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사람의 공원에 제주도가 3000억원을 쏟아붓는다
"나무 한 그루도 베지 않고 달팽이의 속도로…내 맘대로 짓지만 내 이름은 안 남기는 조건"
돌·나무·집 모두 자연 그대로… 이곳에 가짜는 없다
연극배우 박정자 "눈에 거슬리는 건물 없고 모든 사물이 자연과 조화"
영화감독 임권택 "오래된 문짝 너무 예뻐 가져가도 되나 했다 혼나"
사진가 배병우 "단순한 컬렉터가 아니라 장인, 그것도 '미친' 장인"
'쉭! 슈르륵!'검은 뱀이 반 발자국 앞을 날쌔게 가로질렀다. 하마터면 밟을 뻔한 인간과 하마터면 밟힐 뻔한 뱀이 '헉!' 하는 숨소리와 '쉭!' 하는 혓소리를 주고받았다. 검은 뱀은 세모꼴 머리통을 치켜들고 혓바닥을 날름대며 골을 내다가 대나무 숲 푸른 그늘 속으로 미끄러졌다.
이곳은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산119번지. 땡볕 아래 대나무가 쭉쭉 뻗고 개가시나무가 하늘을 가리는 원시림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이런 시퍼런 숲을 '곶자왈'이라고 한다.
1999년 1월, 둥근 뿔테안경에 백발을 질끈 묶은 사나이 백운철(66)씨가 전지가위와 호미를 들고 조천읍 일대 곶자왈에 오솔길을 내기 시작했다. 숲을 뚫고 굽이굽이 이어져 다 걷는 데 2시간 걸린다. 옆에서 "그냥 불도저로 밀자"고 할 때마다 그는 "절대 안 된다"고 눈을 부릅떴다. 그 후 11년 동안 백씨는 숲이 끝나는 곳에 한옥 49채를 짓고, 야트막한 구릉을 따라 박물관과 갤러리를 세웠다. 백씨는 "이제 겨우 반쯤 왔다"고 했다. 오는 2020년 전시장·공연장·컨벤션센터를 겸한 특별전시관이 완공될 때 '제주돌문화공원'은 비로소 완성된다. 이제까지도, 앞으로도 돈은 제주도가 댄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지금껏 711억원을 썼다. 앞으로 2239억원을 더 쓸 계획이다.
- ▲ 동그란 뿔테 안경, 희끗한 수염, 밀집모자의 백종현이 수풀 헤치고, 나무 우거진 숲 속에서 이끼 낀 돌하르방과‘허허’웃었다. 제주 돌문화공원에 인생을 건 이 남자는‘동화 속 옛날 사람’같은 모습이었다. /이종현 객원기자 grapher@chosun.com
백씨는 "돌문화공원은 내 필생의 꿈"이라며 "돌 하나, 나무 한 그루까지 100% 내가 하자는 대로 짓고 있다"고 했다. 본인이야 자기 꿈에 인생을 걸었다 치자. 제주도는 왜 한 개인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이 넓은 땅(327만㎡·100만평)과 이 많은 돈(2950억원)을 쏟아붓는 걸까.
1998년 제주도는 백씨와 협약을 맺었다. 제주도가 돈과 땅과 사람을 대는 대신, 백씨는 평생 모은 기암괴석(奇岩怪石)과 오래된 석물(石物) 2만점을 제주도에 내놓기로 했다. 광활한 부지에 무엇을 어떻게 세우고 꾸미고 가꿀지 결정하는 권한을 100% 백씨가 갖되 공원 어느 귀퉁이에도 '백운철' 이름 석 자를 새기거나 남기지 않기로 했다.
그가 세운 원칙은 간단하다. 나무를 베지 말 것, 정 안 되면 옮겨 심을 것, 건물도 나지막하게 지어서 공원 어느 구석에서건 푸른 하늘과 봉곳한 오름이 건물에 가리지 않게 할 것. 요컨대 자연을 최대한 살릴 것.
4년간 그와 함께 일한 제주도 문화정책과 직원 문병혁(52)씨는 "공무원 입장에서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했다.
"하루에 할 일이 열흘 걸려요. 나무 베면 안 되니까 포클레인을 공원 안에 들여가는 것부터 보통 일이 아니에요. 땅 1m 파는 데 몇 달이 걸려요. 한 번에 움푹 파면 될 것을, 단장님은 20㎝만 파고 한두 달 기다렸다가 풀이 나고 비가 와서 사람이 팠는지 저절로 파였는지 알아볼 수 없게 될 때 또 20㎝쯤 파요. 아이고, 직원들끼리 모이기만 하면 단장님 욕했어요. 그런데 지금은요, 서울에서 전문가들이 와서 깜짝 놀라요. 공원에 들어선 건물과 작품이 주위 풍경과 조화를 이뤘으니까요. 우리도 으쓱하지요."
- ▲ 중장비로 잔디 할퀴고 나무 뿌리 파헤치는 걸 포기했다. 호미로 살금살금 파다가, 이끼 소복하게 덮고 새싹 돋을 때까지 기다리고 또 팠다. 평생 모은 나무 조각과 돌 내주고, 땅을 제 살처럼 보듬었을 뿐인데 사람들이 백운철더러“미쳤다”고 했다. /제주=이종현 객원기자 grapher@chosun.com
"한마디로 장인, 그것도 '미친' 장인"
백씨는 "후세에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아름다운 공원을 남길 수 있다면 내 이름 석 자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했다. 성인(聖人) 같은 말이지만 사실 그는 환갑 넘도록 '성인'보다는 '광인' 소리를 더 많이 듣고 살았다.
초입에서 출구까지 제주돌문화공원을 구석구석 둘러보려면 서둘러 걸어도 5시간은 족히 걸린다. 어딜 가나 백씨가 애써 모은 돌과 나무와 민예품이 있다. 트래킹코스 호젓한 그늘에는 오래된 묘 앞에서 가져온 동자석(童子石)이 서 있고, 노루가 튀어나오는 연못가에는 돌하르방이 햇볕을 쬔다. 옛사람이 불 때던 구들, 옛사람이 갖고 놀던 바둑돌, 옛사람이 곡식을 빻던 돌절구가 도처에서 방문객에게 말을 건다.
용암석, 조록나무 뿌리 등 자연이 만든 작품도 있다. 박물관과 갤러리 사이 평평한 들판에 무덤 같은 돌집이 한 채 있는데, 컴컴한 지하로 내려가면 어른 키만한 용암석 한 덩이가 은은한 조명 속에 우뚝 서 있다. 로댕이 만든 '지옥의 문'과 신라시대 반가사유상을 합친 듯한 모양새다. 용암석 발치에 찰랑거리도록 전시실 바닥에 물을 채운 것은 홍라희(65)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 준 아이디어다.
이걸 전부 모으는 데 백씨는 평생을 바쳤다. 절친한 사진가 배병우(60)씨는 그를 두고 "단순한 컬렉터가 아니라 장인(匠人), 그것도 '미친' 장인"이라고 했다.
- ▲ 제주 돌문화공원
가령 공원 도처에 서 있는 옛날 초가와 당집은 요즘 재료로 대충 지은 모조품이 아니라, 실제로 제주도 곳곳에 서 있던 고가(古家)를 옮겨놓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 백씨는 청년 시절부터 '헌 집 뜯는다'는 소리만 들으면 부리나케 달려가 서까래·대들보에 기왓장까지 몽땅 구입했다. 총 200채 분량이다.
부잣집 아들이었느냐. 아니었다. 아니니까 문제였다. 백씨는 "고생을 죽도록 했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 제주시 도심에 2층집이 딱 두 채 있었어요. 둘 다 여관인데, 그중 한 채가 우리집이었지요. 그런데 어머니 친구가 곗돈을 타서 뺑소니치는 바람에 전 재산을 날리고 온 식구가 뿔뿔이 흩어졌어요. 몇년 뒤 부모님이 남은 돈을 긁어모아 서귀포에 과수원을 일궈 빠듯하게 7남매를 키웠지만 옛날처럼 넉넉하겐 못 살았지요."
그는 서라벌예술대학에 진학해 탤런트 선우용녀(65)·남성훈(2002년 별세·당시 57세)과 함께 연극을 했다. 부모님은 마땅찮아 했지만 외할머니가 "내가 학비를 댈 테니, 저 하고 싶은 대로 놔두라" 했다. 대학 마치고 군대 갔을 때 돌과 그의 질긴 인연이 시작됐다.
- ▲ 제주 돌문화공원
새벽밥 지어먹고 한라산으로
"1102 야전공병단에 배속됐어요. 막사에서 잔 날은 한 달 남짓이에요. 나머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들판에 텐트 치고 인제에서 양양까지 도로를 깔았지요. 보직이 '화목병(火木兵)'이에요. 중대장 숙소 땔나무를 모으면서 '와! 세상에 이런 나무, 이런 돌멩이가 다 있었나?' 했어요."
그는 맘에 드는 나무와 돌멩이를 텐트 뒤에 모아놓고 틈날 때마다 완상했다. 휴가받아 고향 집에 내려왔을 때 그는 한라산 기슭에 올랐다. 흑단처럼 새까만 죽은 나무뿌리가 그의 눈을 끌었다. 현대조각처럼 기묘하게 생긴 나무뿌리를 들고 무작정 제주대 식물원에 찾아갔다가, 교수로부터 "조록나무 뿌리가 땅 밑에서 수십년간 잘 마르면 이처럼 단단해진다"는 설명을 들었다.
조록나무는 길쭉한 초록색 잎새가 우거진 상록수다. 한라산 낮은 곳과 일본 규슈에 많다. 백씨는 매혹됐다. 휴가 나올 때마다 새벽같이 한라산에 올라가 죽은 조록나무 뿌리를 찾아 헤맸다.
그는 지팡이를 들고 다니며 땅 위에 드러난 주먹만한 나무뿌리를 두들겼다. '딱!' 하고 맑은 소리가 울리는 뿌리를 골라, 조심조심 호미질을 했다. 소형 김장독 크기 한 뿌리를 캐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비 오는 날에는 바닷가를 돌며 괴석을 주웠다.
제대 후 그는 나무와 돌을 모으기 위해 연극도 때려치우고 고향에 눌러앉았다. 매일같이 새벽밥 먹고 호미 한 자루 쥔 채 산으로 뛰었다. 동네 사람들이 혀를 찼다. "과수원집 둘째 아들이 아무래도 군대 갔다가…." 온 동네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다. 어머니만 예외였다.
"나와 결혼할 의향이 있는가"
어디까지나 백씨의 이야기지만, 백씨의 어머니(2004년 별세·당시 83세)는 아들이 모으는 물건을 아들보다 더 좋아했다. 돈 벌 생각 없이 돌 주우러 다니는 아들을 탓하는 대신 과수원 마차에 인부까지 빌려줬다. 귤밭 일군 직후라 소출도 나기 전, 쪼들릴 때다.
1971년 백씨는 지금 서귀포 KAL호텔 주차장이 들어선 공터에 가건물(330㎡·100평)을 짓고 그동안 모은 조록나무 뿌리 1000점, 용암석 500점을 모아 '탐라목석원'을 열었다.
개원 후에도 백씨는 산으로 바다로 쏘다녔다. 백씨의 어머니가 전시장에 앉아 손님을 받았다. 입장료는 1인당 30원. 사단법인 한국물가정보에 따르면 그해 소비자 물가는 새마을 담배 한 갑에 10원, 라면 한 개 20원, 자장면 한 그릇에 100원이었다.
온종일 손님 한 명 없는 날이 많았다. 집안은 기울고 전시장은 파리를 날리고 어머니는 나이를 먹었다. 백씨의 형·누나·여동생·남동생은 불만이 많았다. 드디어 어머니가 아들을 닦달했다. "내가 언제까지 너를 책임지겠니. 장가 가거라."
백씨는 몇 개월 전 전시장에 들렀던 3살 연상의 재일동포 관광객 처녀에게 1장 분량의 소략한 편지를 썼다. 다짜고짜 "나와 결혼할 의향이 있는가" 묻는 내용이었다. 그는 "기행(奇行)처럼 들리겠지만, 그때 나는 절박했다"고 했다.
"KAL호텔 자리에 원래 '허니문하우스'라는 호텔이 있었어요. 재일동포 고국 방문단이 그곳에 묵었을 때 그녀가 내 전시장을 둘러보고 갔어요. 나중에 '선물'이라면서 일본 돌멩이 하나를 소포로 보내줬고요. 몇달 뒤 한번 더 여행 왔는데, 내가 돌 줍는 데 따라와서 재미있어 했어요. 그 무렵 제주도 처녀들은 전부 날보고 미쳤다 했어요. 내가 하는 일을 질색하지 않는 여자가 세상에 딱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이 어머니고 한 명이 그 사람이었어요."
나고야미대를 졸업한 김추자(당시 32세)씨가 그 편지를 받고 정말 현해탄을 건너왔다. 1973년 1월 11일 오후 7시, 두 사람은 춥고 컴컴한 목석원 전시장에 양초 12개를 켜놓고 등산복 차림으로 단둘이 식을 올렸다. 시내 식당에서 전복죽을 사먹고 여관에서 초야를 치른 뒤 이튿날부터 전시장 한편 살림방(16.5㎡·5평)에 신방을 꾸몄다. 전기도 수도도 안 들어오는 초라한 방에서 큰딸 은주(37)·은경(30)·한일(29)씨가 차례로 잉태됐다.
어느 날 거짓말처럼 돈이 쏟아졌다
백씨는 1975년 어머니가 융통해준 돈으로 제주시 아라동 임야(1만6500㎡·5000평)를 사들여 목석원을 이전했다. 새로 옮긴 목석원이 공중파 TV에 소개되면서 단체관광객, 신혼부부가 몰려들었다. 1980년대 내내 목석원에는 연간 100만~120만명씩 손님이 들었고, 해마다 10억원씩 벌었다. 본격적으로 남 보기에 쓸데없는 물건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석물과 골동품까지 수집 범위를 넓혔다. 고가 200채를 사모은 것도 목석원 수입 덕분에 가능했다. 그는 수집품 2만점을 목석원 한쪽 대형 비닐하우스 2동에 차곡차곡 꾸역꾸역 쟁여넣었다. 나중에 크레인으로 달아보니 11t용기 250대 분량이었다.
"내 것이라 생각하고 모아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들어온 물건을 돈 받고 팔아본 적도 없고요. 처음엔 아름다워서 모았고, 그 후엔 내 고향의 돌과 나무가 외지(外地)로, 일본으로 팔려나가는 게 안타까워 기를 썼어요. 한데 모으면 모을수록 '이걸 어떻게 하나' 싶었어요."
1998년, 그는 그간 운영해온 목석원을 닫고 수집품을 전부 제주도에 기증하기로 결심했다. 30년 지기 송성일(65·언론인)씨와 고홍철(56·언론인)씨가 번갈아 말리다 포기했다.
송씨는 "(백씨는) 나무와 돌 말고 다른 욕심은 전혀 없는 사람"이라며 "차차 컬렉션이 방대해지자 어느 순간 '한 개인이 영영 소유하거나 자식에게 물려주면 안 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했다.
고씨가 백씨를 신철주(2005년 사망) 당시 북제주군수에게 소개했다. 백씨는 신 군수에게 "50년 뒤를 내다보면 50만평을, 100년 뒤를 내다보면 100만평을 달라"고 했다. 망설이는 신 군수를 고씨가 대신 설득했다. '산 깎고 바다 메우는 행정을 하면 지금은 1등 군수로 대접받아도 후세에 꼴등 군수로 욕먹는다'는 논리였다. 신 군수는 숙고 끝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21년에 걸친 대사업이 시작됐다. 북제주군이 첫 삽을 뜬 사업이 제주특별자치도로 이어졌다.
"이걸 만든 사람은 미쳤어!"
목석원을 닫은 뒤 백씨의 부인과 두 딸은 일본으로 옮겼다. 아들은 서울로 이사갔다.
백씨는 혼자 남아 공원 한쪽에 에어컨 나오는 컨테이너 건물을 한 채 지었다. 인제에서 양양까지 도로를 깔던 야전 공병단 시절처럼 그는 여기서 먹고 자며 꿈속에 그리던 공원을 반쯤 지었다.
제주도에 갈 때마다 돌문화공원을 찾는 연극배우 박정자(68)씨는 "안에 들어가면 눈에 거슬리는 건물이 하나도 없고, 모든 사물이 자연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고 했다.
임권택(76) 감독은 "여러 해 전에 다녀오고 올해 5월에 다시 갔는데, 갈 때마다 희귀하고 볼만한 것이 많다"고 했다. "한번은 공원에 있는 오래된 문짝이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백 단장에게 '이것 가져가도 되느냐' 농담 삼아 물었는데 백 단장이 정색을 하고 일언지하에 거절해요. 여기 있는 물건을 모으는데 이 사람이 어떤 헌신을 해왔는가 느꼈지요. 그걸 선뜻 내놓다니 대단한 일이에요. 아무나 못합니다."
사진가 배병우씨는 "(백씨는) 공간이 스스로 숨쉬게 놔둘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2월 벨기에 국적의 세계적인 미술 컬렉터 악셀 버보오르트(Vervoordt)와 돌문화공원을 여행했다. 배씨에 따르면, 버보오르트는 경이에 찬 눈으로 돌문화공원 100만평을 샅샅이 둘러본 다음 이렇게 감탄했다고 한다.
"어마어마해! 이걸 만든 사람은 미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