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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 몹 낭독회, 낭독 책, 니체의 <비극의 탄생>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공부하며 놀며' , '종합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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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난 듯 일상을 벗어나 또다시 누군가의 일상으로 들어간다. 여행은 언제나 자기의 일상을 벗어나 누군가의 일상으로 들어가는 일이 아닐까?
진성도예에서의 1박 2일은 나의 일상에서 벗어나 연수님의 일상으로 쳐들어가는 일이었다. 자신의 일상에 또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고 이내 다 같이 비일상으로 전환을 꾀한다. 그것만이 함께 우리 모두를 환기시키는 일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내내 맴돌았다.
"당신은 지금 환기되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바로 알기는 어렵고 지난 시간을 정돈하며 환기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든 삶에서 시간은 내고 볼 일이다. 일상의 루틴은 깨지기를 거부한다. 이미 관성이 붙어서 계속 굴러가야 하니까. 그러나 때때로(물론 무계획적인 일탈은 아니었더라도) 그 루틴을 깨고 재설정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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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일상이 일상에게 얼마나 많은 힘을 주는가?를 상기한다면, 오히려 일상의 관성에 지독하게는 붙잡히지 말아야 하는지도. 지난 시간 동안 우리는 지독하게 일상을 훈련했던 것이 아닐까? 일상을 재점검하고 재설정하고 오직 일상에서 각자의 안위를 꾀해야 했다. (이러한 사태에 코비드 19라는 특수한 상황이 비록 끼어 있었지만) 일상 훈련은 그 자신들에게도 어찌 보면 하나의 테스트 기간이었지 않을까. 저마다 각자의 환기 통로를 마련하였고, 다양한 방식들이 있었다.
어느 날, 우리는 '철학책 줌 낭독회'를 하게 되었고, 일주일에 두 번 하는 낭독회에 거의 풀 출석하여 두 시간을 함께 보냈다. 오늘은 이렇게 생각한다. 읽기의 힘과 사색의 힘 그리고 글쓰기의 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무엇인가가 분명 달라졌다.
공간에 시간을 투여하여 우리 몸을 소진시키는 그 시간들이 차츰 '책 읽기 신체 만들기'를 축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란 무엇인가? 친구들 보려고 절대 빠지지 않는 이 웃음들은 무엇인가? 크게는 놀이의 시간이지만, 룰이 있는 놀이이고, 작게는 공부의 시간이자 생각의 시간이다. 역으로 크게는 사유의 시간이지만, 작게는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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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플로라/나 이렇게 만났지만, 참석하지 못한 친구들(다경과 미류)도 내내 같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마음이 와 있었나 보다!).
진성도예에서 연수님 책상을 보았다. 내 책상처럼 니체 책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다 같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등받이 의자로 교체되어서 나도 앉아 보았다. 흠 이제 등받이가 있으니까 좀 펀하겠구나! 싶었다. 앉아 보니 딱! 좋았다.
"다음엔 플로라 테이블 점검하러 가야 해~" 라고 말했다. 서로 책 낭독하는 모습을 줌으로만 보다가, 실제로 책 낭독하는 책상을 보니 뭔가 뭉클하였다.
우리는 meet에서 배경 바꾸기가 가능하니까, 자기가 원하는 배경으로 바꾸고 낭독한다. 다경이 있는 곳은 독일이고 대낮이므로 우리에게는 이미 비현실적 풍경으로 다가오므로 굳이 바꾸지 않아도 별문제 없다. 화면의 비현실적 풍경은 니체를 읽는 낭독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배경을 바꾸니, 오히려 줌 풍경이 더욱 더 편안하게 다가왔다. meet는 음 소거도 되니까, 자기 낭독 차례가 아닐 때는 자기 소리를 끈다. 낭독하기에도, 듣기에도 더 좋다.
우리 일상에 낭독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생활의 리듬이 나는 일단 여기에 맞혀졌다. 정기적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낭독 하는 일은 아무래도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다. 낭독은 게다가 철학책은 생각보다 에너지 소모가 큰 것 같다.
어쨌든 이제
<선악의 저편 / 도덕의 계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즐거운 학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두 번째 낭독
중간에 과학 서적 한 권 읽고
2주간 방학하고
<도덕의 계보> 세 번째 낭독 후,
<비극의 탄생 / 반 시대적 고찰>을 오늘 읽기 시작했다. 유명한 강력한 문장들이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다음 달이면 낭독회가 일 년이 된다.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모두 애썼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일신우일신 즐겁게 낭독이 이어지길 바라며,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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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비극의 탄생>낭독에서,
" 이 놀라움은, 저 모든 것이 본래는 자신에게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니고, 또 자신의 아폴론적 의식은 하나의 베일처럼 이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은폐하고 있을 뿐이라는 공포의 전율이 뒤섞일 때 더욱 더 커졌다.
(...)
그리스인은 실존의 공포와 경악을 알고 있었고 느꼈다. 그리스인은 살 수 있기 위하여 그 공포와 경악 앞에 올림포스 신들이라는 꿈의 산물을 세워야 했다. (...)
이 모든 것은 올림포스 신들의 저 예술가적 중간 세계를 통해 그리스인에 의해서 끊임없이 새롭게 극복되고, 아무튼 은폐되고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살 수 있기 위하여 그리스인들은 이 신들을 아주 깊은 필연성에 의해 창조해야만 했다.
그 과정을 우리는 다음처럼 그려보아야 한다. 원래 있던 거대한 공포의 신의 질서가 저 아폴론적 미의 충동을 통하여 서서히 변화를 겪으면서 올림포스의 환희의 신의 질서로 발전되었다. 마치 장미꽃이 가시덤불에서 피어나는 것처럼.
만악 실존이 보다 높은 영광에 둘러싸여 그리스 신들 속에 표현되어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민감하고 그렇게 격렬하게 탐하고 유일하게 고뇌하는 능력을 가진 그 민족이 실존을 달리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계속 살아가도록 유혹하는 실존의 보완과 완성으로서의 예술을 삶으로 불러들이는 그 충동이 또한 올림포스의 세계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 세계 안에서 그리스적 의지는 아름답게 변용되는 거울을 앞에 들고 있다. 이렇게 신들은 스스로 인간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인간의 삶을 정당화한다.
이것만으로 충분한 변신론이다. 그러한 신들의 밝은 햇빛 아래에서 실존은 그 자체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호메로스적 인간의 본래 고통은 삶으로부터의 분리, 특히 머지않아 다가올 분리와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실레노스의 지혜를 뒤집어, 그리스인들에 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나쁜 것은 곧 죽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나쁜 것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탄이 한번 울려 퍼지면, 그것은 단명한 아키레우스에 관해서도, 나뭇잎과 같은 인간의 번화무상에 관해서도, 영웅 시대의 종말에 관해서도 다시 울릴 것이다.
설령 날품팔이로서라도 더 살아남기를 동경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영웅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아폴론적 단계에서 "의지"는 이러한 실존을 격렬하게 갈망하고, 호메로스적 인간은 이러한 실존과 하나됨을 느껴서 비탄 자체가 자신의 찬가가 된다. " <책 본문 2장/ p 39~43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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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한 이 부분이, 책 제목이 <비극의 탄생> 인 이유와 '그리스에서 '비극'이 각광을 받았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속담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그 말과 겹쳐진다. 니체에 의하면 '실존'에 대한 공포와 경악을 극복하려고, 그리스인들은 신들을 창조했다. 그리고 미와 결합한 실존은 더 강력하게 실존하기를 동경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예술은 인간에게 가상세계를 열어준다. 환상은 도취시킨다. 이러한 아폴론적 조형 예술과 디오니소적 비조형 예술은 조각과 음악으로 대표적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이것을 현대사회에 적용하면, 개별화 되는 것은 '개인'으로, 개인이 사라지는 것은 '집단'에 대입해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개인의 특성과 집단의 특성이 여전히 인간 안에 보존되어 있다. 개별화가 깨지면(p33 참조) 자기가 망각되므로 집단에 섞이게 된다. 우리가 개별적인 일상과 여러 사람이 함께 어울려 놀거나 또는 여행의 비일상에서 다른 감정을 느끼는 이유도 이와 동일한 현상이라고 생각해본다.
인간이 실존을 공포와 경악으로 보면서도 실존을 강력하게 원하는 이유는 개별화와 개별화가 깨지는 이 두 상황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두 상황은 상호 자극(p29 참조)하면서 공존한다.
니체는 그리스인들과 호메로스적 인간형에서 이 두 상황을 포착하였고, 이 두 상황은 아폴론적인 힘과 디오니소스적인 힘이다. 동양으로 따지면, 음과 양이 된다. 아폴론적 개별화의 원리가 깨지면, 디오니소스적 도취가 나오게 된다.
이 두 요소는 결합되어 있고, 한 몸과 같다.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그러니 이 두 양상은 본래 하나이다. 하나에서 균형이 깨지면 다른 양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일상과 비일상처럼. 균형의 일상과 불균형의 비일상. 현대인에게는 이 두 요소를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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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꿈의 형상이 병리적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넘지 말아야 할, 그렇지 않으면 가상은 졸렬한 현실로서 우리를 기만하게 될 것이다. 저 민감한 경계선도 아폴론의 모습에서 없어서는 안 된다. 적절한 한계 설정, 광폭한 격정으로부터의 자유, 조형의 신의 지혜로운 평정이 그것이다." <본문 제2장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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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론의 형상은 '균형' 잡혀 있어야 했던 것이다. 간다라 미술은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받아 균형 잡혀 있다. 석굴암 부처도 균형 잡혀 있다. 개별적 인간은 균형을 추구하지만, 인간 집단은 불균형을 추구한다. 이 두 힘의 역동성이 '힘'을 만드는 것일 거다.
위의 발췌인용한 문장에서, '병리적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 역시 현재의 시대는 개인에게 통제권이 있다. 어쩔 수 없이 개인이 알아서 잘 해야 한다. 반면에 집단 무의식 또는 집단지성 역시 두 힘을 요즘 시대는 모두 사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개인은 어디까지가 개인이고 어디서부터 집단인지를 구분해야 하는 시점에 늘 존재해 왔다. 하나의 독립된 몸의 존재니까. 다만 독립적 개인에 대한 억압이 있어 왔고, '개인'이란 존재로 불리는 시기는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니체에 의하여 그대로 적용하자면, 인간이 실존에 공포와 경악을 느낄 때는 개인에 가깝고 인간이 실존을 강력하게 동경할 때는 집단에 가깝다. 고로 인간은 개인으로 존재할 때보다 집단과 함께 할 때 더 실존을 원한다고 볼 수 있다. 디오니소스적 비조형적 예술은 인간의 실존 열망을 발견하였다는 그 사실에 의의가 있다고 보인다. 니체의 관점은 탁월하다. 이러한 것을 발굴하여 글로 써낸 니체에게 경의를 표한다.
개인과 집단 그리고 개인과 모임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생각이 따라 붙는다.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도 그와 같은 것인가. 우리가 낭독회에 풀로 참석하는 이유도, 실존하려는 의지가 강해지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모이면 더 생존 의지가 강해지는 것일까! 아마도 지난 경험들에 비추어 보면 그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잘 모이는 것이 더옥 더 중요한 시대가 된 것 역시 맞을 것이다. 우리가 반응을 보이는 지점들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고 '사람들'이 있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실존 의지를 추동하는 것은 감성이며, 이것이 바로 큰 이성인 '몸' 그 자체다. 큰 이성은 이성과 감정을 몸에 가두어 놓았다. '몸 철학'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배경인 셈이다.
니체는 어떤 모순적 상황을 '대립'시켰지만, 결국 그 모순적 상황이 동력을 만든다. 그 동력으로 마침내 그 대립을 넘어서서 '사이'의 '새로움'으로 간다. 무수한 '모순의 대립' 있다. <도덕의 계보> 제3논문의 '순결과 관능' 역시 '모순적 대립'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존할 수 있고, 사람은 그 대립을 넘어서서 삶에서 그것을 다룬다. 넘어서는 바로 그것이 방향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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