서 드리던 모든 제사를 앗수르 식의 제단에서 드리도록 명령한다.
15절의 ‘놋제단’은 본래의 번제단을 말하는 것이다.
이 부분의 번역이 이해하기 힘들게 되어 있는데,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주께’라는 단어는 들어있지 않다고 한다. 원어 그대로 옮겨보면 ‘이 놋제단은 내게 생각해 볼 일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즉 ‘앞으로 더 생각한 뒤에 조치하도록 하겠으니 지금은 저 북쪽 편에 가져다 두라’는 것이다.
17~18절 : 아하스는 물두멍 받침의 옆 판을 떼어내고 물두멍을 그 자리에서 옮기고, 놋 바다를 놋 소 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두었다.
거기다가 앗수르 왕에게 경의를 표하려고 여호와의 성전 안에 만들어 둔 왕의 안식일 전용 통로와 여호와의 성전 바깥에 만든 전용 출입구를 모두 없애 버렸다. 이는 왕의 위엄을 높여주는 것이지만 아하스는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이것들을 제거하였다.
이렇게 아하스는 자기 마음대로 성전의 물품을 바꾸고 그 구조를 변경하였던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앗수르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었으니 아하스에게 있어서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앗수르왕이었던 것이다.
19~20절 : 아하스가 죽고 그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된다.
(나의 묵상)
아하스가 성전을 완전히 개조해서 이교 신당을 만들어 놓는다.
그런데도 그가 드린 모든 제사를 과연 하나님께 드린 제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
15절에 ‘놋제단’을 치워버린 것을 보면 더욱 더 잘 알 수 있다.
‘오직 놋제단은 내가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라 하매’
아하스 왕은, 제사는 이방신들에게 지내고, 혹시 하나님께 뭔가 물어볼 일이 있으면 이 놋제단을 쓰겠다고 한다. 하지만 애초에 그는 하나님께 물어볼 마음도 없던 것이라 짐작이 된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 번역이 애매하다는 주해를 읽었다.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주께’라는 단어는 들어있지 않다고 한다. 원어 그대로 옮겨보면 ‘이 놋제단은 내게 생각해 볼 일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즉 ‘앞으로 더 생각한 뒤에 조치하도록 하겠으니 지금은 저 북쪽 편에 치워 두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하스는 화려한 제단으로 바꾼 제단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겼던 자이다.
거기다가 이 모든 배교적 행위에 제사장 우리야가 함께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제사장 우리야에 대해 이사야서에서 언급된 것이 있다.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언하게 하리라 하시더니”(사8:2)
하나님의 진실한 증인이라는 제사장이 변질되어 왕이 시키는 대로 하는 종이 되어버렸다.
(하루하루를 성령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모든 인간은 무조건 변질한다.)
어쨌든 오늘 본문을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아하스 왕이나 제사장 우리야나, 이들에게는 눈앞에 휘황찬란한 현실이 그들의 신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하스가 새로 개조한 화려한 제단은 ‘내가 죽는 십자가’는 없고, 오직 이 땅에서의 번성을 구하는 제단이었다.
오늘날 십자가를 말하지 않는 교회를 생각나게 한다.
하나님을 부르기는 하지만,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아 낼까?’ 궁리하는 군상들이 떠오른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자기가 원하는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오늘 앗수르 식의 제단을 성전 안에 들여놓는 것이다. 가증스럽고 더러운 아하스의 제단에서 벌어지는 제사인 것이다.
복음을 알고 나니, 내 마음이 너무 비판적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아닌 것이 분명한데, 그냥 미소짓고 앉아 있기가 너무도 힘든 것이다.
아하스의 가증스런 제단 앞에 그냥 미소짓고 앉아 있는 것이 믿음 좋은 태도인가? 사람들에게 좋은 소리 듣기 위해서 입을 다문다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도 옳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은 직격탄을 싫어한다.
‘네가 하는 말은 맞는 것 같은데, 너무 직격탄이 아닌가?’ 하며 요지를 흐리며 자신은 너그러운 척, 사람 좋은 척 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터진다.
아하스의 제단에서 벌어지는 제사.....거기에는 항상 등장하는 제사장 우리야들....그 화려한 제단에서 각자의 정성을 바치며 받을 복을 굳게 믿는 우매한 자들......
오늘날 교회 현실을 보며, 갈 길은 멀지만 더욱 힘써 복음과 생명의 삶을 전하리라 불타는 마음이 된다.
(묵상 기도)
주님,
왜 아하스가 므낫세처럼 악한 왕인지 확인합니다.
그 악함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날마다 말씀에 비추인 제 모습을 보고 십자가를 붙듭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야가 될 것입니다.
놋제단을 치워버린 아하스의 제단에는 ‘내가 죽는 십자가’는 없고,
오직 정성을 바침으로 이 땅에서 잘 되기만을 바라는 마음들만 우글거립니다.
그것을 꿈이니 비전이니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만 결국 탐심일 뿐입니다.
주님,
이것을 어릴 때부터 가르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가르치는 모든 자에게 담대함과 지혜를 주시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