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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론과 전도관 금학배추천 2011 6.07.15 23:45글 |
* 逆視觀(역시관)
一切(일체)의 觀(관)이 머리 精神(정신)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니 이를 주장이나 견해 등 법 방우라 하는데 이것을 覺(각)이 思量(사량)해서 일으킨다해도 되고 感覺(감각)이 외부의 抵觸(저촉)을 받아서 생겨난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이에다 간 본연에 濕氣(습기) 遺傳子(유전자) 性質(성질)이란 것이 합작해서 그 自我(자아)와 잘 부합되는가 與否(여부)나 可否(가부)등의 利害得失(이해득실)을 따져선 그 理念(이념)이나 思想(사상)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미 그렇게 보는 것은 이해득실 타산을 논하여선 그렇게 본다
어떠한 正觀(정관)이나 逆視觀(역시관)이라 하는 것도 마음에서 이미 그렇게 見解(견해)를 내어 定(정)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세워져서 보이는 것이요 원래 부텀 그게 그렇게 정관이나 역시관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다만 먼저 얻은 자가 이를 다른 이에게 傳播(전파)시키는데서 부터 그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자들이 그것을 그래 보느냐 아니 보느냐가 달려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각개인의 머리의 覺(각) 발달에 달렸다 소위 注入(주입) 시킴으로 부터 그 그래보는 觀(관) 사상이나 이념이 원래서부터 그런 줄로 믿고 여기게 된다 기실은 원래라는 것도 없지만 원래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인데 그렇다는 것이다 觀(관)의 어디로 궁굴러 가느냐이다 생각이 어디를 어떻게 가늠하고 재느냐이다
이래 이 생각이 妙(묘)한 것, 그에서 부터 만들어지는 것을 卑下(비하)하면 번뇌망상이 되고 飛躍(비약)하면 大達(대달)覺醒(각성)이라 하는 길이 되고 길이 되면 이것이 사상이 되고 이념 주의가 되어선 전파시키려 든다는 것, 소이 다른 머리를 오염 쇠뇌 시키려 드는데 그것도 그 머리라 하는 것을 열고 깨우쳐준다는 명분을 내걸고는 그래 한다. 소이 사상 등의 주입은 새로운 것을 알게되고 받아드리게 되는 것, 그 주입 받는 자의 두뇌는 자연 신비성과 환희 적인 것이 이렇게 覺醒(각성)되어선 받아드리게 되어서 그 머리에 刻印(각인)되게 된다,
이래서 그 머리를 쇠뇌 오염 받게된다는 것, 이리하여선 일체의 사상이나 이념이 생겨나선 퍼지게되었다 봐야할 것이다 利害(이해)를 논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가 결부되게되고 연계되게 되는데 그 행위와 작용을 함에 있어서 편과 불편함 들이 첨가되어서는 그 많은 關與(관여)를 하게된다 , 이래선 그 진출코자 하는 방향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소이 진로도 좌우하게 된다는 것,
우리의 머리 습기 유전자는 이래 이해를 논하여선 그를 세우는 그에 연계되는 여러 가지를 논하게되는데 利(이)로운 것에 대한 그를 이루는 兩比論(양비론)이나 多比論(다비론)이나,
害(해)를 이루는 그에 대한 양비론이나 다비론을 논하게되고 명분을 만들어 내는데 一助(일조)를 하게 된다
이를테면 그런 것은 나쁜 것이다 그런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런 것은 바른 것이다 그런 것은 그릇된 것이다, 하는 이런 것은 그 이해득실을 마음에서 논하는데서 부 터 생겨나선 그와 연계 지어선 또 그 이해득실을 논함으로부터 생겨나게 된 것이라는 것이지 원천에 그 선악이나 시비나 등 양비론 적이거나 다비론적 이라는 것이 있을 리가 없다,
생각을 그렇게 보는 것 소위 한쪽으로 골수를 치우친 작용을 일으킴으로부터 그렇게 보는 觀(관)이 生成(생성)된다는 것, 그것이 반드시 바르다하는 가치관이 있을수 없고 그르다하는 가치관이나 기준이 있을리 없다는 것, 利害(이해)에 따라서 反轉(반전)이나 飜覆(번복)이 손바닥 뒤 잡히듯 한다는 것,
소위 착한 것은 좋은 것이다 악한 것은 나쁜 것이다 하는 것도 이해득실에서 나온 것이고 그러한 착하고 악한 것의 반대 逆說(역설) 視覺(시각)觀(관)도 역시 이해득실이이나 그 앞서것을 둘러 엎고자하는 비판하는데서 부터 생긴 것인데 모두 득실로부터 그래 觀(관)이 생성된 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으로부터 알 수가 있다,
많이 퍼진 것을 그리곤 많이 주입된 것을 보편성이라 하고 이런데서 부터 관습이나 경우라는 것이 틀에 박힌 듯 존재하게 되어서는 그 다음의 생겨나는 머리정신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그러한 작용을 한다는 것이고 그러한 것은 하나의 진리 법이나 규약 제도 등으로 마음 머리정신의 행위작용을 제약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고 어떠할 때에는 그 머리를 열개[開(개)]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인데 그 머리에 자극 받아 남는 것은 제약으로 부터 모든 작용이 일어난 刻印(각인)된 것이라 할 것이다
正觀(정관)은 모든 이 들이 그래 주입 받아선 그래 인식하는 것이라 더ㅡ 논 할 것이 드믈고 逆觀(역관) 逆視觀(역시관)이 그 논란할 거리 주 대상이 된다는 것,
그러면 이러한 역시관을 예를 들어서는 논하여 보겠는데
蕩減(탕감)논리라는 것을 들어서 논하여보겠다 탕감논리라 하는 것을 그 어떤 치우친 것을 덜어서 평평하게 함으로서 덜고 더함이 없는 균형을 잡아보겠다는 그러한 논리이다 이것은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에서도 많이 동원되는 논거라할 것이다
사람들은 대략 심적인 부담을 많이 느겼을 적에 이러한 탕감논리를 동원하게되는데 대략은 그 종교적 신앙적인 색책를 띄게되는 그러한 논거 속에 존재하는 이론이 된다
소이 그 무언가 자기 행위에 대한 인식 받은 의식화된 머리에서 그 부담이나 가책을 느꼈을적에 그 어떻게든 덜어내 보고자 하는데서 부터 이러한 계산 깔린 탕감 논리라 하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
소이 쉽게 말해서 자신의 減點(감점)의 要因(요인)을 덜어선 加(가)의 要因(요인)으로 만들어 보겠다, 둔갑질 해겠다, 이런데서 부터 생겨난 발상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만히 관찰해볼 것 같으면 이래해서 그 어떤 좋은 일을 한다는 목적을 갖는다면 그 도구수단으로 이 탕감논리가 이용되게되는데 그 허물을 씻어내기 위하여서는 소위 착한 일 선한 일을 한다 이런 식으로 잔머리를 굴린다면 그래해서 나는 많은 적선 하여 그 선한 쪽의 공과를 더 크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한다면 물론 그렇게도 될 수 있고 그러한 공과를 많이 쌓은 것으로도 비춰 보일수도 있다할 것인데 이것을 역설적인 그래프를 만들어선 그려본다면 그 반대는 분명 마이너스 그래프가 반비례적으로 그려진다는 것을 우리는 깊은 생각 아니해도 알 수가 있다
소이 이러한 계산 하에 착한 행위를 한다는 것은 곧 그 허물이 방대한 계산으로 山積(산적) 했었다는 反證(반증)이 된다는 것, 소이 하면 할수록 예전에 그 허물이 컷었다는 취지 대악인 대악마 대마귀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 * 소위 전에 너가 악한 일 많이 했었기 때문에 그것을 탕감 받고자 착한 일 많이 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너는 악의 종자다 악마 후신이다 이런 궤변 아닌 궤변적 논리가 정립된다는 것임, 그러므로 너는 가증스런 악한 넘이므로 마땅히 맞아 죽어야 할 것인데 그렇게 가증스럽게도 선한체 위선을 떨면서 그 허물을 씻김굿 씻김 하듯 씻기움 받고자한다 이래 몰아 부침 받아도 아주 고소하고 당연 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넘은 아예 죽창이나 돌망치로 팡팡 쫘- 죽여도 죄 되지 않을가 하는 논리 말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 ]
이와 같은 逆視(역시) 논리라면
그 강도나 살인 등 일체 적악 이라 하는 것은 그 반대 觀(관)의 큰 反證(반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탕감논리가 모두 허무 날조된 얄팍한 계산 하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가 있다
소이 이러한 논리를 따른다면 착한 것을 할 필요가 없고 오직 악한 행동을 해서만이 예전에 많은 착한 행위를 한 것에 대한 입증을 받는 것이라 그 살인과 방화를 밥 먹듯이 하는 것에서 그 사람의 선한 행위에 대한 입증과 그 功果(공과)가 컸었다는 것을 인정받는 행위가 된다 할 것이다
소이 과거 선한 행위에 대한 적절한 댓가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음으로 그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하여선 그래서 한쪽으로 치우쳤던 것을 균형을 잡기 위해서 그러한 차원해서 지금 그 갖은 횡악질을 일으켜 보인다고도 할 수가 있다는 것,
이런 것이 바로 탕감 논리의 逆視(역시) 觀(관)이다
이래 그 무엇을 보상 받겠다 거나 그 무엇을 덜겠다고 하는 행위에서는 그 올바른 定義(정의)를 내리거나 基準(기준)을 삼거나하는 행위가 생길리 없다
조건 속에 하는 행위는 일체의 相(상)을 일으키고 그러한 일으켜진 상에 얽메여선 그 옥죄임을 감내하지 못하여서 하는 행위이라 원래 진실한 그 무엇도 없다 하겠지만 그 진실한 사로잡힐 그러한 행위로 볼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수 있다할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無住相(무주상) 이러한 것을 찬미하려는 주장은 아니다 왜냐 거기에도 얼마던지 비판할수 있는 逆視觀(역시관)을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이 어디에든 그 무슨 주장이나 견해이던 利害(이해) 長短點(장단점)은 다 있다는 것, 그것을 얼마나 잘 운용하고 경영하느냐에 따라서 단점은 커버되고 장점은 크게 돋보이게된다 , 시기나 질투나 이런 관을 갖고서 헐뜯거나 그래해선 그 가치 기준을 낮추려든다면 얼마 던지 논리 정립은 이뤄진다 , 그 반대 높이거나 아부 등으로 치하 찬미할 려면 역시 얼마던지 논리는 정립될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동전의 전후면 처럼 알수가 있다
설사 시기나 질투 아부나 아첨 등의 觀(관)을 갖지 않고서도 얼마 던지 兩(양) 얼굴의 논리정립은 세울수 있다
어떤 이 들은 그 부담 지우지 않는 무주상 보시를 최고의 보시라한다
그렇담 그 부담 지우지 않는 無住相(무주상) 보시란 무엇인가 ? 그냥 철몰라하는 아이들이 공짜이니까 너 먹어라하면 좋아라 달려들어선 '나도 하나 나도 하나 주세요' 하는 것을 갖다가선 그 무주상 보시라 할른지 모른다 이것은 대중의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이 뜻하는 바를 선전선동 하기 위한 하나의 술책에 불과할 뿐인 것, 거기에 무슨 하등에 무주상 하여서는 부담을 지우지 않는다 하는 것은 존재치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그 욕심을 없게 하는 것인가? 어떤 이는 그 '몹쓸 것' 같이 하여선 사람이 나다니는 길가에 내버리면 그 필요한 사람이 주워 갖게 한다 하면 이것이 무주상 보시라 할른지 모른다 소이 다른 이가 필요 없다하여 내버린 것인데 내 갖는 들 마음에 무슨 부담될 것인가 하는 것을 이용하여서 그 사람이 가지게끔 일부러 그래 길가에 다간 내 버리어선 무주상 보시를 하게 된다는 것, 자아- 그러면 지금 까지 이렇게 생각으로 그려선 이러한 논리적인 말을 해 돼 었는데 이것이 어찌 무주상 이라 할 것인가 이다
소위 일단 머리에서 무엇을 어찌 하겠다는 것을 그려서 그것을 바탕 삼아선 행하는 일체의 행위는 相(상)에 머무는 것이지 그 無住相(무주상)이라 할 수는 없다고 지금 내 머리에선 변죽을 울리고 있다 소이 진정한 무주상 보시는 있을수 없다는 것, 일체의 거시안적 觀(관)을 갖고선 그 수용 포용하여선 벗어치운 여러 가지 상을 그 可視距離(가시거리) 안에 넣어선 觀(관)하는 자세 밖에는 더 없다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 소위 무주상 보시라 하는 것은 유주상 보시를 뒤집어 어퍼선 자루에 집어넣고 꽁꽁 붓드러맨 그러한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수가 있다할 것이다
무주상 보시 없다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소위 염두에 두지말고 베풀고 이것저것 재지 말고 베풀고 계산 깔린 행동 접고 베풀고 허심탄회하게 응대해선 펼치라 그러면 이것이 무주상 보시이다 소이 정신 할망한 가운데 하는 일체 남에게 베푸는 행위가 무주상 보시라 이래 말해도 되지 말나는 법은 없을터 그 몽유병자나, 이중 인격이 형성된 자나 어떠한 외부 충격에 의해선 기억 상실된 자의 행위이거나 한 게, 모두 까먹은 것이라. 이게 모두 무주상 보시에 해당한다 할 것인데 참으로 가관토 않은 것이 여지것 이렇게 나열하여 보았자 모두 유주상 보시라는 것이니 지금 이러한 것을 사람 마음으로 그리어선 여기 지금 筆舌(필설)로 표현하고 있는 바라 어찌 모양이 아니라 할 것인가 이렇게 본다면 소위 무주상 보시라는 것은 없는 것이고 우에 되었던 다른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주는 거짓 없어 보이는 행동 속에서만 진정한 그 무언가 마음에와 닫는 베품의 모습이 느껴질 거란 거다
그 입에 발린 감언 유주상이나 무주상을 찾아서는 사람들의 심상을 어지럽히고 현란하게 할 래기이지 보시라는 것은 없고 타산적인 행동만 존재한다는 것, 그러므로 그래 설득할려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로 지금 내 머리에선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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